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의 묘>
원주와 해월 최시형
“선생님, 해월 선생은 원주에서 붙잡힌 다음 어떻게 되셨어요?”
“원주에서 문막까지 가서 거기서 뱃길로 여주를 거쳐 서울로 끌려간 다음 압상되어 서소문 감옥에 갇히셨지. 이때 모모한 제자들이 모두 서울로 몰려들었고, 이종훈이란 도인이 일선에서 해월 선생과의 연락을 도맡았는데 서소문 감옥의 간수 두목 김준식을 찾아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더군.”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이종훈은 동학에 입도한 직후에 보은 취회가 있었는데 큰돈을 들여 그 비용을 충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동학혁명 당시에 지혜와 용력을 발휘하여 관군과 담판을 지은 일로 여주 일대에서 동학도들의 명망을 얻었지. 하여 일제강점기인 기미년(1919)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이기도 하지.”
“여주라면, 원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군요.”
유청은 호기심에 장일순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손병희나 김연국 등 해월 선생 측근에 있던 제자들은 이미 신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종훈이 나선 것이지. 이종훈은 여러 도인들이 모아 준 돈으로 김준식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고, 호형호제하면서 기지를 발휘해 결국 해월 선생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 해월 선생의 편지를 몰래 받을 수 있었지. 그때 해월 선생은 돈 50냥을 넣어 달라고 해서 굶고 있는 죄수들에게 떡을 사서 나누어 주었어. 당시에는 죄수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어. 해월은 옥에 갇힌 죄수들이 썩은 볏짚 베개를 씹으며 배고픔을 견디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지. 누구에게든 자상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이나,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한 해월 선생은 죄수들이나 간수들에게도 감화를 주었다나 봐. 해월 선생은 날마다 목에 칼을 쓰고 지금 종로 2가 사거리에 있는 재판소까지 걸어가서 재판을 받았는데, 72세의 고령인데다 옥중에서 계속된 설사병으로 몸이 너무도 수척해져 있었어. 해월 선생은 고통스럽게 몇 발자국 걷다 쉬고 걷다 쉬곤 해서 호송하던 옥졸도 칼의 앞머리를 들어 주기도 했다는 거야.”
“심문을 받을 때는 고문도 당하셨겠지요?”
“그렇지. 사형당하기 직전 해월 선생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고문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
“그래요?”
“옷은 찢어지고 피로 얼룩져 있어. 엄지발가락이 바닥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발등이 퉁퉁 부어 있고. 그런데도 해월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단 말이야. 상대방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는 매서운 눈빛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지. 사진을 들여다보는 나에게도 묻는 것 같아. ‘당신은 떳떳한가? 진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신념이 강한가?’ 하고 말이야. 해월 선생 앞에 서면 한 점 거짓이라도 숨길 수가 없어.”
“장 선생님 스스로 정직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튼 해월 선생은 평생 동안 하늘의 도를 추구하고 그것을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나누셨지. 하늘의 쉬지 않는 도를 당신 육신의 쉼 없는 노동, 민중을 향한 끝없는 베풂을 통해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네.”
“소박하고 민중적인 지도자네요.”
“언행이 일치된 참다운 지도자이지. 지도자란 말로만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지. 앞으로 세상에서는 이런 분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거야. 그런데 해월 선생을 재판한 사람이 누군 줄 아는가?”
“누군데요? ”
유청은 눈을 반짝거리며 장일순을 바라보았다.
“판사가 조병갑이었어. 고부 군수 시절 만석보를 만들어 백성을 착취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유발한 장본인이지. 전봉준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들이쳤을 때전주로 달아나 나중에 판사가 된 거야. 재판장은 그의 사촌인 조병직이고.”
“세상 참…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되풀이될까요?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조선인 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빨갱이라고 고문하고 죽이던 것과 어쩜 그렇게 똑같지요?”
“지금 세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지.”
씁쓸한 표정으로 장일순이 대꾸했다.
“해월 선생님은 유언은 남기지 않으셨나요?”
“미리 제자들에게는 흔들리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하셨어. 교수형 직전에도 한 말씀 하셨다는군, 당시 지배 세력에게.”
“뭐라고요?”
“나는 죽지마는 우리 도는 영원할 것이다. 나 죽은 지 10년 안에 장안에 주문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니 그날부터 왜국의 국운은 기울어지리라”
“죽음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통쾌하게 야단을 치셨네요. 그게 마지막인가요?”
“조병직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며 5월 말일에 해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틀 후에 좌포청에서 교수형을 집행했지. 좌포청은 지금의 종로 3가 사거리에 있었어.”
“이틀 만에요?”
“당시 새로운 법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지. 그때 해월 선생은 병이 위중하여 병사할 지경이었던가 봐. 조선 조정에서는 중범 죄인이 옥에서 병사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서둘러 형을 집행한 거지.
해월 선생의 시신은 사흘 동안 그 자리에 효시되었다가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매장을 하고 그날 밤 이종훈은 공동묘지에서 해월의 무덤을 찾아내었어. ‘동학 괴수 최시형’이라 쓴 팻말이 보인 거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이었어. 효시되었을 때 원한을 품은 이가 뒷머리를 내리쳐서 으스러진 머리를 겨우 수습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해월 선생님 묘소가 남아 있나요?”
“처음에는 경기도 송파의 한 도인집 뒷산에 매장했다가 몇 년 후 오늘날의 경기도 여주군 원적산 천덕봉 아래에 다시 이장을 해서 지금은 그곳에 있지. 송파에서 여주까지 해월 선생의 유해를 운구한 이는 천도교 4세 대도주가 되는 박인호 선생이야. 그 때도 비가 내렸다고 해. 손병희를 비롯한 나머지 도인들은 묘광을 마련하고 박인호를 기다렸지.”
“해월 선생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한 것 같아요. 그래도 해월 선생을 위하는 제자들 마음이 한결같이 정성스럽네요. 해월 선생님 묘소를 꼭 참배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게나. 육신은 떠났어도 한울님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 참배하면 기뻐할 것이네.”
“장 선생님, 원주 사람들이 나서서 송골에 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장소이니 말이에요.”
장일순은 유청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유청은 찻집으로 장일순 선생을 안내했다. 장일순 선생님은 해월 선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었다.
찻잔을 앞에 둔 장일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일순은 누구 앞에서든 솔직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선뜻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장일순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2015/05/16 - [소설/김현옥] - 작품 [모심]-3회 강원도 모월산 (김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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