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해월 최시형 선생과 동학교도 등 수백 명이 거사를 위해 모였던 영해부 서면 우정동 (현재의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형제봉 아래) 병풍바위. ◾대동여지도 상의 영해부 지도-영해동학군의 진입과 퇴각로. 붉게 둥근 표시된 곳이 형제봉이다.
2. 벼랑 끝에서
영해 교조신원운동이 끝나고 (1871~)
해월 최시형, 강수, 이필제, 김낙균 등 영해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킨 주모자들은 살아남은 도인들과 함께 영해부에서 용화동 일월산 아래 윗대치를 거쳐 봉화군 춘양면 각화산으로 숨어들었다. 해월 일행은 숲 속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나무가 울창하여 어둡고 음침했다. 여염 사람이 쉽게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 말이 없었다. 신발도 꿰신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피해온 길이다.
수운 최제우 동학 교조가 처형되자, 지배층에서 동학도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영해지역에서도 문중과 관아의 탄압으로 수운이 직접 임명한 영해 초대 접주인 박하선이 죽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죽거나 잡혔다. 그러자 이필제는 영해 관아를 점거하여 스승 최제우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동학도인에 대한 탄압을 못하게 하자고 박하선의 아들 박사헌을 앞세워 영해 동학교도들을 설득했다. 해월에게도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해월은 이필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필제는 영해 지역이 동학 탄압은 물론, 백성에 대한 탄압과 수탈이 가장 심한 지역이니 이곳을 점령하여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또, 한양과 멀리 떨어져 있어 관군이 쉽게 올 수 없고, 동쪽에 위치하여 동학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수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동에서 나서 동학이라 하셨으니, 영해 지역이 우리나라 동쪽인즉, 동쪽에서 난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영해부를 점령하면 조정을 위협하여 수운 선생의 원한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치는 고을의 폐습을 고칠 수 있다고 강변했다.⁷⁾
많은 도인이 이필제를 신인(神人)이라고 여겼다. 관의 부정 ‧ 부패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려 온 백성들은 그가 <정감록>의 진인이기를 바랐다. 이필제는 호랑이처럼 거대한 몸집, 이글이글한 눈빛, 뛰어난 언변 등을 갖고 있어 누가 봐도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등에 일곱 개의 점, 손바닥에 왕(王)자 표시가 있었다. 강수를 비롯한 도인들은 일제히 이필제의 뜻에 동조하여 해월을 설득했다.
결국 해월이 동의하자, 해월의 이름으로 경상 북부는 물론 남부 지역에까지 통문이 보내졌다. 거사는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 관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500여 명의 도인들이 박사헌의 집이 있는 형제봉 중턱 병풍바위에 모여들었다. 검은 관에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서 형제봉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황혼 무렵 횃불과 죽창을 들고 영해 관아로 내달렸다. 영해읍에 집결해 있던 도인 100여 명이 합류하여 영해 관아를 에워쌌다. 관문을 지키던 관군이 대포를 쏘아 3, 4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성 밖으로 피하려고 우왕좌왕했다. 지휘를 하던 이필제가 소리쳤다.
“이미 시작된 일이다. 겁먹지 말라.”
다시 도인들은 횃불을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관문을 지키던 관졸은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영해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마당에 무릎을 꿇게 했다. 이정이 순순히 항서를 쓰지 않고 욕을 하며 대들었다. 그러자 이필제의 심복 한 명이 단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것에 대해 반발하는 도인들이 많았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지도부는 일차 목적을 이루었으니 각기 해산하자고 결정했다.
다음 날 대부분 도인들이 흩어지고, 100여 명의 지도부는 고을의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나누어 준 다음 각자 흩어졌다. 그중 30여 명의 핵심 지도부는 영양 일월산으로 향했다.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박제관을 토벌대장로 임명하고 동학군 추포에 나섰다. 출동한 관군은 이필제의 발자취를 뒤쫓아 영양 윗대치까지 포위하고 공격했다. 많은 도인이 쫓기는 도중에 죽거나 붙잡혀 물고를 당했다. 끝내는 참형을 당하거나 수십 명이 원지 유배를 가야 했다.
몸을 피한 해월은 산속을 헤매며 통곡했다. 아까운 도인들이 생목숨을 잃고 말았다. 수운 선생이 참형된 후 거의 씨를 말려 사라지려던 동학이 이제 겨우 일어서려는데, 또다시 피바람이 닥친 것이다. 아니, 무지한 자신이 자초한 것이다.
겨우 관군의 추적을 피한 해월과 이필제, 강수는 단양의 정기현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일행은 각기 집을 정하여 흩어졌다. 해월은 정기현의 아우 정석현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관의 지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해월은 본디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주문을 외는 것으로 밀려오는 자책감을 씻으려 애썼다. 무념무상으로 땅을 갈며 생각은 오직 사방의 산과 그 위로 펼쳐진 하늘 사이를 오가고, 혹은 산에서 나무를 하고 혹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이필제의 강권을 끝내 이겨 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5월에 강수가 해월을 찾아왔다. 해월과 강수는 다시 힘을 내서 장래 도를 회복하기 위해 영월 직동 정진일의 집으로 갔다. 정석현과 한집안인 정진일은 해월과 강수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며 머물게 하였다. 영월 직동리는 주산인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두메산골이다. ‘직동리’, 피처럼 붉은 단풍이 계곡 전체를 물들인다고 이곳 사람들은 핏골이라 불렀다. 죽은 사람의 핏물이 골짜기 물을 붉게 물들여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했다.
해월은 얼마 후 부인 손 씨가 포졸들에게 끌려가 밀양옥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자 최준이와 매부 임익서도 죽고 말았다. 해월은 자신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쳤다. 넷이나 되는 딸들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부인과 딸들을 구하러 가고 싶으나, 막막할 따름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거사에 참여했던 600여 명 동학도인 중 100여 명이 죽고 300여 명이 유배를 갔다. 해월은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목숨들이 꺾였구나. 한 번의 무지한 선택이 이렇게 큰 고통과 회한을 남길 줄은 몰랐다.
해월은 정진일 집에 머물며, 주인집과 이웃집의 막일을 거들며 살았다. 마당도 쓸고, 돼지 먹이도 주며, 퇴비도 날랐다. 그리고 틈만 나면 새끼를 꼬았다. 강수는 근처에 살면서 핏골 일대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어느 날 해월과 강수가 저녁을 먹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웬 사람이 사립 밖에서 집안을 기웃거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경계하며 강수가 일어났다.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훤칠한 사내는 소탈해 보였다.
“저는 박용걸(朴龍傑)이란 사람입니다. 여기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막골이란 외진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긴장한 강수는 계속 물었다.
“예, 저는 일 보러 직동에 자주 나옵니다. 그때마다 두 분 어르신이 보통 분들이 아님을 짐작했습니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데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부터 두 분을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게 됐습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깊은 산골에 들어온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지요. 저는 강 처사, 이분은 최 처사라고만 해 두지요.”
강수는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누군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는 점 이해합니다. 깊은 속내야 말씀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와 주시면 성심껏 돕겠습니다. 저는 학식이 부족하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둡지 않은 편이라 제 나름으로 사람 보는 안목은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해월은 강수가 낯선 이를 대하여 지혜롭게 처신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였다. 관의 지목이 서슬 퍼런 지금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의 생활도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마감해야 했다. 8월 초순, 인근에 머물러 살던 영양 접주 황재민이 해월을 황급히 찾았다. 이필제가 정기현 등과 무리를 다시 모아 문경의 무기고를 급습하였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정기현이 잡혔다면, 이곳도 무사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월, 강수, 전성문은 급히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낮에는 설익은 산앵두나 청미래 열매를 따 먹거나 헛개나무열매를 훑어서 씹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시금털털한 개복숭아 열매를 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먹을 것이 없어 물로 허기를 달랬다. 밤에는 큰 바위틈 동굴에 의지하여 잠을 청하며 아침을 맞고 저녁을 보내기를 몇 날 며칠. 추위와 굶주림이 극에 달하였다.
강수는 더 이상 산속에 머물다가는 굶주린 채 산짐승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리라 여기며, 인가를 찾아 내려가자고 해월에게 말했다.
“또다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오.”
“얼마 전 우리를 찾아왔던 박용걸이 기억 나십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돕겠다고 했습니다. 막골로 가십시다.”
“여기가 안전하지 못하다면, 그곳인들 안전하겠소?”
“그래도 그곳은 더 외진 마을이니 여기보다 나을 것입니다. 일단 박용걸 집으로 가서 바깥 동향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산속으로 숨어들어 막골로 향했다.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며 눈짐작으로 직동리 안쪽의 막골에 당도한 것은 이미 사방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등불 빛이 정겨웠다. 강원도에는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그나마 안심이었다. 주인 여자가 나왔다. 그 집이 바로 박용걸 집이었다.
박용걸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강수는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동학에 무단히 연루되어 쫓기고 있다고 반쯤은 감추고 말했다. 박용걸은 내막을 더 물어 보지도 않고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해월 일행은 고마워하며 바깥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박용걸에게 부탁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바깥 사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은 고단한 몸을 좀 쉬십시오.”
해월은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고요한 산골의 밤, 귀뚜라미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몸을 뒤척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멀리서 수탉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벌써 새벽이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간 박용걸이 정오가 넘어서 돌아왔다. 이필제가 일으킨 문경 사변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전해 주었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포졸들이 영월 산골 길목마다 초막까지 짓고 지키고 서서 일일이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머물던 정진일 집도 난리가 났더군요. 재산은 다 빼앗기고, 그 아내는 잡혀갔답니다. 그곳에서 하루라도 더 지체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모두 긴장해서 박용걸의 설명을 듣고만 있었다.
“포졸들이 직동까지 왔다면 이곳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떠납시다.”
박용걸이 하루쯤 더 머물기를 간청했으나 해월은 출발하자며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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