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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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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가 파할 무렵 이창구는 포목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도씨 부인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창구는 그녀에게 집에 가라 이르고 가게를 정리한 뒤 어물전 정원갑에게 갔다. 마침 박덕칠이 와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게요? 부인께서 안 좋아 보이시던데.”

박덕칠은 이창구를 보며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좀 전 그는 포목점에 들렸다.

“순섬이를 소실로 맞이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흠, 부인이 상심할 만하군요.”

“그리 되었습니다.”

“…….”

박덕칠은 이창구 접장의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부인의 참담한 낯빛이 떠올라 차마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곤궁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창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별일 아니란 듯이 말을 돌렸다.

“근데 어쩐 일로?”

“통문을 갖고 오셨네유.”

정원갑이 이창구의 마음을 읽고 통문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창구는 통문을 펼쳤다. 전라도 삼례 도회소 명의였다.

“…충청감영에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니 전라완영에 의송단자를 내는 것 또한 천명이요. 모임에 달려오지 않으면 별단의 조치를 마련함은 물론이요 하늘로부터 죄를 받을 것이다.”

이창구가 공주에서의 신원 운동에 다녀온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해월 선생이 전라 완영에도 의송단자를 내자던 손천민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음날인 11월 2일, 이창구는 삼례에서의 신원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순섬이를 비롯해 내포 도인들과 길을 나섰다. 토끼털로 만든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거친 누비옷을 입고 나타난 순섬은 얼핏 보면 영락없는 남자였다. 그녀는 장옷을 벗어 던졌다. 장옷에 감춰진 양반이라는 허울을 벗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창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이창구는 삼례 모임에 순섬이를 꼭 데려가고 싶었다. 순섬이가 더 이상 기죽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과부라고 입질한다는 소리를 홍주댁에게 들었다. 이제 순섬이가 소실로 들어앉은 것을 알면 또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그녀가 사람들의 입질에 아랑곳없이 더 큰 이 세상의 가치에 몸담기를 바랐다.

창구 일행은 삼례에 약간 늦게 도착했다. 삼례는 이미 수천 명의 동학 도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공주 감사가 의송을 받아 들이고 감결을 내린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번지면서, 사람들이 삼례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동학 세상이 오면 질깃한 소나무 껍질을 씹어 먹는 굶주림은 없겠지, 이유 없이 관아에 끌려가 초죽음 당하는 일은 없겠지, 평생을 백정으로 살다가 죽기 전에 자식에게 소 잡는 칼을 물려주며 우워워 우워워 피울음을 토하지 않아도 되겠지, 청상과부도 다시 결혼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사람들이 삼례로 몰려들었다.

“해월 선생님은 안 오셨어요?”

순섬은 의송소를 방금 다녀온 이창구에게 궁금한 눈빛을 던졌다. 그녀는 해월 선생을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이 기회에 꼭 보고 싶었다. ‘나는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신다’고 하신 해월 선생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순섬이뿐만 아니라 내포 도인들 모두 해월 선생을 기다렸다. 그들은 해월 선생을 볼 기회가 없었다. 해월 선생은 전라도 포덕을 위해서 익산 사자암에서 수련을 하고, 충청도 포덕을 위해서는 손병희와 송보여, 박인호를 대동한 채 공주 마곡사 부속 암자인 가섭암에서 수련을 했지만 내포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내포는 지리학적으로 큰 산이 없는데다가, 양반 사족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해월 선생이 은신할 만한 곳이 없었다.

“배탈도 나신데다가 오시는 도중 말에서 낙상하는 바람에 못 오셨답니다.”

“저런! 어쩌다 그런 일이?”

순섬은 이창구를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천민이 해월 선생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충청 감영에 올린 것과 같은 취지의 의송단자를 지금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했다 하니 기다려 봅시다.”

이창구는 내포 도인들에게 잠시 앉아서 기다리라 하고 다시 의송소로 향했다. 한참 후 그가 전라 감사의 감결을 가지고 왔다. 의송소에 내려진 감결을 도인들이 여러 부 필사한 것이라 했다.

“…동학을 포교토록 허용하기를 바라나 말이 되지를 않는다. 곧 물러가 모두 새사람이 되어 미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전라 감사 역시 첫 감결은 강경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모인 도인들이 물러가라는 한마디 말에 쉽게 물러들 가겠는가. 동학 도인들은 원하던 답이 나오지를 않자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들은 시린 발들을 달래기 위해 여기저기 화톳불을 놓았다. 이창구와 순섬이도 삼삼오오 모여 있는 내포 도인들 틈에 끼어 앉았다. 도인들이 저마다 가져 온 짐 보따리를 풀었다. 약초꾼은 더덕이며 도라지를 내놓고, 사냥꾼들은 꿩고기 포를 가져 왔다. 농사꾼들은 쫀득쫀득 말린 고구마나 백설기를 내어 놓고, 어부들은 말린 서대와 박대를 꺼내놓았다. 화톳불이 점점 약해지고 별빛이 점점 돋아오자 인근 사는 나무꾼들은 나무 한 짐을 지어다 놓았다. 빈손으로 온 자도 허다했지만 다들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순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로만 듣던 유무상자 정신이 삼례에서 꽃을 피우는군요. 해월 선생님이 보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저를 이곳에 데려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평생 이 은혜 기억할게요.”

순섬의 밝은 미소가 화톳불 속에서 빛났다. 그녀의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 보였다. 화톳불이 꺼져 가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더욱더 검박하게 살고 싶소. 우리네 생활이야 호사스러울 것도 없지만 때로는 삿된 욕망에 빠져들기도 하오. 나도 오늘 좋은 경험을 했소. 좀 전 의송소에서 전봉준 접장을 만났는데 비록 나보다 대여섯 살 위이긴 하지만 보국안민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산 하나를 번쩍 들어 올릴 기세였소. 조선이라는 나라를 뜯어고쳐 개벽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고 싶소.”

이창구는 각오를 다지는 듯 순섬의 손을 꽉 잡았다. 순섬에게는 편할 수도 있는 삶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에 자신을 내던진 이창구가 태양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사람들이 떠들썩했다. 이창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순섬이를 두고 의송소로 갔다. 동학 금지를 빌미로 해서 무고한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것을 금하라는 전라 감사의 감결이 내려와 있었다. 충청 감영과 같은 취지의 감결로, 동학 도인들이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내려진 조치였다. 만족할 만한 답이 아니었다. 역시 수운 대선생의 신원 문제는 조정에서 하는 일이라며 비껴갔다. 도인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사실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있었다. 의송소에서는 감영의 한계라며 중앙 조정에 직접 신원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하고 경통을 내렸다.

“수운 큰 선생에 대한 신원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방황하지 말고 귀가해서 해월 선생의 지시를 기다려 후일을 도모하자.”

신원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접주들은 소속 도인들을 귀가시키려고 했지만 관리들의 탄압을 걱정하는 일부 도인들은 삼례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정사정없는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산야를 짚신에서 떨어져 나온 지푸라기들마냥 떠돌아야 할 처지였다. 짚신 끄는 소리가 바람소리를 삼켰다. 추위에 떨다 죽어도 좋다, 붙들려가도 좋다, 우리 세상 한번 만들어보자, 이렇게 서로 힘을 모으면 못할 것도 없다고 도인들은 웅성거렸다. 불을 지필 나무도 점점 소진되어 가는 듯 했다. 삼례의 밤은 늑대가 울부짖는 밤보다 더 깊었다. ‘보은으로 가자.’ 그들 가운데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론이 정해졌다. 보은은 동학의 대도소가 있는 곳이었다.

이창구는 내포 도인들을 먼저 보내 놓고 순섬이와 함께 해월 선생을 만나러 갔다. 그간 순섬이와 함께 해월 선생을 뵈러 간다 하면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말 나온 김에 순섬이를 해월 선생에게 인사도 시킬 겸 낙상한 발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청주로 말을 몰았다. 해월 선생 댁은 상주 왕실촌이었지만 마침 삼례 일로 청주 서택순의 집에 와 계셔서 기회가 좋았다.

 

2015/06/23 - [소설/박이용운] - 내포에 부는 바람(8회) - 첫 접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