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순직의 집에서 동학 입도식을 치른 이창구는 바로 포덕에 나섰다. 그는 가장 먼저 순섬이를 입도시킨 후 정원갑과 함께 장터 포덕에 나섰다. 정원갑은 덕산 장터를, 본인은 면천 틀못 장터를 거점 삼아 포덕을 해 나갔다. 이창구가 입도한 지 거의 육 개월이 지난 1892년 정월이었다.
면천 군수로 심경택이 갈려 가고 홍종윤이 새로 부임을 해 왔다. 조용하던 틀못 장터가 떠들썩했다. 보부상 대표가 신관 수령 홍종윤의 부임을 축하해야 한다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강압적으로 돈을 갹출했다.
“이 기회에 관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보부상들과 한판 붙어봅시다.”
동학 도인들은 축의금 거부에 나서자고 했다. 보부상들은 면천 수령이 부임할 때마다 돈을 걷어 수령에게 상납했다. 일 년에 한 번 꼴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시로 수령이 바뀌는 바람에 장터 사람들에게 축의금 상납은 큰 부담이었다. 정월인데도 올 들어 벌써 두 번째요 곧 다른 수령으로 갈릴 거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더군다나 물러나는 구관 수령 심경택에게도 돈을 주어야 한다며 전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요구했다. 동학 도인들은 이번 기회에 보부상에게 잡혀 살던 신세를 털어 버리고 싶었다. 그동안 보부상들은 동학 도인들에게 동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눈을 부라렸다. 심지어는 일부러 어깨를 툭 툭 치며 시비를 걸고 지나가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동학 도인들은 꼼짝 없이 당해야 했다.
“우리도 이제 세력이 커졌으니 고것들에게 태도를 분명히 합시다.”
정원갑은 재차 이창구에게 보부상들과 결전을 벌이자고 했다.
“보부상은 관의 하수인일 뿐, 문제는 관이고 조정이야.”
이창구는 틀못 장터를 드나드는 이삼 백 명이나 되는 보부상들과 섣부르게 대치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들 역시 먹고 살기 위해서 관과 붙어 살 수밖에 없는 가련한 민초였다. 조정에서 동학을 공인하기만 하면 그들도 도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창구는 인사 차 면천 군수를 방문해서 동학에 대한 경계를 풀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했다. 수령 말이라면 보부상들은 허리를 백팔십도 굽혔다.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흐렸다. 눈이 내릴 기세였다. 날씨 탓인지 틀못 장터는 한산했다. 이창구는 면천 수령을 방문하기 위해 포목점을 나왔다. 면천 관아 아전이 며칠째 창구네 집을 들락거렸다. 아전은 시답잖은 말만 내놓으며 희희덕거리다가 돌아갈 뿐이었으나 수령이 부임해 왔으니 방문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이창구의 손에는 비단 한 필이 들려 있었다. 그는 신임 군수가 올 때마다 인사 예물로 비단을 올렸다. 면천읍성이 보였다. 북쪽 가야산에서 뻗어 오던 줄기가 면천 땅을 앞두고 솟아 오른 종산인 아미산과 주산인 몽산을 두고, 서쪽에서 흘러들어 동쪽으로 빠져 나가는 밋내가 있는 곳에 위치한 면천읍성을 풍수가들은 길지 중에 상길지라고 했다. 읍성에 들어서자 아전이 나와서 수령에게 안내를 했다.
“틀못 장터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이창구입니다.”
이창구는 면천 군수 홍종윤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람 속을 모를 때에는 웃는 것이 상책이었다.
“얘기 많이 들었소.”
홍종윤 역시 이창구의 웃음에 흔쾌하게 화답했다.
“변변치 않습니다. 장터에 오실 때마다 제 가게에 들려주십시오.”
말은 군수에게 하며 이창구는 비단을 옆에 선 아전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홍종윤을 보고 다시 한 번 웃었다. 홍종윤은 선물 보따리에 일순간 눈길을 빼앗기는 듯하더니 물끄러미 이창구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어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한마디만 해 주겠소. 충청감사가 동학 금령을 내렸소.”
홍종윤은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창구에게 동학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첫 대면에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전임 수령이 가면서 이창구는 활용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니 부딪치지 말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이창구는 다른 동비들과는 다르게 세상 물정을 꿰뚫는 자라고 말했다. 홍종윤은 이창구가 다른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좋은 낯으로 대하며 화수분처럼 이용하자고 마음먹었다. 수령이란 직책은 하루아침에라도 날라 갈 수 있는 것이어서, 자리에 있을 때 최대한 금전을 모아야 했다. 돈을 우려내기엔 그만인 자였다.
“동학 금령이라고요? 장터에서 보부상들이 동학 도인들을 후리는 모양입니다. 수령께서는 보부상들에게 상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창구는 상생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홍종윤이 막무가내 형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일부 수령들은 대놓고 돈을 요구했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내 놓겠다? 동학 금령 정보를 미리 흘리다니! 이창구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으나 속마음은 타들어 갔다. 조정에서 금령을 내리면 보부상들은 더 설칠 테고 관아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학 도인들이 지금보다도 더 수탈을 당할 것은 뻔했다.
“그러지요. 나으리도 상생하는 법을 동학 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시구려.”
홍종윤은 마땅치 않다는 듯 말꼬리를 올렸다. 이창구가 너무 대차게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인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보부상들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돈도 있겠다 성격마저 곧아서 할 말을 하는 자이군! 너무 강하면 부러질 터인데!
“사또님 말씀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이창구는 자신의 말이 수령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는 것을 알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장날이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읍성을 빠져 나왔다. 막막했다. 충청 감사 조병식이가 공개적으로 동학 금령을 재차 선포했으니 동학도에게 탄압이 가중될 것은 뻔했다.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다. 내일 오리정에서 정기 수련회가 있는 날이니 무슨 수를 내야 할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내포 도인들의 정기 수련회 날이다. 이창구는 정원갑과 함께 오리정으로 향했다. 오전에 싸락눈이 내리더니 오후 들어 함박눈으로 변했다. 사위가 눈 천지였다. 오리정 초가지붕 위에 놓여 있던 용수도 눈에 파묻혀 자취를 감추었다. 이창구가 오리정 사립문을 밀치자 쌓여 있던 눈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이창구와 정원갑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월화가 오리정 문설주에 달려 있던 등불을 껐다. 그들은 가슴을 웅크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수심에 가득 차 있다.
“오늘 장터가 시끄러웠어유. 각지에서 온 수십 명의 보부상들이 떼 지어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동학 금령을 발표한 것은 잘한 일이라며 당장 동비들을 때려잡아서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더라구유. 가재는 게 편인지라 보부상들이 나서서 조정을 대변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네유.”
정원갑은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지 손을 엉덩이 밑으로 넣었다.
“지 밥그릇 내놓지 않으려고 동학을 사도로 모는 양반들과 그 앞잡이 조병식, 조병갑, 조병호 같은 놈들이 있는 한 개벽은 어렵습니다. 좌우지간 수운 큰 선생이 죄가 없음을 밝혀야 이 보석 같은 동학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창구는 주자학이 아니면 모두가 사도라던 한 유생의 말이 생각나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조병식을 포함해서 각처 수령들이 도인들을 못살게 굴 텐데 큰일이구먼.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도인들의 돈을 뜯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테고. 도인이라는 낌새만 나면 꼬투리잡고 돈 내놓으라고 할 테니 뭔가 수를 써야지. 이미 조병식이가 태안 수령하고 한패가 되어 도인들을 등쳐먹고 있다는구만. 여하튼 이 금령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의견을 모아야 하네. 해월 선생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
박덕칠은 태안과 서산을 오가며 포덕을 하고 있었다. 태안 도인들이 수령 등살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수운 큰 선생을 신원해서 동학이 위법이 아님을 공표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서학도 공인을 받은 후에는 내놓고 포교를 하지 않습니까.”
젊은 김복기가 패기 있게 말했다. 그는 서산 용현리 강당골 사람으로, 내포 내 젊은 선비들과의 여흥 시회에서 글재주를 겨룰 때 한 번도 벌칙을 받지 않을 만큼 문장력이 탁월했다. 그러나 과거시험에서는 번번이 낙방했다. 임금을 비롯한 권문세도가들의 매관매직은 실력은 있으나 돈 없는 이들의 벼슬길을 막았다. 김복기가 그 확실한 증좌였다. 그가 절망을 넘어 조선의 개벽을 갈구하고 있을 때 그는 우연히 개심사 심검당에서 동학 포덕에 나선 이창구를 만났다. 둘은 초면이었으나 세상사에 대해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이창구는 바로 그를 해월 선생에게 데려갔다. 그때 김복기는 하늘이 두 쪽 나는 경험을 했다. 해월 선생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벌레 한 마리, 철따라 부는 바람, 밤낮으로 뜨고 지는 해와 달, 별 모두 하늘님 아님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벼슬 자리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일 뿐 삶의 본질은 아니며, 이 세상 모든 존재가 하늘임을 깨닫고 정성 되이 모시면 풀뿌리를 캐먹더라도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김복기는 벼슬자리 얻는 것을 포기하고 동학을 택했다. 그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당골을 비롯한 인근 젊은이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김복기는 바로 접주가 되었다. 그의 접은 다른 접과는 달리 젊은이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창구는 그런 김복기를 미래의 내포 동학을 이끌어 가게 될 주역이라며 각별히 대했다.
“빠른 시일 내에 해월 선생과 상의를 해봅시다.”
박인호는 내포 동학이 회오리가 몰아치는 언덕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눈빛들에서도 맑게 빛나는 겨울 새벽 별빛이 있었다.
5
1892년, 팔월이 되었다.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이 노골화되었다. 면천 군수 홍종윤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갈려 가고 다시 조관재가 부임해 왔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군수가 교체되자 면천 사람들은 나라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되었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창구는 새로 부임해 온 조관재 군수를 만날 생각을 하니 심기가 불편했다. 군수가 자주 바뀌다 보니 관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돈으로써 면천 군수와 아전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동학을 세력화해서 공인 받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는 도인들을 모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마침 해월 선생이 상주 왕실촌으로 전국 각 접주들을 소집했다. 내포 동학 도인들은 가능하면 교대로 해월 선생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이창구와 박인호가 상주 길에 나섰다. 이창구는 상주에 다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포목점을 아들에게 맡기고 다시 짬을 냈다. 해월 선생을 찾아뵙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쉬운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생계 때문에 해월 선생을 찾아가 뵙지 못했으니 이창구는 여유로운 자신의 처지가 감사할 뿐이었다. 해월 선생을 비롯해 동학 지도자들의 영적 역량은 사뭇 지대해서 해월 선생 댁을 다녀오면 가슴 전체가 보석 같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창구는 그 힘을 가지고 도인들을 모았다. 해월 선생도 놀랄 만큼 이창구는 접의 규모를 키웠다.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때라 상주 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창구가 박인호와 함께 해월 선생을 뵈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박인호가 하루 백리를 걷는다는 소문이 나 있는 터라 혹시나 따라 붙지 못할까 이창구는 내심 우려했으나 막상 걸어보니 우려는 기우였다. 박인호는 장사치로 단련해 온 자신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인호 도인이 말처럼 내달린다는 소문에 내 속이 뜨끔 했수. 소문이란 때론 부풀려져 있는 것 같수다. 하하 하.”
이창구는 피식 웃으며 박인호에게 농을 걸었다.
“우리 둘만 아는 일로 해 주슈. 하하 하.”
박인호는 눈을 찔끔했다. 둘은 중도에 도인들 집에서 신세를 지며 해월 선생 댁에 도착했다. 각지의 접주들이 와 있었다.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수운 큰 선생의 신원 문제 때문이오. 많은 말들이 오가는 모양인데 각 접별로 도인들의 입장을 들어봅시다.”
해월 선생은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도인들에 대한 관의 탄압을 없애기 위해서는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돌아가신 수운 큰 선생의 죄목을 풀어야 합니다. 감영에 소를 제출하여 대선생을 신원할 것과 탄압을 금단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서인주가 말을 하자 서병학이 암만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서인주 접주님, 무엇 때문에 내포 도인들이 그대들의 의견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이창구는 서인주 등이 해월 선생을 다그치는 것이 과하다는 뜻을 실어 퉁명스럽게 물었다. 서인주와 서병학은 선생 댁 문을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신원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 알지요. 저 신미년 영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지요. 허나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서병학은 입도한 지 얼마 안 되는 이창구가 신원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도인의 숫자가 훨씬 많아졌지요. 그것은 일이 잘못되면 그 피해도 그만큼 커진다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관의 탄압과 토색에 집을 떠나는 도인들이 늘어나고. 목숨을 잃는 이도 적지 않고요. 도인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다른 대책이 있습니까? 가만히 앉아있으라 이 말이오? 충청도야말로 금령이 발표되었으니 어느 지역보다 고통이 자심하지 않습니까?”
서병학의 말마디는 온건하였으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바람에 모두 좌불안석이 되어 갔다.
“누가 그걸 모르겠슈. 전라도가 어려우면 충청도도 어렵고 조선 팔도 다 어려운 법이유. 하지만 지금 관에서 눈에 불을 켜고 동학 도인 색출에 나서는 판국인데 도인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모처럼 불어온 동학 바람이 한꺼번에 꺼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유. 새 세상에서 잘 살자고 도에 든 도인들을 상하게 하거나 죽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슈?”
박인호는 거사를 서두르는 도인들에게 생명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생명을 보듬는 것만큼 고귀한 것은 없었다.
“도인들을 더 이상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일을 벌이자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우리의 세력을 단단히 보어주어야만 동학이 한때 지나가는 풍설이 아님을 조정에서도 알게 될 것이고, 그러자면 수운 선생이 신원되어야만 도인들이 마음 놓고 모여들 수 있을 것 아니오?”
서인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잠시….”
그때, 해월이 입을 열었다. 도인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내포 도인들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방안이 있습니까?”
이창구 접주가 좌중을 한 번 돌아보며 목례를 하고 해월 선생에게 대답하였다.
“내포의 상황도 이곳과 비슷합니다. 일부 도인들은 감사 조병식이 지방관일 뿐이니 천주학처럼 조정으로부터 직접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정에 상소를 올리자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 동학도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은 관의 지목만 용이하게 할 뿐이니 당장은 안으로 도인들의 신심을 다지고, 밖으로 포덕을 더욱 힘써서 세력을 키우는 것에만 전념하자고 합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극심합니다. 태안만 하더라도 충청감사 조병식이가 태안 수령과 작당하여 도인들 재산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 아래 관속들 또한 말할 것도 없지요.”
이창구는 지난 정월 오리정에서 있었던 회합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해월은 고통스러웠다.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필제와 함께한 영해 거사가 실패로 끝나면서 동학 조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이를 복구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 이번에도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그때와는 비견할 수 없는 참극이 전국을 휩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렇다고 대선생의 신원을 요구하자는 도인들의 의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도인들의 소식은 여러 경로로 날마다 해월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해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서려는 도인들을 눌러 앉히고 밖으로 나갔다.
서인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지역마다 도인들이 처한 입장이나 관의 침학 정도가 다 다를 겁니다. 충청도만 해도 동서가 다르고 남북이 다르니, 전라도 경상도도 모두 처처부동일 겁니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가는 도인들이 다 죽게 생겼다는 점만은 누구에게 물어 봐도 한결같을 거라 확신합니다.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당장에 무력을 동원하자는 것도 아니고, 우선은 각 도 감영에 우리의 요구 사항을 담은 의송을 넣자는 것이니, 그 정도 일로 지금까지의 침학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동학의 세력을 과시하자는 것입니다.”
서인주가 일행들을 설득시키려고 눈을 마주치려 했으나 다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해월 선생이 안 계신 자리에서 이야기를 더 진전시킨다는 것이 꺼림칙해서도 대꾸를 삼가기도 하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밥상이 먼저 들어왔다. 해월이 밥상을 뒤따라 들어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세상 만물이 나타나는 때가 있고 쓰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가 어려우니 시월에 다시 만나 상의를 하되 여하튼 서로 합심해 봅시다. 손천민 접장은 충주 신사과에게 서신을 보내서 망석지사 사십 명의 명단과 주소를 구월 초까지 보내라고 하세요. 그리고 호남좌우도편의장 남계천 대접주에게도 백 명을 선발해서 명단을 보내라고 할 참이오. 시월에 다시 한 번 만나서 얘기 해 봅시다. 피곤들 할 터이니 어서 밥을 드세요.”
해월은 일행들을 둘러보며 숟가락 들기를 청했다.
2015/06/02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5회) - 박이용운
'소설 > 박이용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에 부는 바람(8회) - 첫 접촉 (0) | 2015.06.23 |
---|---|
내포에 부는 바람(7회) - 공주취회 (0) | 2015.06.17 |
내포에 부는 바람(5회) - 박이용운 (1) | 2015.06.02 |
내포에 부는 바람(4회) - 박이용운 (3) | 2015.05.26 |
내포에 부는 바람(2회) - 곰방대를 적시는 여름날의 소나기 (3) | 2015.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