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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김현옥

작품 [님, 모심] - 1회 장일순과의 대담



장일순과의 대담(19885)

치악산은 얼마 전에 연둣빛 등허리를 드러내더니 신록이 나날이 짙은 윤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꽃샘추위 뒤끝에 다사로운 봄 햇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환한 이팝나무가 꽃잎을 터트리자, 덩달아 찔레나무와 아카시아나무도 꽃향기를 내뿜었다. 나무는 겨우내 향기로운 잎과 꽃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눈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면 꽃향기가 맡아졌다.

 

이런 날엔 봄맞이 소풍이 제격인데.’ 유청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중요한 취재가 있는 날이다. 문화부장에게서 원주의 장일순이라는 분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을 개최한다고 취재해 오라는 엄명을 받아 놓은 터였다. 장일순?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처음에 유청이 인터뷰를 요청하자, 장일순은 단번에 거절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만한 기사는 못 된다고 했다. 기금 조성이라는 좋은 뜻을 널리 알리자는 것이라고 간곡히 사정한 다음에야, 간단히 몇 가지만 물으라며 허락했다.

한살림운동의 기금 조성을 위한 서화전은 527일부터 1주일간 열린다고 했다. 한살림운동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의 서화인지 궁금했다.

그림마당 민¹에 도착한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전시회장 입구는 첫날부터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전시회장 안에도 발 디딜 틈이 없는 가운데 제법 이름이 난 정치가, 종교인, 화가, 음악가 등이 여럿 눈에 띄었다. 장일순은 어떤 사람인가? 미리 장일순에 대해 조사해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유청은 이 전시회 기사가 내일 머리기사가 될 거라고 직감했다.

 

장일순의 훤칠하고 깔끔한 외모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과 잘 어울렸다. 부인은 연분홍 한복을 입어 화사하면서도 우아했다. 장일순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바빴다. 유청은 갤러리 안을 둘러보았다. 서화는 30여 점 전시되었다.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화들을 바라보았다. 힘 있고 투박한 붓글씨에, 삽화처럼 그림이 어우러져 있었다. 주로 난초를 그렸는데 꽃마다 사람 얼굴이 피어 있었다. 따스하고 밝게 웃는 꽃, 맑고 평온하게 웃는 꽃, 사색에 잠긴 듯 고개 숙인 꽃 등 다양했다.

그림과 조화를 이룬 글의 내용도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액자 속에 있는 고요한 소리라는 글자를 소리 내서 읽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졌다. 한밤중에 깨어서 혼자 고요히 들었던 침묵의 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심장 소리나, 지구가 돌면서 내는 울림 소리 같기도 하고, 만물이 고요히 내쉬는 숨소리 같기도 했다. 그 옆에 걸린 액자에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이라는 글을 읽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가 나라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 장일순 서생이 보통 분이 아님이 느껴졌다.

 

또 다른 액자 앞에서 그녀는 멈추고 말았다. “이 땅의 여자들은 이제까지 주고만 갔네. 그러나 그것은 온 세계를 자유롭게 하네라고 씌어 있었다. 늘 간섭만 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챙겨 주고 알려 주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미덥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반항함으로써 어른이 되었음을 증명하려 했다.’ 유청은 액자 글을 읽으면서 문득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다.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일찍이 혼자되어 딸만 바라보던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이 짜증내고 거부할 때마다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두 눈이 시큰해졌다. “이 땅의 여자들은 이제까지 주고만 갔네라는 문장 앞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양복을 헐렁하니 걸쳐 입은 장일순 선생은 수인사만 나누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온몸에 봄빛을 휘감은 듯 화사한 옷을 입은 유청은 의자에 앉아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서화 소재로 난초를 많이 그리셨네요?”

유청은 편안한 말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난초라고 할 수도 있고,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풀로 볼 수도 있습니다.”

!”

난초든 들풀이든 다 한가지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저 잎사귀를 보세요.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모든 식물은 우주와 소통하며 살기 때문에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지요. 바람과 햇빛, 하늘과 땅, 새와 사람과도 통해서 늘 흔들리고 변하면서 성장하지요. 우리 또한 우주와 순간마다 소통하며 살고 있어요.”

우주와 소통한다고요?”

그렇지요. 모든 존재는 우주의 원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주와 서로 소통하며 살아요. 그래서 숨을 쉬지요. 들숨과 날숨을 우주와 주고 받으며 살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주와 다시 한몸이 되는 거지요

우주에서 왔다가 우주로 돌아간다이런 뜻인가요?”

, 딱 맞는 말씀이에요. 나아가 살아 있는 생명뿐 아니라, 돌이나 물 같은 무생물조차도 사실은 우주적인 존재지요. 그러면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생명을 살리지요.”

돌이나 물이 우주적인 존재라고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는 우주를 형성하는 작은 조각 그림이지요. 나를 둘러싼 사회 속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나 혼자서는 불완전할 수밖에요. 다른 사람과 이웃나라, 크게는 자연과 서로 어울리며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지요. 그런데 좁은 시야로 만 보니까 주변 사람을 해치게 되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자연을 파괴하지요. 그러면 결국 내가 다치고 큰 그림이 망가지는데 말이지요. 서로가 서로를 모시고 살리는 삶의 비밀을 모르고 있어요.”

…….”

 

어느새 장일순의 말에 흠뻑 빠져들어 넋을 놓고 있던 유청은 몇 마디 단어만 메모해 두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난초 꽃잎이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해월 선생은 풀 한 포기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삽니다. 이런 점에서 난초나 사람이나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난초 꽃잎을 사람의 얼굴로 표현함으로써 난초와 사람을 동격으로 나타내고 싶었지요.”

풀 한 포기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셨나요?”

유청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의아해하며 장일순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풀에도 한울님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노래를 하지요. 이들 또한 사람과 똑같이 우주와 소통하며 살지요. 한울님을 모시고 산다는 점에서 모두가 똑같지요.”

한울님이란 신을 뜻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도 신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가요?”

장일순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유청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보았다. 유청은 그제서야 자기의 질문이 주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120여 년 전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이 했던 말씀이지요.”

, 선생님, 그 말씀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그렇게 하세요.”

대개 한글만 쓰거나 한자만 쓰거나 하는데, 선생님 작품은 한글과 한자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 같아요. 전통적 서예와는 다른 독창적인 느낌도 들고요.”

서화 작품을 받는 사람의 처지에 맞게 마음에 힘을 주는 글들을 적었습니다. 성현들의 경전 말씀이나 떠오른 생각을 적었지요. 해월 선생의 말씀을 특히 많이 인용했습니다.”

해월 선생이라면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 선생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해월 선생의 말씀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소개해 주실래요?”

, ‘천지는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이니 천지와 부모는 한 몸이니라. 자라서 곡식을 먹는 것은 천지의 젖을 먹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자연을 부모님으로 여기고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곧 한살림의 마음입니다.”

유 기자는 취재를 하면 할수록 우선 스스로가 흥미진진해지고 알고 싶은 것이 더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우선은 취재 계획에 충실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문화부장의 도끼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번 전시회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한살림운동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살림운동이 무엇인지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한살림이란 한마디로 생명운동입니다. 땅과 사람을 살리고, 삭막해져 가는 인간 사이를 살리고, 병들어 가는 자연을 살리자는 운동이지요. 농부인 생산자는 유기농 나아가서는 자연농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책임지고 그 농산물을 사 줌으로써 생산자가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도시의 소비자 또한 생명 친화적인 먹거리를 먹을 수 있게 되지요. 그런데 아직 초창기라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사정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살림을 후원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친환경 먹거리. 요즘 대도시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들었어요. 농촌과 도시가 서로를 살리는 좋은 운동이 될 것 같네요. 관람객들이 아주 많아서 다행입니다.”

,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여러분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지학순 주교와 박재일을 비롯하여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가 한살림 생명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전시회가 성황리에 잘 이루어져 한살림운동에 큰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처음에 긴장해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장일순 선생은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소곳한 모습은 평소의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이 배어난 것이었다. 유청은 기사를 마감하는 대로 근간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겠노라 인사하고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장일순과의 인터뷰는 유청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시된 작품 자체도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나 그 작품의 소재들인 나무나 풀이 사람과 더불어 한울님을 모시고 우주와 소통하는 존재라는 설명을 듣고 놀랐다. 무엇보다, 자신이 우주와 소통하는 존재라는 장일순 선생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안에 한울님이 있다?’ 유청은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오랜만에 본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유청으로서는 요즘 들어 날마다 집과 직장을 오가거나,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 현장에서 부대끼는 생활이 전부였다. 머리 위로는 언제나 우주가 열려 있건만 지금까지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못한 자신이 새삼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상생활 속에 매몰되어 바늘구멍만 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잎사귀를 보세요.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모든 식물은 우주와 소통하며 살기 때문에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지요. 바람과 햇빛, 하늘과 땅, 새와 사람과도 통해서 늘 흔들리고 변하면서 성장하지요. 우리 또한 우주와 순간마다 소통하며 살고 있어요.”

장일순의 말이 메아리처럼 그녀의 마음에 계속해서 울려 왔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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