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슬픈 혼인 날
가야산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이름 하여 내포사람이라 하고 가야산 언저리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당파싸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야산 북쪽에 위치한 태안 서산 면천 사람들은 나는 북인이유, 동쪽의 홍주 덕산 예산 사람들은 동인이유, 서쪽의 해미 사람들은 서인이유 하였다. 주위의 산들이라고 해봐야 거개가 비산비야로, 구릉진 언덕들이 조망조망 서로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할 뿐이다.
내포. 그곳의 육지는 한없이 깊숙하게 파고드는 바다에 선뜻 제 몸을 내어 준다. 육지와 바다가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포구들을 만들어냈다. 바닷길이 육로보다 더 발달한 시기, 한양이 지척이요 바다가 지천이요 땅 역시 풍성하였다. 한양의 세도가들은 앞 다투어 이 내포 땅에 농토와 집을 마련했다. 수십 척의 배들이 새우나 서대, 장대, 박대, 조기, 새조개, 피조개, 꽃게 등 진기한 해산물을 포구로 바삐 실어 나르고, 황소 수레가 산처럼 쌓은 해산물과 곡식을 싣고 할 일 없이 따라 나선 개들과 호형호제하면서 황토 먼지를 흩날리는 곳이었다.
아미산 쇠학골 둥구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다. 맞은편 몽산도 울긋불긋하다. 조무래기 여자아이 대여섯 명이 땅바닥에 앉아 둥구나무에 기댄 채 얻어온 팥고물 떡과 전을 치맛자락에 펼쳐 놓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엉겨 붙은 떡과 전을 떼어 허겁지겁 먹었다. 발 빠른 조무래기 남자 아이들은 둥구나무를 타고 올라가 실한 나뭇가지 하나씩 차고 앉아 넓적한 빈대떡과 배추잎 전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내어 정신없이 쭉쭉 찢어먹었다. 전 부스러기가 노란 잎을 스치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닭들이 종종걸음을 쳤다. 제일 꼭대기에 앉아 있던 남자 아이가 전 조각을 조금 떼어 내더니 한 여자 아이 앞으로 던졌다. 여자아이가 흘끔 위를 쳐다보았다.
“순섬 아씨 시집간다네.”
일순간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남자 아이들이 먹던 것을 멈추고 여자아이들을 향해 크게 소리를 높였다.
“순섬 아씨 시집간다네. 시집간다네.”
“저것들이….”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을 향해 눈망울을 치켜뜨고 눈꼬리를 세차게 치어 올렸다. 이내 ‘흥’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훈장네 잔칫집을 향해 치마를 펄럭거리며 뛰어갔다.
샘물에 둥구나무가 덩그러니 걸려 있다. 샘물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둥구나무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들의 얼굴도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여자아이들이 사라지자 할 일 없이 나뭇가지들을 오르내리던 남자아이들도 결국은 잔칫집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이놈들아 그만 좀 가져다 먹어.”
뒤꼍에서 과방을 보던 언년이는 아이들을 혼내는 척 하면서 그들 주머니에 조청 입힌 바삭한 약과를 한 움큼씩 재빨리 넣어주었다.
“우리 애기들도 이제 그만 먹고 순섬 아씨 혼례 올리는 거나 보러 가자.”
“그려, 우리도 과방일랑 그만 보구 신랑신부 얼굴이나 한 번 보자구.”
주머니가 불룩해진 아이들은 제각각 엄마 옷자락을 붙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신랑 도착한 지가 언제인데 여태 식을 안 올리고 있는감?”
언년이는 조금 전에 뒷간을 갔다 오면서 신랑이 말을 타고 고샅으로 들어오는 걸 얼핏 봤었다.
“글씨 말여, 맞절 할 때가 되었다 싶어 나와 봤더니 벌써 끝난 겨?”
순돌이 엄마가 아쉬워하며 과방으로 다시 발을 옮기려 하였다.
“쉿, 조용히 혀, 일 났어.”
“일 났다니? 뭔 얘기여?”
“여기서 말할 게 아녀.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구. 신랑이 노비 자식이랴.”
“아니, 그게 무슨 말여?”
순돌이 엄마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위를 살폈다. 마당 한쪽에 마련된 신랑 일행 잔칫상이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면서 아이들을 챙겨 하나 둘씩 사립문을 빠져나갔다.
“여보, 이게 어찌된 일이여유?”
홍주댁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 좀 있어봐.”
순섬이 아버지는 마당에 놓인 잔칫상을 보며 곰방대에 불을 지폈다. 퇴색한 담배 연기가 마루 위에 차려진 잔칫상 위를 서성거리다가 자취를 감췄다.
“신랑 이창구라는 작자가 노비 아들이랴. 나 원 참”
“뭐라구유? 자세히 좀 얘기해 봐유.”
“순섬이는 어떡하고 있어? 좀 진정됐으면 데리고 와봐.”
홍주댁이 대들보를 잡고 일어섰다. 홍주댁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섬아.”
홍주댁은 순섬이 방 앞에서 겨울날의 손잔등 같은 갈라 터진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
“아버지가 건너오라는디…. 동리사람들은 죄다 갔어.”
“…….”
홍주댁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자 순섬이는 벽을 쳐다보고 앉아 있다.
“어린 것이 무슨 죄여. 조상 제사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친척이나 이웃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구만. 번듯한 살림살이 하나 없어도 인의예지신을 행하며 살아 왔는디. 하이고, 불쌍한 우리 순섬아…. 순섬아, 아버지가 부르시니 나가자.”
홍주댁은 순섬의 손을 잡아끌었다. 순섬은 마지못해 하면서 방을 나왔다.
“순섬아, 이 애비도 무슨 청천벽력인가 싶다. 신랑과 함께 온 요객 말로는 그 신랑이 노비 아들이라는디…, 그 어미가 도망 나온 노비라는 거여.”
“당신은 왜 여태 그걸 몰랐어유? 중신애비는 알았을건디, 그 사람이 우리를 속인 거유?”
“중신애비도 노비 아들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겨.”
“바깥사돈은 뭐라고 하던가유?”
“폐 끼쳐서 송구스럽긴 하지만 이 혼사 성사시키자고 그러지. 창구 어미의 신분이 노비라는 증거도 없고, 본인은 공명첩이긴 하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창구 역시 학문도 할 만큼 했다는 거여. 상황 보아 가며 거금을 들여서라도 아들 창구를 위해 좋은 관직자리 하나 마련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유?”
“뭐라고 말하긴! 김씨 가문이 공명첩으로 양반이 된 가문과 혼인을 맺는 것만도 구설수에 오르는 판인데, 하물며 어미가 노비인 집안과 혼인을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말했지. 내 딸에게 평생 동안 그 멍에를 지울 수는 없다고 했지.”
“돈 있는 집안이니 우리 순섬이 생각해서 그냥 허락하시지 그랬어유.”
홍주댁은 다소 원망 섞인 시선으로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뭐여? 그렇게는 못하지. 몰랐으면 몰라도 안 이상은 안 되지.”
순섬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일어난 일이 행여 꿈인가 싶었다. 맞절조차 못하고 혼사가 깨졌다. 족두리를 벗어서 의걸이장 위에 놓고 원삼과 붉은색 댕기는 장롱 안에 넣었다. 족두리의 장식품들이 반짝거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의 삶이 저렇게 빛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신세는 이제 봄날 우박 맞은 매화꽃이네….’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의 일이건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한스럽고 한심했다. 신랑이 될 수도 있었을 이창구란 남자를 떠올렸다. 혼인을 파할 만큼 신분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아버지께 정중히 따져 묻던 그의 음성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그의 선명한 눈매 또한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2
“달아실 도령님!”
이창구가 혼례 일행과 달아실 마을로 들어서자 동네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달아실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알뜰히 살피는 이창구네를 달아실의 자랑이라 칭송하며 이창구를 달아실 도령님이라고 불렀다. 아침에 집을 나선 이창구 혼례 일행이 점심 지나 바로 돌아왔으니 그도 그럴 만했다.
이창구는 아무런 표정도 대꾸도 없이 동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정남향 기와집을 향해 또각또각 말을 몰았다. 집으로 들어서자 처마 밑에 있던 제비 한 쌍이 마당을 낮게 두서너 번 돌더니 하늘 높이 날아갔다. 제비가 돌아간다는 중양절이 지난 지가 한참 됐다. 진작 떠났어야 할 제비였다. 이창구는 제비가 날아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순섬이 아버지의 처사가 야속했다. 딸의 혼사를 내동댕이칠 만큼 내 처지가 그리 초라한가? 물론 본인 역시 반상제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외면할 수만 있다면 외면하고 싶었고, 버릴 수만 있다면 버리고 싶었던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이었다.
창구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평민이었다. 노총각으로 살던 어느 날 저녁 늦게 밭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울타리 밑에 한 처자가 고양이마냥 몸을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었다. 어느 동리 사람이냐, 무슨 일이냐, 혹시 도망 나온 노비 아니냐 해도 도통 말이 없더니 저녁밥을 먹겠느냐는 말에 ‘예’ 하고 대답을 하였다.
저녁밥을 물리고 나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하룻밤 묵고 갈 거냐고 물어 보니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또 ‘예’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면서 연이어 하는 말이 이웃동네에서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저 고샅으로 가면 이러저러한 집이 있을 터이니 그곳에 의지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는 스님도 없는데다가 식구 하나 더 들일 양식도 없어 머뭇거리는데 ‘예’ 하고 좋아라 하는 기색을 보니 너무 안돼서 기왕지사 날도 어두웠으니 묵고 가라고 허락하였다.
다음날 날이 환하게 새었는데도 그 처자는 떠나려 하질 않고 집안 곳곳을 묵묵히 쓸고 닦을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니 정이 들어 시나브로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되었는데, 결국 노총각은 마땅한 혼처 자리도 없고 해서 그녀와 혼인을 했다. 바로 아기가 태어나 이름을 창구라 지었다. 그녀는 노비 얘기만 나오면 바로 자리를 피했으며, 그런 그녀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노비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이 감응을 하였는지 그 후로 이씨의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어느 날 한양 사는 양반이 인근에 땅을 사러 왔다며 창구 아버지를 찾아왔다. 본래 입이 무겁고 건실하여 동리 사람들조차 일감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맡기곤 했는데 이 한양 나리도 창구 아버지를 잘 보아서인지 선뜻 자신의 농토를 맡으라 했다. 창구 아버지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하고 농토를 잘 가꾸어 흉년에도 남보다 소출을 두 배나 내었다. 그 후 한양 나리는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는 창구 아버지의 됨됨이를 알고 지인들의 농토도 적극적으로 주선해 주었다. 당시 한양의 세도가들은 앞 다투어 내포지방의 농토를 사들이고, 농토를 경작할 사람들을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포와 한양 간에는 물길을 이용하면 지척인 데다가, 추수가 끝나면 그 물길을 따라 나라 세미들이 오고가서 그때를 이용하면 도둑들로부터 곡식을 빼앗길 염려가 적었다. 창구 아버지는 세도가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바람에 연년이 재산을 불리게 되었다. 재산이 커지면서 그의 인심도 나날이 두둑해져 흉년이 드는 해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오십 냥을 선뜻 내놓았고 마을 대소사에 앞장서서 비용을 댔다. 그 후로 동리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시기나 질투를 거두었다.
하루는 면천 수령이 공예리를 통해 창구 아버지를 만나자고 기별이 왔다.
“창구 아범, 지금 자네한테 좋은 기회가 있네. 조정에서 궁궐을 고쳐 짓느라 재정이 말이 아니네. 더군다나 흉년이 들면서 세금이 걷히질 않고 있다네. 그래서 말인데 조정에서 각 부목군현에 공명첩을 배당했다네. 그걸 사는 것이 어떤가? 공명첩을 사면 양반이 될 수 있다네. 돈만 있으면 뭘 하나. 양반이어야 사람 행세를 하지.”
수령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창구 아버지의 등을 툭 쳤다. 창구 아버지도 공명첩 이야기는 익히 듣고 있었다. 땅 주인인 한양 양반네의 말에 의하면 평민이 양반이 되고, 양반 사대부도 평민으로 몰락하는 시대가 왔다면서 돈을 벌면 공명첩을 사라고 권했었다. 세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식만이라도 도포자락을 입고 책을 읽게 하고 싶었다.
“좋은 자리 줄 터이니 기대해 봐. 자질구레한 세금도 면제 해 주겠네.”
“얼마지유?”
“천이백 냥이면 되네.”
“그려유? 사또만 믿고 바로 돈을 준비할 테니 잘 좀 부탁드려유.”
창구 아버지는 자식이 양반만 될 수 있다면 이천 냥이고 삼천 냥이고 아깝지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라는 자리를 얻었다. 교지를 들여다보니 벼슬 이름과 연도만 있을 뿐 자기 이름도 날짜도 없었다. 수령이나 담당 색리가 공모해서 공명첩을 위조한 후 그 이익금을 나누어 먹는다는 항간의 말이 있었지만 이런 종이 한 장에 천이백 냥이라니…. 창구 아버지는 중추부사가 되었지만 그 교지를 농속 깊이 넣어두고 마음에는 두지 않았다. 그 후로 유생들 향교 보수 비용도 선뜻 백 냥을 내놓았는데, 그것에 대한 답례로 유생들은 그를 유생 명단에 올려주고 유학생(儒學生)이라 칭하였으며, 이제 진짜 양반 축에 끼었다며 추켜 주었다. 천우신조라더니 두 해 전에 또 행운이 찾아왔다. 한양의 양반 나리가 장터에 포목점을 열자고 제안을 했다. 돈은 댈 터이니 운영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아이구, 지는 농사만 지어 봤지 당최 장사는 해보질 않아서유. 셈도 빠르지를 않구….”
“그런 건 염려하지 말구 그냥 해 보세. 다른 사람한테는 자네가 주인이라고 하고. 청 상인들이 한양에서 움직이는 걸 보니 앞으로 이쪽 지역도 많이 달라질 거야.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 말로는 앞으로는 장사가 최고라는 거야. 양반이고 뭐고 소용없고 앞으로는 돈이 최고이며, 돈을 모으는 덴 장사가 제일이라는군. 그러니 한번 해 보세. 사람들 이목도 있고 하니 나는 뒤에서 애쓰고 자네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네.”
마침내 창구 아버지는 집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틀못 장터에 다른 포목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포목점을 내었다. 한양 양반 말마따나 시시각각으로 장터가 커지고 물화가 많이 거래되면서 창구네, 아니 양반네 포목점은 많은 이익을 냈고 덕분에 창구 아버지도 엄청난 더욱 큰 재산을 모으게 된 것이다.
혼사도 못 치르고 돌아온 이창구는 죄인마냥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저 순박한 분들 가슴 한가운데에 돌을 던졌는가? 뿌리 깊은 신분 질서에 대한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분노가 커질수록 반상의 법도라는 올가미는 더욱더 뚜렷한 실체로 자신을 향해 목을 죄어오는 듯 했다. 참담했다.
“창구야, 이리 와서 앉거라.”
창구 아버지는 낙심한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창구는 분을 삭이며 마루로 올라갔다.
“일이 예까지 이른 것은 다 이 애비 탓이다.”
“그게 어째서 아버지 탓입니까? 지지리도 모자란 나라 탓이고, 알량한 양반 뼈다귀 탓이지요. 걱정 마시고 다른 혼처나 바로 알아봐주세요.”
이창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 천하에 몹쓸 반상제도를 갈아엎지 않는 한 저는 물론이고, 제 아들 손자까지도 같은 고통에 시달릴 겁니다.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이창구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그가 일어서자 창구 어머니 당산댁은 퍼뜩 일어나 댓돌에 놓인 짚신을 꾸역꾸역 신고 먼저 마당으로 나섰다. 이창구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녀의 웅크린 가냘픈 몸매가 창구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녀는 대문을 나서자마자 담장에 기대어 꺼억꺼억 울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보란 듯이 잘 살아 낼 테니 걱정 마세요.”
당산댁은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 겨우 소리를 내놓았다.
“…이 어미가 원망스럽지?”
“어머니…!”
이창구는 눈물이 솟구쳐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산댁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송악산으로 향했다. 아산만을 바라보면 답답한 가슴이 트이려나 싶었다. 송악산은 북동쪽으로 아산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산으로, 이창구가 사는 달아실 마을 뒷산이기도 했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하리만큼 나지막하지만 해안에 인접해 있다 보니 아산만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어렸을 때 양반집 아이들이 노비 아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면 달려와서 숨죽이고 울었던 산이다.
이창구가 열다섯 살 먹었던 어느 가을이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나무가 꺾이고 이엉 올린 지붕이 날아갔다. 그날도 이창구는 양반집 아이들로부터 노비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자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송악산에 올랐다. 저 멀리 수평선이 있었다. 폭풍이 몰려 오며 바다를 뒤집고 집채 만 한 파도가 솟구치는데도 수평선은 의연히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창구는 수평선이 되고 싶었다.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 후로 비록 노비의 아들이라는 멍에는 쉽게 가시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본인의 신분을 두고 수근 거려도 개의치 않을 만큼은 되었다.
잊었던 그 멍에가 스무 살 된 오늘 혼인날 또렷이 되살아났다. 이창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아산만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던 지난날의 맹세가 떠올라 부끄러웠다.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 온 어머니의 고통에 비하면 본인의 오늘 고통은 별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기 일로 인해 하늘같은 어머니를 더 이상 가슴 아프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자 만선기를 단 어선들이 줄지어 한진 나루터를 향해 들어왔다. 아산만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창구의 축 처진 어깨에 머물렀다.
이전 글
2015/05/06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1)-연재를 시작하며-박이용운
'소설 > 박이용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에 부는 바람(5회) - 박이용운 (1) | 2015.06.02 |
---|---|
내포에 부는 바람(4회) - 박이용운 (3) | 2015.05.26 |
내포에 부는 바람(2회) - 곰방대를 적시는 여름날의 소나기 (3) | 2015.05.14 |
내포에 부는 바람 - 연재를 시작하며 (0) | 2015.05.06 |
나오세요,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0) | 2015.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