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곰방대를 적시는 여름날의 소나기
1.
이창구는 순섬이와의 혼사가 깨진 후 바로 연산에 사는 도씨 규수와 혼인을 했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결혼 이듬해에 낳은 아들 찬고가 커서 그의 일을 도왔다. 그동안 그는 포목점과 대부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늘리는 능력만큼은 타고났다고 했다. 그의 포목점이 사람들로 들끓게 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그는 무명 열 필을 사면 한 필을 덤으로 주었다. 당장의 이문을 적게 보는 대신 많이 팔게 되니 결국은 나날이 장사 규모가 커지고 버는 돈이 많아졌다. 대부업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채의 이자는 5할 장리로, 춘궁기에 쌀 한 말을 꾸어 가서 가을에 돌려줄 때는 한 말 반을 갚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2할 단리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나락이 필요한 사람들은 창구네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창구는 장이 파한 후 술 한 잔 하자는 편중삼의 말에 하루 종일 심난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으나 비가 오니 술 생각이 나서 그럴 뿐이라고 했다. 편중삼은 성격이 소심해서 평소 먼저 술을 청하지 않는 자라 이창구는 의구심이 들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장터는 일찍 손님이 끊겼다. 그는 도씨 부인을 집으로 보내고 포목점을 닫았다.
“어서 옵슈.”
“아니, 이놈이 쳐다보지도 않고 어따 대고 어서 옵슈야.”
이창구는 웃으면서 정원갑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혼자 오셨수? 형수님은?”
“집에 들어갔지. 막걸리나 한 잔 하러 가자 금풍쉥이야. 편중삼이가 술 한 잔 하자고 하던데?”
“중삼이가 술을? 어쩐 일이래유? 술도 하자고 하구? 근디 금풍쉥이가 뭐여유, 처자식이 번듯이 있는디.”
정원갑은 이창구를 쳐다보며 눈을 살짝 찌푸리는 척 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여보, 창구 형님하고 술 한 잔 하고 올게. 비가 와서 더 이상 손님은 없을 것 같으니 당신도 일찍 들어가구려.”
정원갑은 한쪽 구석에서 황석어에 굵은 소금을 훌훌 뿌리고 있는 광천댁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창구에게 소금 묻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광천장 터줏대감 정원갑. 그는 본래 광천장 장사꾼이었으나, 덕산과 면천장을 보기 위해 광천장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본인은 덕산 읍내 이일장과 면천 틀못 일삼일장에서 어물전을 운영했다. 이창구보다 두 살 아래로 의로운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창구와는 형제처럼 서로 의지했다.
창구와 원갑이가 주막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편중삼이 자리를 옮겨와 앉았다. 주모가 막걸리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한 모를 내 왔다.
“금풍쉥이란 물고기 말야, 얼마나 맛있으면 본서방에게는 안 주고 새서방에게만 준다냐? 내 입맛엔 별로구만.”
창구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에 막걸리를 따르면서 정원갑을 슬며시 쳐다보았다.
“형님,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슈. 금풍쉥이가 맛이 있슈 없슈? 한 입에 두 말하지 마시우.”
정원갑은 눈꼬리를 살짝 올려 화난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입가에는 이미 미소를 배어 물고 있었다. 금풍쉥이는 뼈가 원체 단단하고 살점이 거의 없는 물고기인데, 원갑이 속이 워낙 깊고 단단하다며 이창구가 붙여준 별명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당하겄냐. 그래 맛있다 이놈아. 그건 그렇다 치고, 나 아무래도 동학을 해야겠다.”
창구의 눈빛이 순하게 반짝였다.
“형님이 동학을? 노망 들리셨수? 나라가 금하는 것을 했다가는 형님 재산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날리는 수가 있슈. 덕산 수령에게 제 몸을 먹잇감으로 갖다 바치시는구먼.”
편중삼은 손사래를 치며 가래침을 탁탁 뱉었다.
“중삼이 얘기가 맞어유. 저희 아버님도 천주학을 하시지만은 천주학쟁이도 피로써 강산을 물들인 후에야 공인을 받았는데 모르긴 해도 앞으로 동학도 마찬가지일 거유.”
정원갑은 잔을 쭉 들이키더니 고추장에 박은 무장아찌 몇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다가 말부터 입에 담았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돈 많은 형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데에 발을 들여 놔유? 몰락한 양반도 아니고 평등시상을 꿈꾸는 돈 없는 떠돌이도 아니잖우? 아 천하에 족보 찬 도둑인 관아치들이 이놈 저놈이 뜯어간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이문 더 남겨서 장사하면 되는 일이고, 될성부른 동학쟁이가 될 생각은 당최 하덜 마슈.”
중삼이 입가에 끈적한 마른 거품이 죽덩어리마냥 생겨났다.
“10년 넘게 생각해 온 거다. 니들도 알다시피 노비 아들이라는 딱지가 나를 얼마나 괴롭혔냐. 헌데 오늘 아들 찬고가 나처럼 똑같이 당하고 왔어. 양반집 자재들이 노비 자식이라고 놀린 모양이야. 하루 종일 울적해 있기에 위로는 해 주었다만서도 그게 내 평생에 한이 된 일인데, 이제 자식도 그런 꼴을 당할 걸 생각하니 이건 아니다 싶다. 내 자식들에게 그런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내가 이리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역시 동학이 하는 말이 맞아.”
이창구는 각오를 다지듯 눈에 힘을 주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내놓는 말이기는 했으나 창구는 아까부터 계속 편중삼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근데 형님.”
그런 이창구의 눈치를 알면서도 모르는 체, 드디어 중삼이 말을 냈다.
“제가 오늘 뵙자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처음 말을 내던 기세를 한풀 죽이며 편중삼은 말을 끊었다. “다름 아니라 뭐?”
이창구가 편중삼을 다그치듯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마음 두지는 마시구유…. 형님 첫 정혼녀 순섬이란 규수 말여유….”
“순섬이…?”
“…그 오라버니란 사람이 곧 형님 가게 뒤편에 있는 우시장에서 일한다나 봐유. 노름에 빠져 가진 재산 다 날리는 바람에 거지가 됐대유. 순섬이란 처자 역시 여태 혼인도 않고 징그럽게 고생하고 있다더만….”
편중삼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
창구는 갑자기 가슴이 쿵하는 것을 느꼈다. 눈 내린 겨울 아침, 먼 산이 선뜻 가까이 와 있듯 순섬이가 어느 새 옆에 와 있는 듯했다. 혼롓날 보았던 그녀는 달빛에 비친 수국 같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어디라도 도망가서 살고 싶었다. 14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가슴 미어지는 느낌은 생생하기만 했다. 여전히 그녀가 가슴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연인 척하고 그녀를 마주치고 싶어 수소문해서 찾아가고도 싶었으나 도씨 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꾹꾹 눌러 참아왔다.
“14년 전 일이여유. 맘 쓰지 마셔유. 호박꽃만도 못하더구만.”
정원갑은 순섬이를 향한 이창구의 그리움을 순간 읽었다. 정원갑은 편중삼이 야속했다. 그도 역시 순섬이의 근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창구가 마음아파 할까봐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정원갑 역시 창구 혼롓날 요객으로 따라 나섰다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너무 놀랐었다. 하얀 얼굴에 가녀린 눈빛을 한 그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무리 고생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아름다움의 바탕은 남아 있을 터였다.
“니 눈이 삔 거냐, 내 눈이 삔 거냐? 아니다. 니가 나 생각해서 호박꽃이라고 말하는 거 다 안다. 그건 그쯤 해 두자.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야.”
정원갑이 무슨 말을 더 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런데 원갑아, 동학을 하려면 누구를 만나면 될까?”
“형님!”
“다른 말 하지 마라. 한두 해 고민한 거 아니다. 내가 물은 것에만 답해 다오.”
“참, 형님도…. 내 알려는 드리겠으나 섣불리 입도는 하지 마셔유. 놀라시겠지만 오리정 주막집 부부유. 안사람이 먼저 동학에 입도했다고 하던데유.”
“주막집? 김월화?”
“예.”
이창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월화라. 하필이면 그녀일까 싶었다. 그녀를 떠올리자 과거의 상처가 다시 떠올랐다.
“그 사람 말고는?”
“그녀 남편이 접주래유. 접주 정도 되면 상당한 위치라고 하던데유.”
“고맙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얘기구나. 이왕지사 동학하려면 만나야 할 사람이니 만나 봐야지. 그만 일어나자. 주모, 얼마요?”
“형님, 절대 저한테 동학하자고 하지 마슈. 목숨 내걸고 싶지 않으니께.”
편중삼은 이창구를 보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두부가 일전 팔푼이고 막걸리하고…. 합쳐서 석전만 내셔유.”
“두부 값이 며칠 사이 그렇게 올랐어유?”
원갑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아해했다.
“같은 장사꾼끼리 왜 이런대유. 한 닢 가지고 백 닢 쓰겠다고 당백전 만들어 냈으나, 백 닢 갖고 열 닢 밖에 쓸 수 없으니 헛지랄 한 거지유. 콩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알어유? 말도 마유. 돈 벌어 먹기가 죽기보다 어려워유.”
주모는 돈을 받으면서 주막집 입구에 걸려 있는 등잔불 심지를 눌러 껐다.
<다음 호에 계속>
이전 글
2015/05/07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2)-박이용운
'소설 > 박이용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에 부는 바람(5회) - 박이용운 (1) | 2015.06.02 |
---|---|
내포에 부는 바람(4회) - 박이용운 (3) | 2015.05.26 |
내포에 부는 바람(1회) - 슬픈 혼인 날 (4) | 2015.05.07 |
내포에 부는 바람 - 연재를 시작하며 (0) | 2015.05.06 |
나오세요,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0) | 2015.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