제2장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
정월 초사흗날 새벽 당제(堂祭)가 시작되었다. 마을 앞 성황당에는 목욕재계한 제사장이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정중한 자세로 제수를 올리고 있었다. 정초에 제사장(祭司長)으로 지목된 이는 일 년 동안 궂은 곳에 드나들지 않으면 몸을 정결하게 가꾸곤 했다. 천관산 기슭에서 길어온 물로 제수를 새롭게 지었고, 제단(祭壇)에는 잘생긴 말 한 필이 금방이라도 푸른 초원을 달려가려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만든 동상(銅像)이었다. 제주도에서 기른 말이 육지로 들어오는 포구 주변에는 말을 신으로 모시는 당제가 많았다.
대흥면 연지리 성황당에도 마신을 모시는 당제가 진행 중이었다. 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함께 참여한 마을 어른들의 재배와 헌주가 이어졌다. 이인한도 맨 뒷자리에 서서 그들을 따라 절을 올렸다. 한밤중에 시작된 제례는 동이 터올 때에야 끝이 났다. 연지리 앞 들판으로 찬란한 아침 태양이 솟아올랐다. 산짐승, 들짐승을 위한 고시레를 마치고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복 차례가 돌아왔다. 마을의 어른들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한해의 건강을 축원했다.
“징이이이잉!”
제사장이 징을 한번 두들기며 마을을 도는 메귀굿의 시작을 알렸다. 굿패들이 제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제사장은 그들에게 남은 술을 나눠 마시게 했다. 마을의 장정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어린 소년들도 깃발을 들고 따라 나왔다.
‘농자지천하대본(農者之天下大本)’
마을에서 가장 동작이 빠른 최신동이 노랗게 귀를 단 깃발을 흔들며 제각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메귀굿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을의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을 밟아주며 새해의 복을 축원하는 일이었다. 굿패가 집으로 들어서면 집안에서는 맛있는 음식도 내어 오고 엽전 몇 냥도 내어 놓아서 흥을 돋구어 주었다.
굿패들은 제사장을 모시고 마을로 들어가며 신바람이 나는 가락을 품어냈다. 우람한 징소리가 울려 퍼지고 잔바람 같은 장구소리, 그리고 다글다글 자갈이 굴러가는 듯한 쇠소리에 듬직한 큰형님 같은 북소리가 어울려 느티나무 사이로 퍼져 나가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굿패는 마을에서 젊은 장정들이 중심이 되었다. 당제가 나이든 어른들의 차지라면 메귀굿은 마흔이 넘지 않는 젊은이들 차지였다. 어린 소년들에게는 날라리를 불게 하거나 상모를 돌리게 했다. 굿패가 이인한의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어허, 여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이인한 장군의 집일세. 우리 모두 지신을 밟고 어허허.”
꽹과리를 잡은 상쇠가 박자를 맞추어서 이인한의 집에 대해서 덕담을 하기 시작하자 풍물패들이 각자 박자를 맞췄다.
“깨갱 깨갱!”
“쿠구궁 쿠구궁.”
“두두둥 두두둥!”
“지이잉 지이잉!”
굿패들이 한 다리를 들어서 박자에 맞추어서 춤을 추었다. 이인한의 부인이 마루에 들어가서 한과 한 쟁반을 내왔다. 마당을 돌던 굿패들이 한과를 나누며 덕담을 하기 시작했다.
“이 댁에는 만수무강하옵시고, 논밭들에 주렁주렁 곡식들이 열리고, 말발걸음마다 도인들이 줄을 이어가고….”
“챙기챙기챙기챈!”
언제 왔는지 동네 할머니들이 마당을 돌면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어댔다. 지붕도 들썩들썩 바람도 들썩들썩 온 동네가 굿판에 휩싸여서 들썩댔다. 이인한이 굿패에게 엽전 두어 개를 내주자 상쇠가 신이 나서 소리를 키웠다.
“이대감님댁에 소원성취 내리소서!”
“어얼쑤!”
얼쑤, 얼쑤 사람들이 마당을 놀고 마루로 올라가서 지신께 인사를 드리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제왕신께 인사를 드리고 장독대로 가서 장독대 신에게 인사를 올렸다. 온 집안을 뱅뱅 돌며 지신을 밟은 행렬이 이어졌다. 최신동과 어린 아이들이 흔드는 깃발도 어지럽게 집안을 흔들었다.
이인한은 아래채 마루에 앉아서 최신동이 흔드는 농자지천하대본이라는 깃발을 대신해서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외세(斥洋外勢)를 읊조렸다. 드디어 정월이 되었고 전봉준 접주는 이제 고부성을 점령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장흥에서도 곧바로 기포령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귀굿의 행렬은 그에게 장흥 전투를 미리 그려보는 연습전이기도 했다.
‘전투란 반드시 이겨야 할 말이 있는 법, 승패는 전사들의 사기에 달린 것이다. 사기를 올리려면 필시 풍물을 이용해야 겠구나.’
그는 임진왜란 때에도 수군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꽹과리, 장구, 북, 징 소리는 그 기운이 커서 적들이 심장을 나약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인한은 메귀굿의 가락을 들으며 심장의 박동을 살폈다. 높다란 꽹과리 소리가 뒤통수를 치며 자꾸만 기운을 치솟게 했다. 이인한은 굿패들이 모두 전투장의 도인들이라 생각하며 상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앞쪽에서 사기(士氣)를 올리고 측면에서 공격을 하면 관군들을 물리치는 것을 식은 죽이다. 동문에서는 꽹과리를, 서문에서는 징소리를, 남문에서는 장구소리, 북문에서 북소리를 울리며 도인들이 성을 쳐들어간다면 관군들은 혼비백산 어디로 도망을 갈지 몰라서 난장판을 이루겠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도인들이 어디인들 못 가랴!
그러나 문제는 관군이 아니라 외세일 터였다. 관군들이나 고작 오합지졸 보부상의 병력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식 무기를 갖춘 왜놈들이 달려들면 상황은 또 달라질 터였다.
메귀굿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집집마다 돌며 술과 음식을 나누며 덕담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정월은 농한기라 특별히 할 일 없는 농민들에게는 좋은 놀이이자, 새날을 준비하는 마당이었다. 이인한은 마을 앞 들판으로 나와서 이웃마을에서 들리는 메귀굿 소리를 들었다. 마을마다 굿판이 벌어져서 풍물 소리가 들려왔다.
‘강강술래를 전투에 이용한 것처럼 농민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는 방법이 저기에 있군.’
이인한은 오래 전부터 들어온 임진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궁리를 거듭해 나갔다. 그는 탁월한 민첩함으로 회진만호에 가서 무기를 빼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군만호에는 분명 많은 무기가 쌓여 있을 것이었다. 그는 들판을 걸어서 바닷가에 이르렀다. 멀리 작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관졸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육지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저 바다 너머 섬에서는 더 많은 착취가 일어났다. 백성들이 잡은 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모두 관졸들 차지였다. 그는 섬사람들이 그가 나타날 때마다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이유를 잘 알았다. 배가 뜰 때마다 그들보다 앞서서 진을 치고 있는 수군들의 정찰선들이 흉어기보다 무서운 것이다.
이인한이 말을 타고 회진포를 찾아간 것은 어느 새 정월도 반쯤이 지난 보름날이었다. 그의 마음은 하루속히 덕도에 가서 포접을 하고 싶었으나 대소가의 친척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메귀굿이 끝나길 기다리자 속절없이 정월이 보름에 이르렀다. 회진포에 도착했을 때는 1월 15일, 포구에서는 보름을 맞이하여 풍어제를 올리고 있었다. 뱃전마다 오방색의 깃발이 휘날리고 풍물소리가 높았다.
“어르신, 새해 복은 많이 받으셨나요? 정초에 이곳에 웬일로?”
낯이 익은 사공이 이인한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이인한은 말을 포구에 묶어 놓고 사공에게 물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리는 어떠하오?”
이인한은 수십 년 동안 나룻배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세간의 소식을 물었다.
“저희 같은 무지랭이들이 무얼 아나요? 접주님이 더 잘 아시지. 고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 섬마을에까지 소문이 밀려오나이까?”
허연 수염을 날리며 사공이 물었다.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뱃전으로 올라탔다. 이인한은 이미 닷새 전에 일어났다는 고부 사건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을 뿐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 소문이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데 참으로 빠르오. 여기에서 봉화를 올리면 며칠이면 한양에 도착할 것 같소?”
사공은 닻을 올리고 노를 바다로 내 놓으며 이인한을 바라보았다.
“봉수대들이 한눈만 팔지 않으면 길어도 하루면 한양에서도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저 봉수대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걸 제 평생에도 본 적이 없어서......”
“하루......”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간대도 거의 보름이 넘게 걸릴 거리가 하루면 소식을 알 수 있다고 하니 이인한의 생각도 번뜩였다.
“그런데 어르신, 덕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이인한은 귀가 번쩍 뜨여서 사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따리를 이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던 아낙이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이상한 양반이 자꾸 덕도에 나타나는데 그 양반이 말도 잘 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늘님이라고 맞절을 한다고 합디다. 양반 상놈 구분도 없고 모두 평등하게 살 세상이 온다고 하니까 우리들은 그 말만 들어도 좋지 않소. 나도 그 양반 얼굴 한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늘 보따리 장사를 하니 만날 수가 없구랴.”
아낙은 섬에서 말린 미역을 가지고 육지 곳곳에 가서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아낙의 보따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아낙이 뱃전에다 보따리를 풀어제쳤다. 반짇고리, 노리개, 비녀 등 온갖 물건이 다 들어 있었다.
“미역을 이고 가서 방물로 바꾸어서 섬에서 파는 군요.”
늙은 사내가 보따리 주변에 쭈그려 앉아서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아낙이 파리를 쫓듯 사내를 쫓아내며 다시 주섬주섬 보따리를 묶었다.
“보부상이 많아서 물건 팔기도 쉽지 않아요. 여기저기 알음알음으로 친척들만 찾아서 팔고 오는 길이오. 그나저나 덕도만 그런 게 아니라 천지에 백성들의 한숨소리만 들리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소리가 높아지니 올해 갑오년이 예사롭지가 않소.”
아낙이 투덜거리며 육지의 소식을 전했다.
“바다에서는 좋은 고기는 모두 관졸들이 빼앗아 가고 육지에서는 먹을 만 한 것은 모두 세금으로 바쳐야 하니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들 합니다. 어디에다 발을 붙이고 살아갈까 참말로 모진 세월이오.”
아낙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이인한은 한발 물러서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무도 이인한을 눈 여겨 보지 않았다. 다시 사람들이 모여 들며 왁자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 동학에 입교를 한다고 하지 않겠소? 동학에 들기만 하면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차별이 없고 또 유무상자((有無箱子)라고 해서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고 산다고 하니 없는 사람에게는 살맛 나는 세상 아니겠소?”
늙은 사내가 아낙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낙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여기뿐만 아니고 지금 육지에서는 야단법석이 난 셈이죠. 너나 나나 동학을 하겠다고 나서니 관에서는 동학을 한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혈안이 되었어요. 아무 데서나 동학한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허리가 부러지게 맞고 오니 모두들 입조심 하시구랴.”
아낙이 못을 박자 사람들이 두려움 표정으로 흩어졌다. 이인한은 세간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남실대는 탓에 배는 노를 세게 젓지 않아도 섬으로 잘 밀려갔다.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어느 새 덕도의 포구에 배가 닿았다. 이인한이 배에서 내리자 지난 달 입교한 덕도 접주 윤범식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다음 호에 계속)
2015/05/19 - [소설/명금혜정] -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4) - 갑오년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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