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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8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

이소사 내외가 솔섬으로 떠난 후 덕도에는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이소사에게 걷어 채인 수졸이 병사를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김양문과 이소사가 이미 도피했다는 것을 알고 김양문을 아버지를 잡아 갔다. 그리고 김양문이 있는 곳을 대라고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쉰 살이 넘은 김양문의 아버지는 수졸들의 매질에 못 이겨서 산 송장이 되어 종에 등에 업혀 왔다.

덕도 사람들은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모두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밤중에 살금살금 장독에 특효라는 똥물을 거두어서 김양문의 집 앞 대문가에 두고 가곤 했다. 이소사의 시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타들어가는 입술에 맑은 똥물을 흘러 넣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치자를 밀가루에 개서 장독이 난 허벅지에 바르고 손발을 주물렀다.

도인들은 목숨을 부지 하기 어려우니 어서 피하라.”

김양문의 아버지는 꿈 속에서도 어서 도망을 가라고 외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자지러지곤 했다. 마을 사람은 담 밖으로 전해오는 소식을 들으며 이를 갈았다. 누구도 관졸들의 눈에 낫다가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소사는 수졸들을 때려 엎었으니 우환을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이소사를 찾지 못한 수졸들이 차례로 도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거의 날마다 회령진성에서 나오는 수졸들이 두어 명씩 덕도에 들렸다. 그리고 도인이라고 의심되는 집에 들려서 온갖 까탈을 부리며 쓸만한 것을 거두어 갔다.

저 악독한 수졸들을 혼을 내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인들끼리 모여서 덕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서 바다에다 처박아 버려야 겠어요.”

윤범식은 포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궁리에 젖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수졸 두어 명을 수장을 시켜 버릴 계획이었다. 그러면 제 목숨이 아까워서도 덕도에 들어오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낌새를 알아챘는지 윤범식도 수군만호로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덕도에서 도인들을 모아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잔당들을 조직하고 있다는 죄목이었다.

윤범식은 소리 없이 동백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동백숲은 밖에서 보아서는 사람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린 아들 성도를 재빨리 큰 집으로 보내고 숲에 숨어서 망을 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인한을 찾아가서 이 사태를 의논하고 싶었지만 그는 말을 타지 못했다. 걸어서 연지리까지 가려면 꼬박 이틀이 걸리는 먼 거리였고 그 사이에 포졸들의 눈에 뜨여서 잡혀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수졸들은 거의 날마다 덕도에 들이닥치며 윤범식을 찾아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덕도 접주 윤범식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도인들을 모두 색출해 내겠노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윤범식이 이소사처럼 어디론가 배를 타고 떠났다고 전했다. 바다는 숨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줄줄이 늘어선 섬들 어디에 사람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인한이 덕도에 들어왔다. 그날 밤은 덕도의 도인들이 모두 윤범식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 2월의 초생달이 희미하게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이인한이 도인들에게 위엄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회령진성에는 수군들이 구비해 놓은 무기들이 아주 많이 쌓여 있소. 화승총과 화약이 무기고에 가득 들어 있을 것이오. 다행히 수군들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그들을 바다로 유인한 후에 무기들을 빼앗아 오기로 합시다.”

이인한은 확신에 차서 무리를 향해 외쳤다. 도인들의 마음은 단박에 희망에 차 올랐다.

그들은 화승총을 들고 있고 저희들이야 고작 죽창 몇 개뿐인데 이길 수 있을까요?”

윤범식은 김양문의 아버지가 초주검이 되어서 돌아온 이야기를 전했다.

그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들어온 것이오. 염려는 마시오. 우리에게도 미리 준비한 화승총이 수십 그루 있습니다. 내 그것을 나눠 드릴터이니 오늘 밤에는 동백숲으로 들어가서 훈련을 하도록 합시다.”

스무 명이 넘는 도인들이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동백숲으로 들어갔다. 이인한은 이미 동백숲에 숨겨 놓은 화승총을 풀어서 총을 쏘는 연습을 시켰다.

내일 회진으로 가서 수군만호을 덮칠 것이오. 함께 갈 사람들은 나룻배를 건너서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그러면 두어 필의 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이인한은 좌중을 둘러 보며 위엄있게 말을 건넸다. 몇 사람이 따라가겠노라고 손을 들었다. 이인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였다. 안개가 칠흑처럼 찾아들어서 오후부터 눈 앞에 떠 있는 섬조차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이인한은 윤범식에게 배를 타고 회령진성 앞에 가서 포를 쏘라고 했다. 윤범식은 덕도의 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안개 속으로 익숙하게 배를 몰았다. 수십 년동안 배를 몰고 고기를 잡고 살아온 그에게 회령진 앞바다는 자기 손바닥처럼 훤히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수군만호 앞에서 정면으로 포를 쏘아 올렸다. 만호의 처마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놀란 수군들이 토끼몰이를 당하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이 관사로 옮겨 붙자 안개 속으로 바다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관선에 올라서 바다로 배를 몰아갔다. 배는 안개 속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어디로 나아갈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수군만호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인한은 장정 다섯 명을 데리고 익숙하게 무기고를 털었다. 이미 준비해 간 화약으로 자물쇠를 터뜨리고 창고에 그득히 들어 있는 화약을 꺼내 말에 실었다. 그리고 단단히 묶어둔 화승총 자루를 풀어서 장정들에게 나눠 들게 하였다. 미리 준비해 놓은 여남은 필의 말이 휘이잉 울음 소리를 냈다.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에서 이뤄졌다. 보이지 않는 속에서 장정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낌으로 알아차리며 신속하게 무기들을 말에 옮겼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기 전에 무기를 숨기기 위해서 죽는 힘을 다해서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못 나온다는 수군 만호가 이렇게 쉽게 뚫릴 줄은 몰랐습니다.”

윤범식이 수군들의 배를 따돌리고 무기를 받으려고 산굽이를 돌아 외딴 포구에 다다라 있었다. 축축한 안개 속에서 횃불을 들고 달려온 도인들이 윤범식의 배에다 무기를 옮겨 실었다.

덕도는 위험하니 정남진으로 갑시다. 정남진에 무기를 내려 주면 육로를 통해 천관산 동굴에 보관하도록 하겠소. 거사를 위해서는 중간 지역이 무기를 숨기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오.”

그들은 밤새 작업을 계속 했다. 윤범식이 익숙한 솜씨로 방향을 잡고 정남진을 향해 노를 저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게 칙칙한 안개가 바다를 덮고 있었지만 윤범식은 육감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날이 새면 수군 만호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오. 무기를 잃어버렸으니 만호장은 이제 목이 건질 수가 없을 걸.”

윤범식이 어둠 속에서 껄껄 웃어제꼈다. 수졸들은 자신을 잡아 갔더라면 지금쯤 고기밥이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동백숲에 숨어들어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 때를 만난 것이었다.

천관산 기슭에 무기들을 숨기고 나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인한은 연지리를 내려다 보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덕도의 도인들에게 천관산의 맑은 물을 떠서 건넸다.

이제 시작이오. 싸움이란 작전이 중요하오. 수군들에게 당하지 말고 수군들을 몰아낼 궁리를 해야한단 말이오. 언제까지 당하고 있어야 겠소?”

윤범식은 밤새 노질을 해서 뀅한 두 눈으로 이인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접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어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치면 관졸들을 몰아낼 일은 식은 죽 먹기군요.”

이인한은 말이 없었다. 똑 닫힌 두 입술, 날카로운 눈매에는 숱한 생각이 담겨 있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윤범식을 건너다 볼 뿐이었다.

이게 사실이라고 믿어집니까?”

덕도의 도인들도 윤범식을 바라보며 무기를 쌓아둔 바윗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는 강한 결기가 흘러 내렸다. 이인한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거사를 치르기 위한 계획들이 세세하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윤범식은 더 이상 덕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인한을 바라보았다.

 

 

2015/06/15 - [소설/명금혜정] -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7회) - 동백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