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도 앞 바다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달이 천천히 떠오르자 수면 위로 은빛 물결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이인한은 윤접주의 마당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포구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인한은 골목을 살폈다. 이제 곧 앞 섬에서 입도식을 치르러 도인들이 올 터였다. 그런데 윤범식이 아들 성도와 마루에서 뛰어 나와서 포구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짚이는 게 있는데 내려가 보십시다.”
윤범식이 먼저 골목길을 내다르며 이인한에게 길을 터주었다. 성도가 이인한과 윤범식의 사이로 파고 들며 속삭였다. 밤바람이 돌담사이로 스치며 성도의 말을 가르고 있었다.
“오늘 밤에 나타난 수졸들은 메두기타작을 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었어요.”
윤범식은 뒤로 쳐지며 성도의 뒤통수에 대고 재빨리 대꾸 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수군들의 귀에 그 소리가 들어가면 너부터 곤장밥이 될 터이니 말조심을 하거라. 도인이 되려면 우선 입조심부터 해야하는 것이야. 하늘의 뜻은 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니 함부로 입밖으로 내서는 안된다.”
성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묵묵히 이인한의 뒤를 따랐다. 이인한은 풍물소리가 들리는 포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꽹과리 소리가 간간히 들리긴 했지만 풍물가락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담판이라도 짓고 있는 양,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닷물이 넘실대는 포구에 내려서니 여남은 척의 배가 정박 중이었고,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그 중에서 가장 큰 배에 모여 있었다. 관군의 깃발을 단 배가 한 척 떠 있는 것이 수군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이인한도 윤범식과 더불어 그들 사이로 끼어 들어갔다. 두 명의 수군이 동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군 포졸이 허리에 칼을 차고 몽둥이를 들고 사람들을 노려 보고 위협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들은 수군을 괴롭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을 터! 빨리 길목을 터라. 그리고 풍어제를 지낸 후 제수는 여기 이 자루에 담아라. 수군대장의 명령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당장 관으로 불러 곤장을 내리치리라!”
그런데 수군을 둘러싸고 있는 장정들은 누구 하나 기가 죽지 않고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배 주인인 듯한 늙수그레한 사내가 깃발을 매어 단 장대를 하나 뽑아 들고 수군들을 당장이라도 때리겠다는 시늉을 했다. 두 명의 수군들은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을 쳤다.
“흑, 오늘 이 자리에서 제삿밥이 한번 되어 볼테냐! 오늘을 우리가 벼르고 있었다. 너희 수군대장에게 가서 일러라. 이 덕도에서 더 이상 생선을 빼앗아 가지 말라고, 이제 우리들이 똘똘 뭉쳤으니 너희들에게 애써 잡은 갯것들을 빼앗기기 않을 것이다.”
노인은 일부러 배가 휘청거릴 정도로 장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장대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휘익휘익 나며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자 키가 작은 수졸이 허리에 찬 칼을 꺼내서 휘두루기 시작했다.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칼소리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피하며 뱃전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퍼런 칼날이 달빛에 은빛으로 부서졌다. 날이 어찌나 새던지 누구 하나 맞으면 금방 팔다리가 잘릴 것만 같았다. 다른 수졸도 기가 살아서 허리 춤에서 칼을 뺐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감히 수졸들을 괴롭혀서 너희들이 얻을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빨리 풍어제를 마치고 제수를 여기에 넣어라. 특별히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니 오곡밥과 부럼으로 쓸 과일들도 여기에다 쏟아 넣으란 말이다. 나라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병졸들을 위로해야 하지 않겠나?”
두 명의 수졸들이 칼춤을 추자 기가 죽은 동네 사람들이 이러저리 뱃전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인한은 두 주먹을 꼭 쥐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장대를 뽑아들고 두 놈의 수졸들의 어깨를 내리칠 심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리며 수졸들이 뱃전에 나동글아지고 말았다.
“아얏! 이 파렴치한 관졸들 같으니라고. 내 너희들은 벼르고 있었느니라.!”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이인한은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새 뱃전으로 달려와서 장대로 수졸들을 내리치고 칼을 빼앗아 바다로 던져 버리고 있는 여인. 이인한은 흐음! 절로 미소를 지었다.
“이소사다!”
성도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이소사는 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여전히 장대로 수군들을 후려 치고 있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도 달려 들어서 수군들을 발로 차고 욕을 해댔다. 두 명의 수졸들이 납작하게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손을 싹싹 빌었다.
“천하에 못된 놈들, 섬사람들이 애써 잡은 갯것들을 보기만 하면 빼앗아 가더니 이제 제수까지 빼앗으러 왔단 말이냐. 오늘 너희들을 아예 고깃밥이 되거라.”
수군들은 아무리 빌어도 매질이 멈추지 않자 고개를 들고 독이 오른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빨리 매질을 멈추어라. 관졸을 혼내고도 목숨을 건질 것 같으냐! 너희들은 당장 내일 모두 관아로 잡혀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회령진 수군만호에서 싹쓸이를 해 가서 송장이 될 터인즉 빨리 이 일을 멈추란 말이다.”
그러자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 치마를 끈으로 동여맨 이소사가 당찬 발걸음으로 수군들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덕도에 나타나서 노략질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살려보내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보복을 하면 덕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수군만호에 불을 질러 버릴 것이다. 목숨은 살려줄테니 가서 대장에게 말하거라. 덕도를 쳐 들어오면 모두 불쏘시개가 될 거라고.”
이소사가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수군들을 둘러싸고 발길질을 해대고 있던 마을 장정들이 물러섰다. 수졸들은 엉금엉금 기어서 관선으로 올라갔다. 장정들이 관선을 밀어냈다.
관선의 돛이 팽팽하게 열리며 서서히 덕도를 빠져 나가자 이소사의 남편인 김양문이 마을 사람들에게 조용히 외쳤다.
“다시 풍어제를 지내도록 합시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잡은 것을 빼앗기지 말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쇠잡이가 꽹! 하며 신호를 보내자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덕도의 앞바다에 달빛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인한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 이소사 곁으로 다가갔다.
“몸을 피하시오. 내일이라도 수군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이 근동의 섬으로 피해야 하오. 아니,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단 말이오. 아녀자의 몸으로 잡혀가면 살아나오기 힘드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오.”
이인한의 목소리를 풍물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승리감에 취해서 풍어를 기리는 제를 다시 올리고 바다를 향해 힘껏 풍악을 울려댔다. 윤범식이 김양문을 찾았다.
“내 이런 일이 오고야 말 거라고 생각했소. 안 사람이 패기가 넘치니 물불 안 가리고 수졸들을 혼을 냈으니 뒷감당을 해야하기 않겠소. 빨리 부인을 데리고 피하시오. 배는 내가 내어 주리라.”
그러자 뒷전에서 묵묵히 구경을 하고 있던 성도가 아버지를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아버님, 이 분들을 제가 솔섬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바위 틈에 오두막도 있고 샘물도 있으니 당분간은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찾지 않는 한 밖에서는 오두막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성도는 이미 인근의 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노를 젓는 법을 익히자마자 섬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이 오늘 밤에서는 수졸들을 혼구멍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소사가 그 일을 대신해 주니 속이 후련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장 내일부터 아마 보복이 시작될 터인즉 빨리 손을 쓰도록 합시다. 내가 장정들을 모아서 회령진성을 쳐들어가서 화승총과 화약을 빼앗아 오겠소. 거사를 치르기 전에 무기부터 갖추려고 했소이다.”
이인한은 이소사를 바라보며 김양문에게 빨리 떠날 준비를 차리라고 했다. 저벅저벅 골목길이 부산해지며 김양문과 이소사가 사라졌다. 성도도 재빨리 집으로 달려가서 솜두루마기를 입고 내려왔다.
달빛은 여전히 바다 위로 쏟아지고 저 멀리에는 수군들의 배가 떠 있었다. 성도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라도 몇 장 떠 있어야 솔섬으로 가는 길을 가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밤하늘엔 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대낮같은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서둘러라. 수군들이 출발을 했으니 소식을 전해 들으면 오늘 밤에라도 쳐들어올 게야. 저기 떠 있는 배들이 모두 관선이지 않더냐?”
윤범식은 뱃전으로 올라가서 노를 꺼냈다. 성도가 노를 잡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뱃전에 앉아서 노를 잡았다.
“다행히 바람이 세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밀려가진 않겠구나.”
보따리를 든 이소사와 김양문이 후다닥 윤범식의 배로 뛰어 올라갔다. 마을 사람들은 풍물에 젖어서 윤범식의 배가 포구를 떠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인한만 팔짱을 끼고 무거운 표정으로 밤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소사의 단정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말수가 적은 김양문의 뒷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잔바람이 출렁이는 바다로 배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점점 높아져 가는 풍물소리에 노 젓는 소리는 묻혀 갔다.
다시 포구로 들어오는 배가 한 척 있었다. 장정들은 모두 긴장하여 새로 들어온 배로 몰려갔다.
“이 밤중에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장정 한 사람이 새로 들어온 배를 향해 외쳤다. 배에는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타고 있었다.
“우린 저 앞 섬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인한은 벌떡 일어나 뱃전으로 달려갔다. 달빛 아래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맞으며 이인한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솟아 올랐다.
2015/06/01 - [소설/명금혜정] -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5회) - 동백 숲에 흐르는 도인의 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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