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명금혜정 썸네일형 리스트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장흥편) 1~12회 / 명금혜정 제1장 갑오년의 아침 이인한은 마을 앞 연못에 서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1894년, 갑오년의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들판 너머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차가운 갯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였다. 그는 하늘님께 심고를 드리고 두 손으로 목검을 잡고 재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내리쳤다. 챙하는 소리가 연못을 흔들었다. 느티나무 고목의 잔가지들이 연못 속에서 미세하게 떨었다. 잔바람에 물살이 파르르 밀렸다. 이태 전에 이웃마을 송촌리 이순홍(李順洪) 도인에게 입도식을 한 후로 그는 날마다 연못 가에서 수련을 했다. 그는 두 입술을 꼭 다물고 날카로운 눈으로 들판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미 입도한 도인들의 발걸음이 저 바다 너머 섬마을의 골목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썰물이 되면 바..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12회 - 비와 구름을 몰고 온 여인 “꽝! 꽈아아앙!” 흐린 하늘로 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탐진강가에서 장녕성을 향해 서 있던 도인들이 함성을 지른다. 이미 전날 벽사역에서 승리를 맛본 도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하룻밤 사이에 여름 장맛비처럼 불어난 도인들의 숫자를 눈으로 헤아려 보며 이소사는 말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최신동이 행렬의 맨 앞에서 나팔을 불었다. 나팔소리가 고요하던 장안으로 울려 퍼지며 성 주변의 사람들을 깨웠다. 도인들은 일제히 장녕성을 향해 전진했다. 가파른 산자락을 타고 올라야 하는 남문 공략은 이방언 대접주가 맡았고, 탐진강 줄기에서 올라오는 동문을 향하는 동학군은 이인한 대접주가 지휘하고 있었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홍조를 띤 볼, 형형한 눈빛의 젊은 여인, 이소사가 이끄는 농민군은 북문을 치기로..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11회 이인한 기포령을 올리다(2) 남원집회 이후 전라도 남서부 일대에는 요소요소에 동학농민군 부대들이 혹은 운집하고 혹은 이동하며 고을고을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 전역을 통틀어서, 아니 어쩌면 전국을 통틀어서 동학농민군에게 목에 가시 같은 나주성이 인근에 있어서 이를 믿고 항거하는 몇몇 양반 중심의 민보군 부대도 만만찮게 세를 규합해 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본군과 관군이 곳곳에서 동학군을 대패시키며 남하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웅치면에 모인 수천 명의 동학군들은 머리에 황건을 쓰고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이미 전주성을 함락하고 내려온 외부의 동학군들도 함께 참석을 했고, 인근이 보성과 강진에서 들어온 도인들도 합세를 했다. 장흥부사 박헌영은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웅치면에 웅거해 있다..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10회) 이인한 기포령을 올리다 “접주님, 저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인한이 천관산에서 윤범식을 만나고 내려오는 새벽, 한 마을에 사는 열네 살 최신동이 사립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아직 미성년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거라.” 이인한은 뺨에 분홍빛 기운이 흐르는 최신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올시다. 저도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접주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최신동의 가는 눈에는 벌써부터 각오가 들어 차 있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도인들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도 않는 애들더러 싸우라고 해서는 안 된단다. 싸움이란 스무 살이 넘은 사람만 해야 하는 일이지.” “아니옵니다. 저는 접주의 재주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9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2) 이인한이 회령진에서 무기들을 빼앗자 수군들은 당황했다. 만호는 무기를 잃어버린 죄가 무서워 굳이 이인한을 잡아들이지 못했다. 수졸들은 덕도에 쳐들어와서 도인이라고 의심이 되는 사람들은 한명씩 차례로 잡아가기 시작했다. 윤범식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회령진으로 잡혀간다는 소식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 했다. 빨리 덕도로 돌아가서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이인한은 윤범식을 천관산 깊은 골짜기에 숨겨 두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시냇물이 촬촬 불어 나면서 들녘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갔다. 춘궁기에 누렇게 뜬 백성들이 아직 설익은 보리를 베어다가 끼니를 떼웠다. 보리단 타는 냄새가 들판에 그득하게 퍼져 올랐다. 동네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대고 ..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8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 이소사 내외가 솔섬으로 떠난 후 덕도에는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이소사에게 걷어 채인 수졸이 병사를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김양문과 이소사가 이미 도피했다는 것을 알고 김양문을 아버지를 잡아 갔다. 그리고 김양문이 있는 곳을 대라고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쉰 살이 넘은 김양문의 아버지는 수졸들의 매질에 못 이겨서 산 송장이 되어 종에 등에 업혀 왔다. 덕도 사람들은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모두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밤중에 살금살금 장독에 특효라는 똥물을 거두어서 김양문의 집 앞 대문가에 두고 가곤 했다. 이소사의 시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타들어가는 입술에 맑은 똥물을 흘러 넣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치자를 밀가루에 개서 장독이 난 허벅지에 ..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7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4) 솔섬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며칠간 망을 보느라 바위 굴에 숨어 있었던 이소사와 남편은 바다에서 별 기척이 없자 아침 저녁으로 슬슬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바다에 배가 한 척도 뜨지 않는 날이 되면 두 사람은 양지바른 곳을 찾아 오래도록 심고를 드렸다. 바위틈으로 비쭉이 쑥이 새싹을 내밀고 바람도 매운 기색이 가시고 살갗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어디 멀리 떠나야 하지 않겠소? 관졸들이 우릴 잡으려고 한다면 이곳이야 금방 눈에 띄는 곳이오. 마을 사람들이 알려주기만 하면 우리는 그냥 발각이 되고 말 것이오.” 김양문은 이소사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벌써 며칠째 같은 질문을 해대도 이소사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쪽을 진 머리에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꼭 닫힌 입술로 생각에 젖어 있기만 ..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없이 흐르고(6회) -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3) 덕도 앞 바다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달이 천천히 떠오르자 수면 위로 은빛 물결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이인한은 윤접주의 마당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포구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인한은 골목을 살폈다. 이제 곧 앞 섬에서 입도식을 치르러 도인들이 올 터였다. 그런데 윤범식이 아들 성도와 마루에서 뛰어 나와서 포구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짚이는 게 있는데 내려가 보십시다.” 윤범식이 먼저 골목길을 내다르며 이인한에게 길을 터주었다. 성도가 이인한과 윤범식의 사이로 파고 들며 속삭였다. 밤바람이 돌담사이로 스치며 성도의 말을 가르고 있었다. “오늘 밤에 나타난 수졸들은 메두기타작을 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었어요.” 윤범식은 뒤로 쳐지며 성도의 뒤.. 더보기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2 더보기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5회) -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2) “어서 오시오. 접주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윤범식이 이인한의 짐보따리를 받아 들며 반가운 기색을 했다. 그의 곁에는 눈썹이 까만 소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범식이 소년에게 손짓을 했다. 소년이 나루터에서 큰 절을 올렸다. “성도라고 합니다. 멀리서 어르신을 자주 보았습니다.” “몇 살이냐?” “설을 쇠었으니 이제 열여섯이옵니다.” 이인한은 볼에 발그레한 빛이 흐르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강한 눈빛이 소년에게도 담겨 있었다. “집으로 드시지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윤범식이 이인한을 안내하며 총총히 마을 길로 들어갔다. 포구에는 풍어제를 준비하는 뱃전에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은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슬슬 날이 풀리기 시..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