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차 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멀리에서도 와 주셨습니다. 이 추운 날,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으니 우리의 마음이 분명 하늘에 전달될 것입니다. 오늘 각수 작업을 앞둬 작은 제를 올리려고 합니다. 여기 오신 도인들은 모두 한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김은경의 말에 도인들은 작은 제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떡과 과일, 막걸리가 단출했다.
해월 스승님은 제수 갖춤에서 허례허식을 경계하라고 했다. 제수용 술과 떡, 국수, 생선과 과일, 포와 튀각, 채소와 함께 향과 초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또 제를 지낼 때 고기를 쓰지 않도록 당부해 제사상이라고 해봐야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노래 한 번 못 부르는 게 아쉽네 그려.”
누군가의 말에 도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들어 동학도에 대한 조정의 감시가 소홀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동학은 좌도난정(左道亂政)의 무리로 나라에서 엄히 금하고 있다는 걸 도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술과 노래가 빠진 잔치가 못내 아쉬웠지만, 이제 곧 동경대전이 나온다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도인들은 차례로 절을 올렸다. 조그만 제사상 주변에는 할머니를 따라 온 아이도 있고,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도 있었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 챙 넓은 갓을 쓴 양반도 있었다. 행색이나 학식, 타고난 신분은 제각각이었지만 동경대전이라는 서책을 만져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하나가 됐다.
제를 마치고 사람들은 따뜻한 두부와 국수로 몸을 녹였다.
“할머니, 그런데 동경대전이 뭐야?”
어린 손녀가 국수를 먹으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동학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서책이지. 거기엔 훌륭하신 말씀이 담겨 있단다. 우리 어여쁜 꽃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들어 있지.”
흰머리의 할머니가 무릎에 앉은 아이에게 흐뭇한 얼굴로 설명했다. 같이 국수를 먹던 사람들도 흐뭇한 표정이긴 마찬가지다.
“으음. 드디어 시작이다. 이제 두 달 뒤면 판각이 끝나고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김은경이 긴 한숨을 내쉬며 국수와 따뜻한 두부, 팥시루떡을 먹는 도인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어 결기에 찬 듯 해 보이기도 하고 깊은 눈매는 눈물이 고여 있는 듯도 보였다.
무관 출신의 김은경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접장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얼마나 있으면 우리 손으로 받을 수 있는 건지요?”
이희인이 어느새 왔는지 김은경 옆에 서 있다.
“접장님은 언제 오셨나요? 방금까지 못 뵈었는데…. 이제야 진짜 시작이지요. 각수 작업이 좌우할 겁니다. 하다 보면, 글자가 잘못돼 고치는 일도 허다하다고 들었는데, 일일이 감수하다 보면 촉박할 듯합니다.”
김은경이 반가운 얼굴로 이희인에게 설명했다.
“이미 절반은 하신 거지요. 접장님의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이 되어갑니다. 이만하면 비밀이 새 나갈 염려도 없을 것이고, 인근 10리 안팎에서 도인들이 저마다 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만에 하나 포착된 기미가 보이면 즉시 연통할 것입니다. 저기 뒷산과 동구가 한눈에 들어와 경전을 편찬하기엔 이만한 장소가 없지요. 각수도 도인이라, 어째 궁합이 잘 맞습니다. 금상첨화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희인도 도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김은경의 집 뒷산은 청주와 이어져 있고, 앞은 마을 어귀가 훤히 보인다. 해월 선생이 이 지역을 잠시 다녀갈 때에도 항상 김은경의 집에서 머문 이유다.
“사실 얼마 전까지 딱 적합한 목판을 구할 수가 없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각수가 우리 도인이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물색할 수 있었지요. 헌데 마땅한 목판이 영 나오질 않는 겁니다. ‘이걸 어쩌나’ 하고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도인들에겐 곧 간행될 것이라고 얘기는 해 두었고, 도인들이 십시일반 정성은 모아졌는데, 정작 목판을 못 구한다고 차마 말은 못하고요. 제 아들놈까지 셋이서 많이 찾아 댕겼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이죠, 그날이 바람이 매섭게 몰아댄 날이었는데, 셋이서 청주의 한 각수를 만나기로 했는데 허탕을 쳐서 주막에서 탁배기를 한 사발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춥던지, 몸을 댑힐 요량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막에 신기하게도 조그만 나무현판이 있었던게지요. 어스름한 시간이라 처음엔 호롱불만 보였는데, 툇마루 위에 현판이 있던 거지요. 큼지막하게 술 주(酒)자가 판각돼 있는 게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우리 각수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고. 주막에 현판이 있는 게 신기한 일이라 주모에게 물었지요. 그런데 동네에 유명한 각수가 있는데, 그리도 외상술을 마셔댄답니다. 외상술 대신 받은 게 나무 현판이었답니다. 우리 각수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모에게 물어 그 각수를 찾아갔더니, 정말 좋은 나무판들을 구할 수 있었지요. 참 인연입니다. 우리가 탁배기를 마시러 간 것도 드문 일이었고, 가더라도 더 늦은 시간에 그 주막을 찾았더라면 현판이 보이지 않았을 터이니, 아직도 나무를 못 구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은경이 주변에 모인 접장들에게 지난날 일들을 소상히 설명했다. 입이 무거워 말을 잘 하지 않고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는 김은경이었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그동안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못한 터였다. 이희인이 때맞춰 방문해 주어서 김은경은 속사정을 시원하게 풀어놓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늘이 도운 게지요. 다른 일도 아니고 경전을 간행하겠다고 하니 하늘이 도운 게지요. 그 각수가 외상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경전 간행이 한참은 미뤄졌겠습니다. 허허.”
이희인의 농에 김은경도 껄껄껄 웃어댔다.
“도인 여러분, 판각실로 따라 오십시오. 제가 오늘 시작하는 나무판을 보여드리지요.”
각수의 말에 도인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하지만 판각실은 그리 넓지 않아 열 명 남짓만 안에 들고 대부분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러자 각수는 나무판을 들고 판각실 밖으로 나왔다.
“제가 여기 글자를 새길 나무판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후박나무입니다. 여기 가운데를 판심이라고 하고 양쪽 가에 있는 두툼한 막대기를 마구리라고 합니다. 판심과 마구리 사이에 글자를 새기게 됩니다. 한 판에 두면을 새길 것입니다.”
각수는 판각 과정을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도인들은 마치 스승님의 말씀이라도 듣는 듯 각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으로 각수는 조각도를 일일이 들어 보이며 각각의 용도를 한참 설명해 나갔다.
“판각은 어려운 작업입니다. 목판에 쓰이는 나무는 습도와 온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쉽게 갈라지고 뒤틀리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목판을 할 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쓰게 됩니다. 그래야 판이 어그러지면 쉽게 다른 판을 쓸 수 있지요. 대추나무, 배나무, 가래나무,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무, 단풍나무 같은 것들이 주로 쓰입니다. 목판은 단단하기와 탄력이 필요해 나무 고르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각수의 설명에 도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합한 나무를 고르려면 늦가을이나 겨울에 나무를 잘라야 합니다. 여름에 나무를 자르면 수분이 많아 무겁고 쉽게 뒤틀리고 갈라져 좀이 일기 때문입니다.”
김은경, 이희인과 도인들은 각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 이 나무판을 찬찬히 보십시오. 적당한 수분과 단단한 정도를 살펴야 판각이 쉽습니다. 이 판은 바닷물과 웅덩이에 담궜다가 밀폐된 곳에 넣어서 찌고 진을 빼고 살충해서 볕에 말린 겁니다. 그래야 뒤틀리거나 빠개짐이 없게 됩니다.”
각수는 이어 빙긋이 웃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 일을 위해 김은경 접장님과 나무를 구하려고 지난 가을부터 인근을 돌아다녔는데 통 적합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만났습니다. 청주에서요. 적당한 것을 찾아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각수도 그 일이 떠오르는 지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까지 판각 작업을 하기 전에 이렇게 소상히 알려드린 바가 없었습니다. 각수들 사이엔 그런 걸 다 발설하면 글자를 잘못 새겨 일이 틀어진다는 얘기가 있습지요. 허나 이번 일은 다릅니다. 우리 하늘님들의 마음이 잘 이끌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도인여러분들이 힘을 모았는데, 저라고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저도 소상히 도인들에게 경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설명을 해드려야지요.”
각수의 말에 도인들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이날 도인들의 잔치는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잔치는 조용했다. 근래들어 감시가 소홀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동학은 좌도난정(左道亂政)의 무리로 조정에서 엄히 금하고 있다.
“오라버니!”
윤지가 허연 입김을 내며 칠성이를 불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윤지의 오똑한 콧등이 빨개져 있었다.
“오래 기다렸구나, 윤지야.”
칠성이가 급히 왔는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취암산 아래 빈 초가다. 얼마나 오래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천정에선 쪽빛 하늘이 듬성듬성 보일 정도다.
날이 차지만, 하늘은 맑았다. 김은경 접장네 집에서 잔치가 열리는 걸 핑계로 목천에 갔다가 둘은 서둘러 돌아왔다.
“저런, 콧등이…. 잠깐만 기다려 봐라.”
칠성이는 목에 둘러쳤던 목도리를 얼른 풀어 윤지 목에 감싸주었다.
“손도 많이 차네! 이리 줘 봐라.”
이번엔 윤지의 손을 자신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쑥 집어넣었다. 윤지도 싫지 않은지, 빙그레 웃으며 칠성이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과년한 나이가 된 윤지와 칠성이다.
<다음회에 계속>
2015/06/09 - [소설/변김경혜] - 꿈이 있더냐(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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