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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김현옥

작품 [님, 모심] - 5회 장일순, 탄압 받다

 

                                           

 

장일순, 탄압 받다 (1960~1977)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은 다음, 장일순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가 스물여섯 살이었다. 먼저 가족의 동의를 얻어 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동원하여 장윤(張潤), 김재옥(金在玉)과 함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한 다음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대성학교로 이름을 지었다. 장일순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성중고등학교 인가 과정은 지난하였다. 공무원들은 장일순의 나이가 어리다고 쉽게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서류를 반려하기 일쑤였다. 막걸리라도 사 줘야 일이 처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정치를 통해 바로잡고 싶었다. 그때는 이승만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던 시절이었다.

 

1956년 장일순은 원주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으나 중립화 평화통일을 주장하여 낙선하고 말았다. 또다시 1960419 혁명 직후 장일순은 사회대중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원주초등학교에서 후보자 합동 연설회가 있던 날이었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운동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차례가 되어 장일순은 단상 앞으로 나갔다. 그가 잠시 조용히 서 있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차츰 조용해졌다.

여러분!”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운동장을 채웠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장일순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데, 남북한은 평화 통일을 해야 합니다. 북진 통일을 하면 또다시 피바람을 불러올 것입니다. 남북한이 서로 도우며 평화적으로 사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입니다. 남한은 미국의 자본주의 이념을 따르지 말고, 북한은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다른 나라의 간섭 속에 살아야 합니까?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합니다.”

국시와도 같은 북진 통일에 반대하는 장일순의 연설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그래도 장일순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용기 있다느니 무모하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사회대중당은 해체됐다. 며칠 후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 둘이 나타나 그를 막무가내로 차에 태웠다. 잠깐 가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의 행동과 말에 한 점 잘못 된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게 없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들은 장일순을 허름한 건물로 데려갔다. 지하실 입구에서 선글라스 한 명이 장일순을 걷어찼다. 장일순은 계단을 굴러 지하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빨갱이 새끼!”

키 큰 사내가 다가오더니 몽둥이를 들어 온몸을 마구 내리쳤다.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어 몸뚱이로 몽둥이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어깨뼈가 부러졌는지 오른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상이 아주 불순하구먼. 누구 사주를 받고 평화통일 주장했어?”

누구 사주 받은 적 없소.”

북진 통일 반대하면 빨갱이라는 것 몰라? 조봉암하고 연결된 빨갱이 끄나풀 이름을 대.”

그런 사람 없소.”

오창세(吳昌世) 알아?”

한동네 살던 형님이오.”

빨갱이 끄나풀이었지?”

잘 모르오.”

근로인민당에 가입했다가 625 때 자진해서 인민군에게 부역한 걸 모른단 말이야?”

…….”

입 다물면 안 밝혀질 것 같아? 그놈 언제 만났어?”

…….”

장일순이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사내는 또다시 몽둥이 세례를 퍼부었다. 장일순이 의식을 잃고 널브러지자 그제서야 매타작이 끝났다. 사내는 그를 짐짝처럼던져 놓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사라졌다.

 

며칠 후 장일순은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연행되었다. 사복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장일순이 기차에 올랐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 이인숙이 젖먹이를 업고 따라왔다. 기저귀 가방을 들고 함께 기차에 오른 아내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장일순은 아내의 눈길을 외면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한겨울 들판처럼 얼어붙은 마음과 달리 강원도 추월산은 눈부신 신록 빛을 띠고 우뚝 서 있었다.

 

저들이 하고자 한다면 무슨 짓을 못하랴. 내 뜻이 관철될 것도 아닌데마음대로 해 보라지!’ 장일순은 심문 과정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결과 그는 재판 1심에서 8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지 않았다. 그는 서대문교도소와 춘천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담당 검사가 선생님같이 훌륭한 분은 처음이라며 곧 풀려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반공을 국시로 한 박정희 정권은 장일순을 강원도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쉬이 석방하지 않았다.

 

장일순은 3년 만에 출소하여 다시 대성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부는 정치활동정화법과 사회안전법을 적용하여 그의 모든 활동을 철저히 제한했다. 심지어 집 앞 골목길 입구에 파출소까지 지어 놓고 감시했다.

 

그러자 친구와 이웃들도 차츰 장일순을 멀리했다.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는 장일순 때문에 피해를 볼까 봐 친구들이 떠나갈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했다. 자신이 고립되는 것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헤집어 버리는 정권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선생의 꿈을 안고 명문 사범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교직에는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연좌제로 인해 사상 조회에서 늘 걸렸다. 아내는 자신의 꿈이 뭉개졌는데도 한 번도 장일순을 탓하지 않았다. 타박이라도 한다면 속이라도 편하련만 그저 쓸쓸히 웃을 뿐이었다.

교사는 내 운명이 아니었는가 보네요.”

학생들 앞에 떳떳한 교사로 서기 위해 노력했다는 아내, 피어나기도 전에 아내의 여린 꿈을 짓밟아 버린 자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선량한 사람의 앞길을 막은 위정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자신을 불태워서라도 그들을 고발하고 싶었다. 자신을 역사의 희생 제물로 바치고 싶었다.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하루 종일 헤매다가 빈손으로 밤늦게 집에 오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무능하게 느껴졌다.

 

장일순이 교도소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아내와 성당에 갔더니, 평소 잘 아는 사람이 차갑게 한마디 했다.

빨갱이가 성당에 왜 나와?”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을 믿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서운했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서 흐느껴 울었다. 세상인심이 너무 야박했고, 예수님조차 진실을 외면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무지 때문이려니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창에 찔린 듯 아팠다. 그러나 그럴수록 장일순은 성당에 가지 않겠다는 아내까지 설득하여 계속 성당에 나갔다.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려 무진 애를 썼다. 의연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자고 결심에 또 결심했다. 그러나 메아리 없는 함성은 그를 금방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을 탓하며 분노하고 방황했다. 진탕 술 마신 날은 억울하게 죽은 조봉암 선생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

 

자포자기하며 술에 찌들어 생활하던 어느 날 장일순은 거울 속에서 초라한 사내를 발견했다. 절망에 찌든 모습은 낯설고 정나미 떨어졌다. 그는 도리질을 쳤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삶은 밝고 환한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손길과 눈길에서 벗어난 삶은 그의 모습만큼이나 먼지가 쌓여 삭막하게 보였다.

 

그는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듯 집안 정리를 했다. 거미줄을 걷어 내고 비로 쓸고 걸레질을 했다. 창고를 정리하다가 어렸을 때 썼던 먼지 묻은 붓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 붓글씨를 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붓의 먼지를 씻고 먹을 오래오래 곱게 갈았다. 흰 화선지를 펴 놓고 먹물을 듬뿍 묻힌 붓을 들자 마음 한 자락이 밝아져 왔다. 어려서 하루 종일 썼던 붓글씨의 감각이 되살아나자 들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선한 눈빛과 따뜻한 음성이 떠올랐다.

장일순은 붓글씨를 다시 쓰면서 차강 선생도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글씨를 잘 쓰면서도, 손자 붓글씨 교육을 관동 지방에서 이름난 서예가인 차강 박기정에게 맡겼다. 그는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강릉에서 살았다. ‘차강(此江)’이란 강물과 강원도를 뜻한다고 했다. 호를 통해 강원도 사랑을 강조했다. 강원도에 뿌리를 두고 세계로 뻗어 가는 포부를 표현하였다. 차강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총을 들고 왜병들과 싸우고, 나이 들어서는 자신의 서화를 팔아 독립운동을 도왔다. 장일순은 그의 스승이 얼마나 의롭고 훌륭한 분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장일순은 차강을 생각하며 자신의 호를 청강으로 지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맑게 살겠다는 뜻이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마음을 비우고 맑은 강물처럼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원수를 용서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남을 탓하고 세상을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의 삶부터 건강하게 가꾸어 가자고 다짐했다. 장일순은 밭을 사서 포도를 심기 시작했다. 흙을 만지고 나무를 심는 마음이 편안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라앉아 갔다.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2015/05/23 - [소설/김현옥] - 작품 [모심] -4회 해월 최시형 (김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