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9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2)

 

 

이인한이 회령진에서 무기들을 빼앗자 수군들은 당황했다. 만호는 무기를 잃어버린 죄가 무서워 굳이 이인한을 잡아들이지 못했다. 수졸들은 덕도에 쳐들어와서 도인이라고 의심이 되는 사람들은 한명씩 차례로 잡아가기 시작했다. 윤범식은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회령진으로 잡혀간다는 소식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 했다. 빨리 덕도로 돌아가서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이인한은 윤범식을 천관산 깊은 골짜기에 숨겨 두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시냇물이 촬촬 불어 나면서 들녘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갔다. 춘궁기에 누렇게 뜬 백성들이 아직 설익은 보리를 베어다가 끼니를 떼웠다. 보리단 타는 냄새가 들판에 그득하게 퍼져 올랐다. 동네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대고 못자리를 돌보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인한도 연지리 앞 논을 갈아엎었다. 써레질을 하고 논둑을 새로 만들고 보리를 거둬들일 준비로 하루하루가 쉴 틈이 없었다. 이인한은 가솔들과 더불어 농삿일을 하다가도 천관산을 바라보며 길게 심호흡을 하곤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은 심상치 않았다. 고부에서 시작된 도인들의 항거는 이제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에 맞서서 동학군에 대한 탄압도 날로 극심해 지고 있었다. 급한 대로 낮에는 농삿일을 하고 밤이면 수십 리를 달려서 인근의 접주들을 만나서 주변의 소식을 들었다. 부안에서 정읍에서 전주에서 밀고 내려오는 동학군들의 세력이 날로 커져간다는 것은 이인한에게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이인한은 당장이라도 농삿일을 집어 치우고 장흥 들판을 달리며 도인들을 집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었다. 그는 솔섬에 있는 이소사를 한밤중에 데려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기별을 띄우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회령진 수군만호는 이인한에게 당한 수모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덕도의 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소사의 시아버지인 김노인은 다시 회령진으로 잡혀 들어갔다. 그는 포구에서 수군의 배를 타며 부인에게 당부를 했다.

이번에는 살아오기가 힘들 것이오. 그러니 살기를 꾀하려면 멀리 섬으로 달아나도록 하시오. 아들 내외에게 반드시 이 소식을 전하길 바라오. 내가 며느리 대신 죽으러 간다오.”

김노인은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짧은 한 생애를 돌아보았다. 시절을 잘못 만났으니 사람을 탓해서 뭣 하랴! 이소사는 김양문에게 과분한 부인이었다. 일찍이 신학문을 받아 들인 이순홍이 애지중지 기른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이 너무나 이연하를 좋아하니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단 한번 뿐인 것을, 세월이란 지나고 나면 찰나에 불과하지 않던가? 김노인은 아들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며느리에게서 달덩이 같은 아들만 하나 얻는다면 자신이야 죽어도 한이 없는 인생이었다.

때마침 늙은 수졸은 이소사에게 걷어 채이고 나서 병을 앓다가 회복되어 다시 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며 김노인을 잡아가는 일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김노인의 상투를 잡고서 이리저리 흔들며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신 며느리가 그렇게 똑똑하오. 그런 며느리를 둔 값을 오늘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오.”

김노인은 모멸감으로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었다. 상것으로 살아오지도 않았고 덕도에서는 그래도 전답이 꽤 쏠쏠하게 많아서 종들을 거느리며 편안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일찍이 서당에 다니며 학문을 익혔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어서 일가친척들과 더불어 그만그만하게 살아가는 것이 생의 목표였건만 그마저도 누릴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며느리가 한 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동학은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함께 잘 살아가는 정신이랍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마음을 열면 누구나 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답니다.”

김노인은 눈을 질끈 감고 바람을 타고 달려가는 배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늦은 봄날, 바다에는 고기들이 활개를 칠텐데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이제는 어장질조차 할 수 없게 될 신세를 받아드려야 할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두고 저승길로 가야 할 시간. 그는 며느리에게 배운 심고를 올리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리라. 살고 죽는 것도 하늘의 뜻이러니 원망하지 말라

그러나 한줄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그의 의식은 다시 못 볼 고향땅을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뱃길을 따라 흘러갔다.

 

 

솔섬에 숨어 있던 김양문과 이소사는 한밤중, 동굴로 스며드는 노 젓는 소리에 후다닥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예감이 불길했다. 관군에게 숨어 있는 곳을 들켰거나 동네에 큰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았다. 이소사는 숨겨 놓은 화승총에 화약을 넣어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도 칼을 차고 총을 들고 살금살금 입구로 나갔다.

열사흘 달 아래로 비춘 것은 집에서 쓰고 있는 종선(從船)이었다. 큰 배가 포구에 닿지 못할 때 종선으로 물건을 나르곤 하였다. 이소사는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오?”

종선에서 몸종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서방님 큰 일 났습니다. 빨리 배에 오르십시오. 관아에 잡혀간 어르신이 목숨줄을 놓았다고 합니다.?”

뭐라고?”

김양문은 바위굴에 우렁우렁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소리를 지르며 배가 채 바위에 닿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뱃전으로 기어 올라가서 이소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가서 초상을 치르겠소. 아버님이 우리 대신 돌아가신 거요. 부인은 여기에 머물던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시오.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부인은 뜻이 크게 있으니 반드시 이루도록 하시오.”

김양문은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내며 몸종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고 했다. 이소사도 바다에 몸을 던져 재빠르게 종선을 향해 헤엄을 쳤다. 뱃전에 이르니 김양문이 이소사의 손을 잡아서 배 안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저도 가야 되옵니다. 저 혼자 남아서 무슨 뜻을 이루겠습니다. 아버님이 이렇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 치졸한 관졸들이 제 대신 귀중한 생명을 한 명 빼앗아 가다니.”

이소사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해결되지 않을 울분이었다. 자기 때문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그러자고 동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지러지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뱃전을 부둥켜 안았다.

서방님, 저는 떠나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집안 식구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 집에서 희생은 아버님 한 명으로 그쳐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세상을 개벽할 꿈을 키우며 자랐으니 산으로 올라가서 도인이 되겠습니다.”

이소사는 뱃전에서 남편에게 큰 절을 올렸다. 김양문은 어리둥절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지금 관아에 있다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아올 궁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건만 부인이 떠난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떠나더라도 초상이나 치르고 떠나도록 하시오.”

그러나 이소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니되옵니다. 아버님 초상을 치르기 위해서 우리가 관아에 나타나면 저들은 우리 둘을 모두 잡아들일 것입니다. 부디 서방님께서도 앞에 나서지 마시고 뒤에 숨어서 초상을 치르도록 하십시오.”

김양문은 이소사를 바라보며 침울하게 대꾸 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거사가 닥치면 당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은 이미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이번 일을 마무리 하고 떠나도록 하시오. 우선 아무도 모르게 동백숲에 숨어서 초상을 치르게 하겠소.”

김양문은 혀를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소사도 다시 정좌를 했다. 온몸에서 바닷물을 뚝뚝 흘러내렸다. 봄날이라지만 새벽 기운이 차가워 입술을 덜덜 떨리고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러나 이소사는 밤 하늘에 떠 있는 샛별을 보며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위기가 아닌 순간이 있으랴! 위기 속에서도 더욱 찬란한 빛을 찾아야 하리라.”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웠다. 뿌연 새벽안개 속에서 덕도가 눈에 들어왔다.

 

 

2015/06/22 - [소설/명금혜정] -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8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