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창구는 삼례에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 순섬이와의 혼례를 조촐하게 치르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집안 식구들에게 잔칫상에 쓸 음식을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일렀다.
간단하게 한다고 하지만 인륜지대사이고 보니 집안 전체가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도씨 부인은 순섬이가 소실로 들어온다는 생각에 속이 문드러졌다. 사람들 이목도 두려웠다. 문득 음식을 준비하려고 앞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신의 꼴이 볼썽사나워 보였다. 그녀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슬그머니 뒤꼍으로 갔다. 여종 하나가 완자전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종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고 본인이 직접 고기를 다졌다. 눈물이 고기를 적셨다.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라 아무도 그녀 곁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이구 마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멀리서 뒷마당을 쓸면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하인 하나가 갑자기 소리치며 달려왔다.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도씨 부인 손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도씨 부인은 칼에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린 것을 무시한 채 칼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인이 달려와서 그녀의 칼을 빼앗았을 때는 이미 검지 위쪽 한마디가 잘려나간 뒤였다. 잘려 나간 손가락은 이미 고기와 뒤범벅이 되었고, 손가락에서는 피가 솟구치면서 나무 도마를 시뻘겋게 적시고 있었다. 모든 혼례 준비가 중지되었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방으로 들어 온 이창구는 무명천으로 감싼 부인의 검지를 보았다. 한울님을 내쳤다는 자책감에 마음이 착잡했다. 해월 선생은 도를 통하고 통하지 못하는 것은 내외가 화순하느냐 화순치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부부가 화합치 못하면 천지가 막힌다고 했으니 순섬이 소실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했다.
“여보, 다시 옛날로 돌아가요. 동학도 순섬이도 없는 그때로 돌아가요.”
도씨 부인은 절규했다. 그녀는 이창구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잘린 검지에 떨어지면서 핏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이창구는 가슴이 타들어갔다.
“부인, 순섬이를 쇠학골에 그대로 살게 하겠소.”
이창구는 도씨 부인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제5장 광화문 복합상소
1.
삼례의 전라 감영에 의송을 제출한 지 3개월이 지났다. 동학도에 대한 침학을 금하라는 감사의 감결이 있었으나 그때뿐 도인들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스승님의 신원을 이룰 수 있을지 부심했다. 결론은 임금께 직접 상소하자는 데로 모아졌다.
1893년 2월 8일, 해월 선생의 통문이 내포에 도착했다. 세자 탄신 축하 과거시험 때를 이용하여 2월 21일 한양 광화문 앞에서 수운 큰 선생 신원을 하려하니 모든 도인은 상경하여 호응하라는 내용이었다. 박인호와 박덕칠은 봉소로서 상소 준비를 위해 미리 한양으로 떠나고, 이창구는 내포 접 내 회합을 갖고 상소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한편으로는 도인들의 한양 체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본인도 소 한 마리 값을 내놓았다. 박인호와 사촌지간인 덕산 도인 박광호가 대표자로 나서는데다가 내포는 한양과 가까이 있어 특별히 내포 도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형님, 그 많은 도인들이 한양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까요?”
김복기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이창구를 바라보았다.
“세자 탄생 축하 과거 시험이니 조정에서도 그 일에만 신경 쓰겠지. 우리 도인들 상경 소식을 안다 하더라도 어쩌지는 못할 거야.”
이창구는 나이 어린 김복기가 근심스런 낯빛을 보이는 게 안타까워 어깨를 툭 쳤다.
“찬고 애비야, 안방으로 건너와 아침 밥 먹어라.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당산댁이 밖에서 이창구를 불렀다. 이창구는 바랑을 챙겨 안방으로 건너갔다. 김복기와 정원갑도 따라 들어갔다. 아침인데도 반찬이 한상 가득했다. 당산댁은 아들이 한양 길에 나서려면 속이라도 든든해야 될 것 같아서 이른 아침부터 밥상을 준비했다.
“복기는 이번에야말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과거시험에 장정 둘을 대동하고 가는 양반은 없을 걸. 잘 보고 오거라.”
창구 아버지는 웃으면서 김복기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김복기가 이번만큼은 과거시험에 합격했으면 했다. 그는 김복기가 여느 사람 같지 않게 예의 바르다며 친자식처럼 대했다.
“아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김복기는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이창구와 짜고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고 창구 아버지를 속인 것이다. 어른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창구는 창구대로 얼굴이 벌개진 김복기를 보고 있자니 불편했다.
“동학 도인들이 상경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와는 상관없겠지?”
“예.”
“한양 나으리 덕분으로 우리 집안이 이만큼 번성했는데 그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네가 동학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너무 깊게는 관여하지 마라.”
“걱정 마세요. 한양 포목점들의 실태 좀 알아보고 바로 내려올게요.”
이창구는 능청스럽게 거짓말 하는 자신에게 놀라 숭늉 그릇을 엎었다. 당산댁이 이를 눈치 채고 얼른 떠나라고 눈을 껌벅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동학에 회의적이었으나 어머니 당산댁만큼은 그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창구는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어 바로 집을 나섰다. 한진 나루터에서 내포 도인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한양으로 가는 내포 길은 세자 탄신 축하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유생들로 붐볐다. 오랜만에 과거가 치러지는데다가 응시생 한 사람에 한두 사람이 따라 가다보니 길이 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창구 일행은 응시생으로 가장하고 유생들 틈에 끼었다. 그들은 한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아산으로 들어갔다. 그곳부터는 걸어서 가야 했다. 맹추위는 이미 지나간 듯 바람이 봄기운을 머금고 있었으나 날씨는 쌀쌀했다. 가끔씩 말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일면서 의복과 머리에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길가 나무에도 황토 꽃이 핀 것 같았다. 과거 응시생과 수천 명의 동학 도인들로 인해 한양은 북적였다. 이창구 일행은 동대문 밖 낙타산 부근을 찾았다. 박덕칠이 미리 와서 그곳에 내포 도인들 숙소를 잡아 놓고 있었다.
2.
광화문 앞 광장에 깨끗한 두루마기 차림의 동학 도인 40여 명이 엎드려 있었다. 그들 앞에는 붉은 보자기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보자기 안에는 상소문이 들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붉은 보자기가 신기한 듯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스승님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시고 감영이나 고을에서 억울하게 벌 받고 귀양 가 있는 생령들을 살려 주십시오. ... .
소수(疏首) 박광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연이어 동학 도인들이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주문을 나직이 읊조렸다. 그들의 손에는 염주가 들려 있었다. 한 알의 염주가 돌아갈 때마다 그들은 주문을 외웠다. 그들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붉은 보자기와 함께 그렇게 왕의 비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송을 제출한다며 충청 전라 감영 앞에 잇따라 운집하여 소요을 일으키던 동학 도인들이 마침내 한양 한복판에 나타나 좌도난정의 죄로 처형한 수운의 신원을 호소하고 있으나 조정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의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정을 드나드는 대신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양 안에 들어 와 있던 외국인 사절과 육의전과 운종가를 오가는 상인들만 기이한 광경을 구경하느라 빽빽한 사람 울타리를 치고 설왕설래 했다. 광화문 앞에서부터 운종가 일대에는 또 시험 보는 유생과 그 종자로 변복한 동학도들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며 옹송거리고 있었다. 도인들은 새벽녘 날이 밝으면 붉은 보자기에 쌓인 상소문을 앞세우고 광화문 앞으로 나왔다가 날이 저물면 숙소로 돌아가기를 사흘을 내리 되풀이했다. 국왕의 비답이 있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천개의 눈은 있었으나 도우려는 손은 한 개도 없었다. 조정을 향한 외국인들의 발걸음만 빨라지고 많아졌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알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왕의 뜻을 전하였다.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업에 임하라. 그러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 주리라.”
사알은 황급히 와서 이 말만 전하고 갔다. 종이쪽지 하나 주지 않았다. 그가 가고 나자 통곡 소리가 들렸다. 동학 도인들은 백성의 절절한 호소에도 꿈쩍 않는 불통의 임금과 조정을 원망하면서 서럽게 울었다. 붉은 보자기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천여 명의 동학 도인들은 얼굴이 흑 빛이 되어 광화문을 떠났다. 이창구 일행의 얼굴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태조의 영령이, 남산을 갈아 숫돌처럼 엷어질 때까지, 한강이 말라 띠처럼 가늘게 될 때까지 수를 누릴 것이라구유? 꿈 깨시유. 개돼지만도 못한 조정에 신원 해달라고 청원해 봐야 소귀에 경 읽기유. 다른 나라의 백성도 아니고 지 나라의 백성이 대궐 앞에 와서 사흘간이나 추위에 떨어가며 호소를 하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내다보지 않는 놈들을 위정자라고 할 수 있슈? 조정에 더 이상 뭘 기대한단 말여유. 힘을 보여주지 않는 한 저놈들은 앞으로도 꿈쩍 안 할 거유. 싸워서 힘을 보여 줍시다. 무릎 꿇고 의송단자 백번 올려봐야 헛수고유.”
정원갑은 남대문을 나서자마자 옹골차게 소리쳤다.
“절차를 무시했다며 상소문조차 받지 않는 임금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썩어빠진 나라 같으니라구!”
이창구는 다부지게 말했다. 조정이 이 모양이니 지방 벼슬아치들은 오죽하랴 싶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창구 일행은 남대문 밖 이문동을 향해 갔다. 그곳에서 박덕칠과 만나 공사관 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들은 한양에 오기 전 한양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박덕칠에게 미리 안내를 부탁했었다. 일을 끝내고 나타난 박덕칠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서로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이곳이 공사관 거리오.”
박덕칠이 무겁게 입을 뗐다. 박덕칠은 옹기 장사하러 한양을 오가면서 보부상들과 연맥이 닿아 여러 달 동안 한양에 머물면서 한양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박 접장, 저것 보소.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이유? 저기 저 멋진 건물말이유?”
정원갑은 잘 손질된 정원이 딸린 단아한 기와집을 가리켰다.
“저 건물? 그거 미국 공사관이여. 명성황후 친족인 민계호 집이었는데 팔아먹은 거지.”
“백성들 피 빨아서 왜양 놈들 배나 불리고 있으니 이 나라가 잘 될 턱이 없지. 썩을 놈들.”
“옛 문왕의 동산은 사방 칠십 리였는데도 백성들이 작다고 여겼다잖아요. 백성들이 그 동산에서 나무도 하고 토끼도 잡고 꿩도 잡을 수 있었으니 더 컸으면 했겠죠. 이 민계호의 집은 문왕의 동산에 비하면 발뒤꿈치도 못 따라갈 정도로 작은데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요.”
“지금 한양에 들어와 있는 행객의 십분지 일은 모두 바리바리 뇌물을 짊어지고 와서 감사나 현감 자리 기다리는 놈들이라고 보면 되오. 그 집에다 지고 온 뇌물을 들이는 데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니 저놈들 입장에서야 저 거대한 집도 적다고 할 만하죠.”
김복기는 혀를 끌끌 찼다. 민씨 일족의 부패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것이 영국 공사관이고, 북으로 있는 것이 프랑스 영사관, 그 옆이 러시아 공사관. 저 남쪽에 있는 것은 독일 공사관이고….”
박덕칠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는데 일본인 무리들이 조선 사람을 대동하고 옆을 지나쳤다. 그들 모두 왼쪽 허리춤에 큰 칼을 차고 있었다.
“저것들이 칼은 왜 차고 다니는 거유?”
정원갑은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그들을 향해 찼다.
“우리 도인들이 상경해서 난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들은 게지요. 바짝 긴장들 하고 있다는구만.”
박덕칠은 아침나절 우연히 만난 보부상을 통해 일본 장사치들과 거류민들이 사태의 추이를 알아보기 위해 자국 영사관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양들을 몰아내자는 괘서들이 장안에 나붙었다 하니 우리 내포도 그 대의에 맞게 일단 저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데 전력을 기울입시다. 그런 연후에 조정을 뒤집읍시다.”
이창구는 어깨 처진 일행들을 독려하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임금이 교지조차 내지 않는 것을 보면 동학 도인들의 앞날이 심히 염려스럽네.”
박덕칠의 얼굴은 여전히 수심이 가득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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