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아버지, 차라리 우리도 정주성에 들어갑시다. 봉기군은 관군처럼 사람을 마구 죽이지는 않는다고 합디다. 여기서 이러다가 우리 운보에게 험한 꼴 보이겠소.”
한참을 울며 통곡을 하던 운보 어머니는 망설이는 남편에게 매달렸다. 하나 남은 자식 운보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 싶었다.“성안에 쫒겨 들어가 어찌 겨울을 보내겠는가, 차라리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게 낫지 않겠어?”
“아이고 운보 아버지, 지금 저게 눈에 보이지 않소? 어째 살아있는 목숨을 통째로 버리려 합니까?”
“차라리 남쪽으로 도망가는 게 그래도 낫지 않겠나?”
내외는 운보를 끌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산으로 도망 온 동네 사람에게 마을이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체념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관군에 쫓겨 도망치다시피 봉기군을 따라 정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홍경래를 비롯한 봉기군 지휘부는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주성에 데리고 들어갔다. 관군의 학살에서 그들을 구해 주고 봉기군 쪽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였다. 정주성의 관속배들은 이미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보낸 순무영 군사가 안주를 거쳐 정주성에 도착하였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안주 관군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정주성을 포위한 관군의 숫자는 모두 팔천여 명에 이르렀다.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관군은 성을 에워싸자마자 한동안 대포를 쏘다가 일시에 성쪽으로 다가들었다.
"관군이 쳐들어 온다!"
성벽에 의지하여 관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봉기군들이 일순 당황하여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서두르지 말고 아직 대응하지 마라. 좀 더 기다리고 잘 살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관군들이 점점 더 성 가까이 다가옵니다.”
관군들은 성벽으로 달여들어 사다리를 놓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공격하라!”
공격이라고 해야 한 무더기씩 쌓아 둔 돌은 던지는 게 주된 무기였지만 죽기 살기로 내던지는 돌멩이에 관군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관군과 맞서 싸우기를 꺼려하던 마을 사람들도 봉기군을 거들고 나섰다. 운보네 가족도 돌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관군을 한번 몰려왔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며 성안의 봉기군을 괴롭히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성벽을 허물 듯이 달려들다가 물러서서 지리하게 대치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관군의 노림수는 딴 데 있었다. 관군은 성 안에 있는 봉기군의 양식이 떨어질 때쯤 다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관군은 약점을 이용하여 더욱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봉기군도 관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밤에는 더 많은 횃불을 밝히고 총소리와 함성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나브로 봉기군의 기운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운보 어머니 가산댁은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식량이 떨어져 가는 봉기군은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을 은밀하게 내보내기 시작하였다. 가산댁은 그믐밤을 타서 아들의 손을 꼬옥 쥐고 뒷산을 이용해 성을 탈출하였다. 곧 따라 갈 터이니 먼저 나가 있으라던 아버지의 얼굴을 그 뒤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봉기군의 상황을 간파한 관군은 성 밖의 언덕배기에 토성을 쌓아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을 하였고, 북장대 쪽으로는 땅 밑으로 파고 들어와 성벽을 폭파할 준비를 하였다. 굴 파는 작업을 끝내고 나서 관군은 인근 광산의 화약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화약을 장전하였다.
사월 중순 새벽, 화약에 불을 댕기자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성벽 한쪽이 무너졌다. 그것으로 싸움은 그만이었다. 일거에 밀려드는 관군 정예부대를 오합지졸인 봉기군이 맞서 싸우기란 애초부터 역부족이었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전사하고, 살아남은 주모자들은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봉기군과 한께 한 천 구백여 명의 사람들도 모두 참수를 당했다. 4개월간의 봉기는 높은 창공에 불씨를 흩날리며 스러져갔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오래도록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느니 섬에 살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보다 그 소문은 몇 배나 부풀려지면서 농민들의 가슴에 전설로 자리잡아 갔다. 홍경래의 불사설을 믿은 농민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난을 일으켰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운보는 잠이 깨었다. 산속에서 열매 몇 알을 따 먹다가 나무 둥치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 잠깐 잠이 들었다. 같이 산을 뒤지며 열매를 찾아 먹던 아이들 소리가 저만치 들렸다. 비는 안개가 되어 온통 산을 뿌옇게 만들었다.
“야, 여기에 산뽕나무 열매가 많아.”
“어디, 어디?”
“야아, 거 좀 밀지 마라.”
아이들이 왁자하게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리에 쫓겨 온 사람들이 산골짜기 어디에나 진을 치고 있었다. 저마다 집을 빼앗기고, 한두 명씩의 가족을 저승에 보내고, 죽음보다 더 못한 생이별을 겪었다. 관군들은 지치지도 않고 추격해 왔고 쫓기기를 거듭하며 숨어든 곳은 숲이 무성하여 낮에도 밤처럼 컴컴한 깊고 깊은 산 속이었다. 산은 넉넉한 품을 한 자락 내주어 고단한 백성들을 품어 안았다. 칡이며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사람들은 밤이면 상처투성이의 몸을 흙바닥에 누이고 죽거나 헤어진 가족을 생각하며 흐느꼈다.
그나마 울 수 있는 건 양반지옥이었다. 10월에 접어들면 벌써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북국의 날씨는 변변한 입성조차 갖추지 못한 도망꾼들을 여지없이 죽음으로 내몰았다. 관군의 창칼에 도륙된 사람보다 길 위에서 혹은 산골짜기에서 얼어죽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죽어진 시체를 노리고 짐승들이 온 산천을 횡행하여 눈뜨고는 차마 보지 못할 생지옥이 펼쳐졌다.
풋잠을 자다가 부스스 일어난 운보는 산의 낯선 풍경에 잠시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누이들이랑 나물 캐러 다니던 고향의 뒷산이 아니다. 손이 빠른 큰누이가 바구니를 들고 산에 가는 날이면 나물을 수북이 뜯어 와 허기진 가족의 배를 달래 주곤 했다. 이것은 망초대, 이건 가염취, 이건 물잔대……. 친구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 주며 나물을 담던 누이는 집에 갈 때면 운보의 작은 손을 꼬옥 쥐고는 행여 넘어질세라 보살폈다. 나물 캐고 돌아가다가 비라도 내리면 가지고 온 보자기로 운보의 머리를 덮어 여며주고는 했다.
누이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아서 운보는 주먹으로 눈가를 슬쩍 훔쳤다. 할머니와 함께 여섯 식구였는데 이제 운보와 어머니 달랑 두 식구뿐이다. 산에 들어온 지 두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정주성에 있던 아버지는 여태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귀에 쟁쟁했다.
“먼저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에 가 있어라, 그럼 내 곧 따라 가갔어.”
“당신은 언제 오실라고요?”
“곧 따라가지 뭐. 운보는 어머니 잘 모시고 가야 한다.”
“아버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우리 같이 가요 아버지.”
“곧 갈 테니 어서 서둘러 가거라. 아버지가 좀 늦더라도 잘 지내야 한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운보를 오래오래 업어 주었다. 가끔 업어달라고 하면 사내자식이 뭐 그리 업어 달라고 하냐며 호통을 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흙냄새 나는 잔등에서 느껴지던 따스한 체온이 그리워진 운보는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안개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보현사가 있는 산등성이로 내려왔다.
정주성에서 있던 일이 잊히지도 않고 자꾸만 생각났다. 그해 겨울바람은 유난히도 차갑고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마을에서 쫓겨와 봉기군과 지내던 석 달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모여서 돌을 나르며 봉기군을 도왔고 부녀자들은 부녀자들끼리 모여 사람들 먹일 밥을 하였다. 저녁이 되어 모닥불을 피우면 어른들은 집에 두고 온 식구들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관군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얘기를 했을 때는 어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함께 엎어져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다.
이런 날에는 목청 좋은 이는 노랫가락으로 심금을 달래고, 피리를 부는 이는 애끓는 소리로 서글픔을 더했다. 봉기군의 기세를 높여야 한다고 악기 소리로 신명을 돋우는 사람도 있었다. 운보는 북소리나 날아갈 듯이 경쾌한 꽹과리 소리가 좋았다. 북소리가 날 때면 놀다가도 얼른 달려가 그 앞에 앉았고 꽹과리 소리에 신이 나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였다. 타고난 신명이 있는 아이였다. 꽹과리를 치는 칠재아재는 운보가 관심을 보이자 무릎 앞에 앉혀놓고 가르쳤다.
“운보야, 농악놀이는 신명으로 하는 것이다. 꽹과리를 배우려면 숨쉬는 연습부터 해야 되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신명을 끌어내야 해.”
칠재아재는 꽹과리채로 손바닥 치는 연습부터 하게 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자 손에 꽹과리를 걸게 하였고, 소리 만드는 연습을 하게 했다.
“꽹과리 소리는 말하듯이 해야 하는 거다. 채는 가볍게 들고 손목을 사용하지 말고 팔꿈치로 쳐라. 옳지, 잘 한다. 팔꿈치가 네 옆구리를 건드리는 것을 가볍게 느끼면서 쳐야 하는 것이야.”
제법 소리가 익어 운보가 꽹과리를 잘 치게 되자 칠재는 자기의 꽹과리를 아예 운보에게 넘겨주었다.
“앉아서 연습할 때에는 꼬리뼈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머리로 올라가는 가락을 느끼며 내쉬고 들이쉬는 숨에 실어야 한다. 때릴 때는 호흡을 들이 쉬고, 뗄 때 뱉으면서 하나 두울 셋 넷 팔꿈치를 움직여 치면 되는거다. 얼씨구, 우리 운보 잘 한다.”
운보는 밤낮없이 북쪽 봉우리에 있는 북장대 근처에서 꽹과리 연습을 하였다. 찬바람 속에 두들겨 대느라 손이 곱아 터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마냥 신나게 두들겨 댔다. 성안에서 탈출하기 전날에 봉기군 참모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홍경래 장군을 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수염을 기른 갸름하고 하얀 얼굴이었다.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 수많은 횃불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에 운보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그것이 운보가 본 홍경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맞아 죽고, 창칼에 찔려 주고, 얼어 죽고, 굶어 죽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 깊은 산속으로 모여들었다. 산세가 기기묘묘하고 초목의 향이 머문다는 묘향산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많았다. 산나물이 풍부하고 짐승이 무리지어 다니며 기암절벽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산자락마다 불을 질러 논밭을 일구고 나물과 열매를 찾아 허기를 달랬다.
보현사에는 운보 아버지의 일가 친척뻘 되는 도운스님이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몸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는 옷을 걸치고 절에 도착했을 때 삼촌스님은 운보를 씻기고 머리를 밀어주었다. 작은 절 옷을 입히니 그대로 동자승이 되었다. 운보는 스님들의 잔심부름을 눈치껏 잘하여 귀여움을 받았다.
둘만 있을 때에도 정주성이며 아버지 얘기는 일절 묻지 않는 도운스님은 마을 쪽으로 볼 일이 있어 나갈 때마다 어린 운보를 데리고 나갔다. 아침 공양이 끝나고 막 어머니 심부름을 마쳤을 때 도운스님은 운보를 불렀다.
“운보야, 오늘은 스님이랑 같이 마을에 내려가자. 봇짐 하나 싸가지고 나오너라.”
신이 난 운보가 다람쥐처럼 빠르게 채비를 하고 나섰다.
“스님, 오늘은 어디로 갑니까?”
“응, 향산 고을에 볼 일이 있어 간다.”
운보는 오늘도 강 구경을 하게 되어 신이 났다. 집 근처에 흐르던 달천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강이 보일 때면 삼촌스님은 을지문덕 장군 얘기를 해 주곤 했다. 주변나라를 다 점령한 수나라가 고구려에 쳐들어 왔는데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라는 강에서 백만 명이나 되는 수나라 군사를 무찔렀다는 것이다. 근처에 있는 칠불사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수나라 병사가 청천강에 다다랐을 때 물이 깊은지 얕은지 알지 못해 건너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일곱 승려가 나타나 물 위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자 수나라 병사도 그 칠불의 뒤를 따라 건너다가 다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일곱 분의 부처님, 칠불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다.
“스님들은 그렇게 요술을 부릴 줄 아나요?
“그럼, 간절히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
“저도 마음먹으면 요술을 부릴 수 있나요?”
“요술 부릴 줄 알면 그걸로 무얼 하려고?”
“우리 식구가 다 함께 살도록 다시 살려놓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와 누나들이 자꾸만 보고 싶어서…….”
도운은 그만 측은한 생각이 들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꾸하는 대신 어깨를 가만히 감싸 주었다.
'이 어린 것이 세상의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보았구나. 마을과 정주성에서 불 타 죽은 일가붙이들과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은 어찌 그리 험하게 살다가 죽어 갔을꼬? 아아.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짐승과 진배없는 살림이지만, 금수보다 못한 구실아치나 양반들의 황포가 없는 것으로 치면 오히려 나은 것이 산생활인지라, 딱히 돌아갈 집도 없어진 무리들은 그대로 화전민으로 눌러 붙었다. 운보와 운보 어머니는 그나마 보현사에 깃들어 사는 형편이니 그중 나은 편이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키가 훌쩍 큰 청년 운보는 절에서 제법 한몫을 하는 일꾼이 되었다.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고 보채는 동자승이 아니었다. 공양간 보살이 된 어머니를 도와 나물을 캐고 나뭇짐도 졌다. 산에는 냉이며 달래, 참나물, 머루, 도라지가 지천이었다. 밤이면 허리가 아프다고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위해 온갖 약초를 구해다가 달여 먹이기에도 능수능란했다.
스님은 이제 운보를 데리고 산 속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휴정스님과 유정스님이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다는 얘기도 했다. 서산대사 휴정은 제자인 사명당대사 유정과 처영스님을 독려하여 금강산과 지리산에서 승병이 일어나도록 하고 자신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승병 천오백 명을 모아 평양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저 탑 안에 서산대사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절을 올려라.”
근처에 있는 안심사에 가면 스님은 잊지 않고 탑을 가리키며 절을 올렸다. 극락전 뒤 계곡을 따라 향로봉 가는 길에 있는 단군굴이며 그 너머에 있는 만폭동 폭포에도 데리고 갔다. 길도 없이 칡덩굴과 머루덩굴이 발을 잡아끄는 낭떠러지 비탈을 오르면 커다란 석굴이 있었다. 녹색과 백색 무늬 화강암이 둘러있는 석굴의 넓은 안쪽에는 세 개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저것은 무엇인가요?”
“환인님과 환웅님, 그리고 단군님 삼신의 위패다. 이 조선땅에 사는 모든 백성은 본디 단군님의 후손이란다.”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천제 환인의 허락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태백산 정상에 내려왔고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서 신정를 베풀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불렀지. 그리고 신단수는 박달나무를 말한다.”
“그러면 단군님이 우리들 할아버지고, 단군님의 할아버지가 환인 임금이면 우리는 하늘님의 자손인가요?”
“그렇지, 잘 얘기했다. 우리는 모두 하늘님의 자손이다.”
산에는 유난히 박달나무가 많았다. 단군굴을 내려와 낭떠러지를 타고 만폭동계곡으로 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일곱 폭이나 되는 은색의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사방이 물소리로 가득 찼다. 그대로 하늘의 자손이 된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하늘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살면서 하늘 마음도 함께 잃어버렸다. 우리가 하늘의 자손인 것을 알고 느끼게 되면 마음은 저 하늘처럼 높고 푸르고 무한하게 되지.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 해보다 환하게 빛나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 우리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우리의 고유의 믿음이다.”
“스님, 그러면 부처님은요?”
“부처님은 그 세계를 먼저 깨달으신 분이다”
“어떻게 하면 그리 될까요?”
“우리 스스로 눈을 감아서 보이지 않게 된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과 지극한 정성이 있으면 된다.”
가슴의 한 자락을 열면 상처와 슬픔으로 출렁거리는 내면의 강이 있었다. 그 강가에 앉아 세상의 어둠에 서러워하고 아파하면서 깊숙이 빠져드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운보는 더 이상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기로 하였다. 이제 그 강을 벗어나 너른 바다로 나갈 것이다. 하늘빛을 담은 바다로 가서 그대로 하늘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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