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해월을 만나다
협동조합은 한편에서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농촌이 계속 허물어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농부가 작물의 품종을 스스로 선택하고 기계화도 많이 이루어졌다.
1977년 수출 100억 불을 달성했다고 대통령이 신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노동자의 낮은 임금과 낮은 쌀값 정책으로 이룩한 경제 성장이었다. 생산비를 밑도는 쌀값 책정에 농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금방 무성해지는데, 농촌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장은 정부의 방침이라며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심고 농약을 살포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신고가 들어갔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제초제와 비료를 선택했다. 농약 묻은 풀을 먹고 어미 소는 새끼를 낳지 못하고, 농부들은 농약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땅이 병들고 있었다.
‘농사는 살아 있는 생명을 길러 내는 일! 그런데 생명이 죽다니!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땅을 살리고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방법이 없을까?’
장일순은 고민했다. 그러나 농약에 길든 벼는 농약 없이는 잘 자라지 못했다. 땅도 힘을 잃었다.
“몇 배로 힘을 들여 농사지어 봤자 일반 쌀값에 팔리는데 고생만 하고 생산비도 못 건지는 무농약 농사를 누가 하겠소?”
자연농법으로 농사짓자는 그의 설득에 사람들은 비아냥거렸다. 지금까지 ‘무위당’이란 호를 쓰면서, 남 앞에 나서지 않고 민중을 위해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왔다. 그러나 무언가 빠져 있었다.
해결 방법을 고민하던 중 대학 시절 오창세가 들려 준 해월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생명 존재는 한울님이다.”
이 말이 계속 울림을 갖고 떠올랐다. 그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었다. 농사를 짓든지, 정치를 하든지 그것이 바탕에 깔렸어야 했다. 모든 생명 존재를 한울님으로 모실 때 농촌도 살고, 사람들의 삶도 살아나리라 생각했다.
장일순은 대학 시절 미군 대령의 서울대 총장 취임에 반대 투쟁하다 제적당했다. 그리고 고향 원주에 내려왔을 때였다. 천도교에 다니는 오창세 형이 해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해월이란 분에 대해서 들어보았는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어떤 분인데요?”
호기심이 일어 되물었다.
“그럼, 전봉준 장군은 들어 보았어?”
“그럼요,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고부 사람 전봉준 말이지요?”
“전봉준이 지휘했던 동학혁명이 꽃이라면, 해월 선생이 포덕했던 사상은 뿌리라고 할 수 있네.”
“해월 선생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신데요?”
“35년간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기 뜻을 세워 끈질기게 동학을 포덕하신 분이네.”
“동학은 조선 말기에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해서 일어난 민란이 아닌가요?”
“그 정도라면 말도 안 꺼냈지. 동학은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이자 종교야. 모든 생명은 한울님을 모신다고 보았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 개벽 세상이 온다고 하였네.”
“개벽 세상이요? 그게 뭔데요?”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은 앞 시대 5만 년을 개개인의 이기심과 물질문명과 기계가 지배하는 선천시대로 보았지. 그리고 앞으로 모든 생명 존재가 한울님으로서 정신과 영혼이 깨어나는 후천시대 5만년의 개벽 세상이 오리라고 예언했지. 그때는 모든 생명이 서로 도우며 지상에서 행복하게 산다고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이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네.”
“개벽 세상을 선포한 수운 선생은 정말 대단한 분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수운 선생이 동학을 포덕한 지 4년 만에 돌아가시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동학을 한반도 전역에 퍼뜨렸다네.”
우리나라에 동학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해월이란 분이 이렇게 큰일을 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해월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동학이 밑바탕 되어 1894년 전국적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났어. 그때 우리나라 국민 중 3분의 1이 동참했다고 해. 그중 3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지. 그 뒤로 동학 도인들은 항일 의병 전쟁에 참여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한 후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 같은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해 왔네. 어쩌면 동학이 왜 우리 역사 속에서 묻혀지고, 잊혀져 왔는지 그 까닭을 찾아가다 보면 자네가 고민하는 문제의 해답도 찾아질 거라는 생각이 드네.”
오창세는 천도교인답게 동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동학은 사상인가요? 신앙인가요?”
장일순은 동학에 민족의 자부심과 희망이 들어 있음을 느꼈다.
“글쎄, 둘 다 포함되는 것 같네. 동학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평등사상, 같은 도인끼리 재산과 지식으로 서로 돕는다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사상이 들어 있어. 그런데 민중의 어려움을 현실 속에서 해결하려는 점에서는 실천 중심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어. 주문 수행을 통해 내적인 한울님과 일치하려는 점은 신앙에 해당하지.”
오창세의 막힘 없는 설명을 들으며 장일순은 동학과 해월에 대해 점점 더 호기심이 깊어졌다.
“동학에서 가장 강조한 점은 무엇인가요?”
“수운 선생은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지. 태어나 살아가는 모습과 하는 일은 달라도 근본 바탕은 같다고 본 거야. 서로의 다른 능력을 발휘하여 나누고 협력하고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살린다고 본 거야. 말하자면 동학은 다름의 존중을 통해 만민, 만물 평등을 이루려는 진정한 생명 존중 사상이지. 그러나 그건 절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수행과 실천적 노력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장일순은 해월 선생의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과연 모든 존재의 마음속에는 한울님이 있는 것일까? 정말 깨달으면 다른 사람이나 동식물도 자신처럼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될까?
장일순은 농촌 운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고민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해월이 떠올랐다. 농촌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해월의 생명 사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창세는 6·25동란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했으므로, 이제 와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혼자서 공부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천도교에 연락했더니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표영삼은 오랫동안 동학과 해월 연구를 해 왔다. 장일순에게 동경대전, 용담유사와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등이 수록된 천도교경전과 천도교서 같은 동학의 역사서 들을 전해 주었다.
해월의 어록을 모은 해월신사법설에는 놀라운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장일순의 심장을 찌르는 말이 있었다. “천의인 인의식 만사지 식일완(天依人 人依食 萬事知 食一碗).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⁵⁾낟알 한 톨이 만들어지는 데 하늘과 땅, 햇빛과 바람, 비와 이슬 등 우주 전체가 있어야 했다. 그러니 낟알과 밥이 곧 우주였다. 우주 천지가 공양으로 서로를 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해월은 식사를 하기 전에 “우주 생명이신 한울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밥을 맛있게 먹고 저도 또한 이웃 생명의 밥이 되겠습니다.”라고 ‘식고(食告)’하고 우주를 맞이하듯 식사를 하였다. 이것은 우주 질서를 꿰뚫은 생명 사상이었다. 우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거대한 생명 공동체였다.
무엇보다 표영삼은 수운 선생이 태어나고 동학을 창도하기까지 돌아다니거나 이사다닌 지역, 해월 선생이 35년 동안 숨어 다닌 전국의 골짜기, 마을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그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표영삼의 설명 속에서 해월의 어록들은 단순히 글자로 남겨진 기록이 아니라, 우리 계절 따라 피고 지는 산과 들의 풀꽃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아 줄 때까지 늘 살아서 숨쉬고 있는 사상이자 철학, 그리고 후천 개벽의 이치임이 분명히 실감되었다.
장일순은 자신의 호를 ‘청강’에서 ‘일속자(一粟子)’로 고쳤다. 그가 ‘조 한 알’로 호를 짓자 사람들은 재미있다며 궁금해 했다.
“나도 사람이라 누가 추어올려 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잖아. 그럴 때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야.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⁶⁾ 사람은 말이지,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해. 한순간이라도 하심(下心)을 놓치면 안 돼. 문을 활짝 열고 바닥 놈들하고 나누고 어울려야, 그래야 개인이고 집단이고 오류가 없는 거라. 해월 선생님도 늘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어. 본인이 직접 일하시면서 말이지.”
장일순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식어 버린 차를 마셨다. 유청은 장일순의 말을 들으면서 한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비로소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유청은 장일순의 한살림 생명운동이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너무나 깨끗한 먹을거리만 강조한 것이 사치 같았다. 그러나 해월의 생명 존중 사상을 듣고 나서야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아는 것이 인간만사와 우주만물의 이치를 제대로 깨닫는 길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밥 한 그릇 안에는 자연의 숨결도 들어 있지만, 인간의 탐욕과 폭력, 위정자의 가치관,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장 선생님, 저도 동학과 해월 선생에 대해 배우고 싶어요.”
“동학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을 소개해 주지. 표영삼 선생님, 내가 말한 적 있지? 수운과 해월 선생을 비롯해 동학에 대해서만 30년 가까이 연구해 오신 분이야.”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유청은 해월 추모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생각했다. 치악고미술동우회 회원들에게 말하면 그들도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원주시민, 강원도민, 아니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청은 해월 피체지에 대한 보도 자료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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