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과의 대담(1988년 5월)
치악산은 얼마 전에 연둣빛 등허리를 드러내더니 신록이 나날이 짙은 윤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꽃샘추위 뒤끝에 다사로운 봄 햇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환한 이팝나무가 꽃잎을 터트리자, 덩달아 찔레나무와 아카시아나무도 꽃향기를 내뿜었다. 나무는 겨우내 향기로운 잎과 꽃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눈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면 꽃향기가 맡아졌다.
‘이런 날엔 봄맞이 소풍이 제격인데….’ 유청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중요한 취재가 있는 날이다. 문화부장에게서 원주의 장일순이라는 분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을 개최한다고 취재해 오라는 엄명을 받아 놓은 터였다. 장일순?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처음에 유청이 인터뷰를 요청하자, 장일순은 단번에 거절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만한 기사는 못 된다고 했다. 기금 조성이라는 좋은 뜻을 널리 알리자는 것이라고 간곡히 사정한 다음에야, 간단히 몇 가지만 물으라며 허락했다.
한살림운동의 기금 조성을 위한 서화전은 5월 27일부터 1주일간 열린다고 했다. 한살림운동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의 서화인지 궁금했다.
‘그림마당 민’¹⁾에 도착한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전시회장 입구는 첫날부터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전시회장 안에도 발 디딜 틈이 없는 가운데 제법 이름이 난 정치가, 종교인, 화가, 음악가 등이 여럿 눈에 띄었다. 장일순은 어떤 사람인가? 미리 장일순에 대해 조사해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유청은 이 전시회 기사가 내일 머리기사가 될 거라고 직감했다.
장일순의 훤칠하고 깔끔한 외모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과 잘 어울렸다. 부인은 연분홍 한복을 입어 화사하면서도 우아했다. 장일순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바빴다. 유청은 갤러리 안을 둘러보았다. 서화는 30여 점 전시되었다.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화들을 바라보았다. 힘 있고 투박한 붓글씨에, 삽화처럼 그림이 어우러져 있었다. 주로 난초를 그렸는데 꽃마다 사람 얼굴이 피어 있었다. 따스하고 밝게 웃는 꽃, 맑고 평온하게 웃는 꽃, 사색에 잠긴 듯 고개 숙인 꽃 등 다양했다.
그림과 조화를 이룬 글의 내용도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액자 속에 있는 “고요한 소리”라는 글자를 소리 내서 읽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졌다. 한밤중에 깨어서 혼자 고요히 들었던 침묵의 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심장 소리나, 지구가 돌면서 내는 울림 소리 같기도 하고, 만물이 고요히 내쉬는 숨소리 같기도 했다. 그 옆에 걸린 액자에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이라는 글을 읽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가 나라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 장일순 서생이 보통 분이 아님이 느껴졌다.
또 다른 액자 앞에서 그녀는 멈추고 말았다. “이 땅의 여자들은 이제까지 주고만 갔네. 그러나 그것은 온 세계를 자유롭게 하네”라고 씌어 있었다. 늘 간섭만 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챙겨 주고 알려 주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미덥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반항함으로써 어른이 되었음을 증명하려 했다.’ 유청은 액자 글을 읽으면서 문득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다.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일찍이 혼자되어 딸만 바라보던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이 짜증내고 거부할 때마다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두 눈이 시큰해졌다. “이 땅의 여자들은 이제까지 주고만 갔네”라는 문장 앞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양복을 헐렁하니 걸쳐 입은 장일순 선생은 수인사만 나누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온몸에 봄빛을 휘감은 듯 화사한 옷을 입은 유청은 의자에 앉아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서화 소재로 난초를 많이 그리셨네요?”
유청은 편안한 말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예, 난초라고 할 수도 있고,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
“…난초든 들풀이든 다 한가지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저 잎사귀를 보세요.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모든 식물은 우주와 소통하며 살기 때문에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지요. 바람과 햇빛, 하늘과 땅, 새와 사람과도 통해서 늘 흔들리고 변하면서 성장하지요. 우리 또한 우주와 순간마다 소통하며 살고 있어요.”
“우주와 소통한다고요?”
“그렇지요. 모든 존재는 우주의 원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주와 서로 소통하며 살아요. 그래서 숨을 쉬지요. 들숨과 날숨을 우주와 주고 받으며 살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주와 다시 한몸이 되는 거지요”
“우주에서 왔다가 우주로 돌아간다’ 이런 뜻인가요?”
“네, 딱 맞는 말씀이에요. 나아가 살아 있는 생명뿐 아니라, 돌이나 물 같은 무생물조차도 사실은 우주적인 존재지요. 그러면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생명을 살리지요.”
“돌이나 물이 우주적인 존재라고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는 우주를 형성하는 작은 조각 그림이지요. 나를 둘러싼 사회 속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나 혼자서는 불완전할 수밖에요. 다른 사람과 이웃나라, 크게는 자연과 서로 어울리며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지요. 그런데 좁은 시야로 ‘나’만 보니까 주변 사람을 해치게 되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자연을 파괴하지요. 그러면 결국 내가 다치고 큰 그림이 망가지는데 말이지요. 서로가 서로를 모시고 살리는 삶의 비밀을 모르고 있어요.”
“…….”
어느새 장일순의 말에 흠뻑 빠져들어 넋을 놓고 있던 유청은 몇 마디 단어만 메모해 두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난초 꽃잎이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해월 선생은 풀 한 포기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삽니다. 이런 점에서 난초나 사람이나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난초 꽃잎을 사람의 얼굴로 표현함으로써 난초와 사람을 동격으로 나타내고 싶었지요.”
“풀 한 포기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셨나요?”
유청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의아해하며 장일순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풀에도 한울님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노래를 하지요. 이들 또한 사람과 똑같이 우주와 소통하며 살지요. 한울님을 모시고 산다는 점에서 모두가 똑같지요.”
“한울님이란 신을 뜻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도 신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가요?”
장일순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유청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 보았다. 유청은 그제서야 자기의 질문이 주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120여 년 전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이 했던 말씀이지요.”
“네, 선생님, 그 말씀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그렇게 하세요.”
“대개 한글만 쓰거나 한자만 쓰거나 하는데, 선생님 작품은 한글과 한자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 같아요. 전통적 서예와는 다른 독창적인 느낌도 들고요.”
“서화 작품을 받는 사람의 처지에 맞게 마음에 힘을 주는 글들을 적었습니다. 성현들의 경전 말씀이나 떠오른 생각을 적었지요. 해월 선생의 말씀을 특히 많이 인용했습니다.”
“해월 선생이라면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 선생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해월 선생의 말씀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소개해 주실래요?”
“예, ‘천지는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이니 천지와 부모는 한 몸이니라. 자라서 곡식을 먹는 것은 천지의 젖을 먹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자연을 부모님으로 여기고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곧 한살림의 마음입니다.”
유 기자는 취재를 하면 할수록 우선 스스로가 흥미진진해지고 알고 싶은 것이 더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우선은 취재 계획에 충실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문화부장의 도끼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번 전시회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한살림운동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살림운동이 무엇인지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한살림이란 한마디로 생명운동입니다. 땅과 사람을 살리고, 삭막해져 가는 인간 사이를 살리고, 병들어 가는 자연을 살리자는 운동이지요. 농부인 생산자는 유기농 나아가서는 자연농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책임지고 그 농산물을 사 줌으로써 생산자가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도시의 소비자 또한 생명 친화적인 먹거리를 먹을 수 있게 되지요. 그런데 아직 초창기라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사정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살림을 후원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친환경 먹거리’라. 요즘 대도시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들었어요. 농촌과 도시가 서로를 살리는 좋은 운동이 될 것 같네요. 관람객들이 아주 많아서 다행입니다.”
“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여러분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지학순 주교와 박재일을 비롯하여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가 한살림 생명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전시회가 성황리에 잘 이루어져 한살림운동에 큰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처음에 긴장해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장일순 선생은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소곳한 모습은 평소의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이 배어난 것이었다. 유청은 기사를 마감하는 대로 근간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겠노라 인사하고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장일순과의 인터뷰는 유청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시된 작품 자체도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나 그 작품의 소재들인 나무나 풀이 사람과 더불어 한울님을 모시고 우주와 소통하는 존재라는 설명을 듣고 놀랐다. 무엇보다, 자신이 우주와 소통하는 존재라는 장일순 선생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안에 한울님이 있다?’ 유청은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오랜만에 본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유청으로서는 요즘 들어 날마다 집과 직장을 오가거나,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 현장에서 부대끼는 생활이 전부였다. 머리 위로는 언제나 우주가 열려 있건만 지금까지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못한 자신이 새삼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상생활 속에 매몰되어 바늘구멍만 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잎사귀를 보세요.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모든 식물은 우주와 소통하며 살기 때문에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지요. 바람과 햇빛, 하늘과 땅, 새와 사람과도 통해서 늘 흔들리고 변하면서 성장하지요. 우리 또한 우주와 순간마다 소통하며 살고 있어요.”
장일순의 말이 메아리처럼 그녀의 마음에 계속해서 울려 왔다.
해월 피체지 답사
기사는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뜨거웠다. 며칠 뒤에 유청은 기사가 난 신문을 들고 장일순 선생을 찾아갔다. 그 며칠 동안 장일순의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취재기자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학구열로 장일순의 말을 들어 보고 싶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는 오랜만에 어린애 같은 설렘을 느꼈다.
유청이 찾아가자 장일순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선생의 부모님과 형제가 직접 지었다는 아담한 기와집은 정원이 넓었다. 키 큰 측백나무 옆에는 쥐똥나무와 단풍나무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는 산죽나무, 백일홍나무가 서 있었다. 초여름인데도 마당에는 질경이, 민들레, 괭이밥, 토끼풀 등이 납작 엎드린 채 꽃을 피우고 있다가 가끔씩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렸다. 자갈 틈 사이에 끼어서 사람발에 밟히지 않을 정도로만 낮은 키로 자라서 꽃을 피우다니 신기하기도 했다.
유청은 꽃들을 바라보며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선생님, 풀이나 새 속에도 한울님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장일순은 빙그레 웃었다. 편안하고 따스한 물결이 자신에게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장일순의 미소에 유청의 마음도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유 기자, 저기 흔들리는 단풍나무가 보이지?”
유기자는 고개를 들어 장일순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서 흔들 듯 까불거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나무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그거야, 바람 때문이지요. 바람이 와서 흔들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죽은 나무보다는 살아있는 나무가 더 잘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래요?”
“북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가죽 때문이겠나, 가죽을 채우는 공기 때문이겠나?”
“공기요. 타이어도 공기를 가득 채워 탱탱하면 잘 굴러가든요. 북도 팽팽해야 소리가 잘 나겠지요.”
“그렇지. 북을 반듯하게 펴주는 것은 바람이지. 사람 또한 바람 기운으로 말하고 걷는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이 육체일까 신체 속에 스며있는 바람일까?”
유청은 이해한 듯도 싶고, 전혀 못르는 것 같기도 했다.고개를 갸웃거리며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육체라는 외형이 있지. 그리고 그 안에는 마음이 담겨 있거든. 우리는 밥 먹고 숨쉬며 살지만, 또한 이것들을 알아차리는 고요한 존재도 있단 말이야. 육체만이 나라고 강하게 말할 수가 없는 거지. 사람에게서 마지막 숨이 빠져나갔을 때 남은 시신은 과연 누구일까? 이제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이해하겠지? 마음 중에는 모두를 위하는 하늘마음이 있는가 하면, 나만을 위하는 육체 마음도 있지. 육체 마음이라는 구름에서 벗어나면 본래 우리는 하늘마음이거든.”
유청은 자신의 육체 속에 하늘 마음이 담겨 있다는 말에 강하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세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구름 너머의 파란 하늘이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을 것 같았다. 자신 속에 파란 하늘을 상상하자, 일상 생활에 치어사느라 답답하던 가슴이 풀리는 듯했다.
“해월 선생은 말씀하셨지.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 속에도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고. 당연히 내 자신 속에도 한울님이 계시니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지. 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내 안에 계시는 한울님을 존중하다보면, 다른 사람이나 생명도 저절로 아끼고 사랑하게 되겠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는 존재이니 우리는 같은 형제인거지.”
유청은 장일순 선생을 통해서 어쩌면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장일순 선생을 자주 만나뵙고 싶었다. 그리고 해월 선생이 말씀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고 싶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녀가 서화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장일순은 웃으며 자신은 서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그녀는 몇 달 뒤에 서화와 고미술에 관심이 많은 친구 5명과 함께 ‘치악고미술동우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옛날 그림들을 찾고 보존하고 감상했다. 유청은 장일순에게 그 모임의 고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걸 구실 삼아 장일순 선생을 자주 찾아뵙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유청은 서화를 구경한답시고 틈만 나면 봉산동 장일순 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선생과 그의 부모 ‧ 형제가 직접 지었다는 소박한 기와집은 정원이 넓었다. 키 큰 측백나무 울타리 안에 산죽나무, 백일홍 등이 우거지고, 토끼풀이며 나리꽃이 정원 뜰을 수놓고 있었다.
세 번째 방문하는 날 처음으로 서재에 안내되어 들어가니 많은 책으로 둘러싸인 정면에 사진 액자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이분들은 누구세요?”
유청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사진 속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모자를 쓴 분은 내 할아버지일세. 서화를 좋아하고 사람 돕기를 즐겼던 따뜻한 분이셨지. 할아버지로부터 처음 붓글씨와 인간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 할아버지는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오든지 외면한 적이 없으셨지. 항상 따뜻한 밥을 대접하셨어. 그 옆에 계신 분이 서화를 가르쳐 준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 선생, 역사와 현실을 올바르게 보는 안목을 가르쳐 주신 분이야. 이분은 총 들고 의병 활동하다 말년에는 서화를 팔아 독립 활동 기금으로 보내곤 하셨어.”
장일순은 솔직하고 따뜻했다. 스스럼없이 한참 어린 자신에게도 다정하게 말씀해 주었다. 아직 존경할 만한 분이 없는 유청은 부러웠다. 장일순 선생이 이분들의 영향을 받으셨겠구나 생각했다.
유청이 훌륭한 분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만치에 다른 사진이 보였다.
“저기 턱수염이 무성한 분은요?”
“저분이 바로 해월 선생이시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
장일순은 따뜻한 눈빛으로 잠시 해월의 사진을 응시했다.
“모든 생명을 한울님으로 모시며 노동과 밥을 신성하게 여기신 분이지. 노동은 신성한 존재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한 인간의 거룩한 의무라고 하셨지. 그래서 평생 몸으로 노동을 실천하셨어. 관의 탄압으로 쫓기는 삶 속에서도 늘 기도하고 일하며 동학 교세를 키워 나가셨지.”
“저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라구요?”
유청이 상상하던 해월 선생 모습이 아니었다. 좀 더 근엄한 모습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사진 속의 해월은 풀리고 흩으러진 옷고름을 아무렇게나 맨, 여느 시골이나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농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일순은 서화전에서 봤던 많은 글이 해월 선생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유청은 다시 해월을 쳐다보았다. 저분은 어떤 공부를 하셨기에 뛰어난 지혜를 갖게 된 것일까? 유청은 호기심이 일었다. 사진인데도 작고 빛나는 두 눈에 기운이 생동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토요일이었다. 서울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 시대 여성 그림전’이나 보러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유 기자, 해월 선생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지?”
장일순이었다. 느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밝은 음색이 느껴졌다.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예, 지금 뵐까요?”
“아니, 열 시쯤 보세. 마늘 심고 나서….”
“선생님께서 직접 농사도 지으세요?”
“그럼, 내 먹을 것은 내가 심어야지.”
유청은 오랜만에 여유 있는 아침 시간에 곡우차를 우렸다. 창문 밖으로 붉게 물든 단풍나무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의 운율을 탄 나무들의 움직임이 춤사위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장일순과 해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장일순은 해월 최시형을 ‘민족의 거룩한 스승’이라고 했다. 자주 해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젠 유청도 해월의 팬이 되어 버렸다. 가끔 그가 몸담은 강원일보에 해월 이야기를 실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유청이 봉산동 집으로 찾아갔다. 장일순은 유청에게 호저면 송골로 간다고 했다. 유청은 해월과 송골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궁금해하며 30분 정도 차로 달렸다.
“저 위 농로 쪽으로 걸어가지.”
마을 초입에 차를 세우고, 나락이 누렇게 익은 들길을 지나 동네 어귀의 한 밭에 이르렀다. 한쪽에는 콩과 들깨가, 다른 쪽에는 배추와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옥수수수염이 말라 있는 것이 빨리 수확해야 할 것 같았다. 들깨 향기가 고소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할머니 혼자 엎드려서 콩대를 낫으로 베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청은 할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누구여? 잘 모르는 색시인데.”
할머니는 머릿수건을 벗어 땀을 닦으며 잠시 일손을 멈추었다.
“할머니 혼자 일하세요?”
“그려, 일할 손이 있어야지. 영감은 몸이 아프다고 누워 있어.”
“자녀분은 없으세요?”
“없긴, 다 도시로 나갔지. 도시에서 돈 번다고.”
“이 밭이 할머니네 밭이에요?”
“그려, 내년에는 농사도 못 짓겠어. 아무리 농사를 지어 봐도 돈이 돼야 말이지. 비료 값이 더 들어.”
“콩이나 들깨에는 약을 치지 않잖아요.”
“고추나 배추에는 약을 안 치면 농사가 안 돼. 이제는 힘들어서 그것도 못 해.”
“이 주변 좀 둘러봐도 되지요?”
“알아서 해. 무엇이 볼 게 있다고.”
할머니는 다시 엎드려 콩대를 베기 시작했다.
“그냥 구경 좀 하려고 그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할머니 혼자 일하시니 힘드시겠어요.”
유청은 할머니를 되돌아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농촌 현실이야. 노인들만 남아서 마을을 지키며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있지. 몇 년 전부터 마을에 어린아이 울음소리나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마을이 늙어 가고 있군요.”
“그래, 순환이 되지 못하고 있어. 도시는 포화 상태고, 농촌은 텅 비고…. 언제부터 농사가 천대받는 일이 되었을까? 한때는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말이지.”
유청은 장 선생이 가볍게 한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갈수록 농사짓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큰일이 나는 거지. 정부에서 자동차 수출한다고 쌀값을 저가에 정해놓으니, 생산비도 못 건지는 농민들은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지.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제초제며 농약으로 생명을 죽이는 농사를 짓고 있어.”
“이러다가는 앞으로 정말 먹을 것이 없겠는데요. 먹거리가 점점 오염되고 있으니 말이에요.”
“문제는 사람들이 먹거리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지. 자동차는 안 타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어.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동차는 중요하게 여기고, 쌀은 무시한단 말이야. 이러다간 결국 선진국에 의존하는 경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어. 나이를 먹을수록 생명을 존중하고 모시라고 하셨던 해월 선생의 말씀이 더욱 귀하게 여겨지네.”
유청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 또한 지금까지 음식에 대해서나 농촌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한살림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장일순 선생이 전시회를 열었을 때도 기자로서 의무적으로 인터뷰를 했을 뿐이다. 오염되지 않은 먹거리운동은 단순히 개인적 기호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생명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동네 어귀를 지나 장일순과 유청은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장일순은 산 바로 아래에 있는 밭을 가리켰다.
“이곳 원주시 호저면 송골 바로 여기가 해월 선생이 잡혀가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던 집이 있던 곳이야. ”
밭에서 옛날 집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이 밭의 흙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들은 90여 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유청은 해월이 이곳에서 제자들과 수련하고, 관군에게 잡혀가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을 해월의 심정을 헤아리며, 유청은 눈 아래 넓게 펼쳐진 10월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벼들이 고요히 사색에 잠겨 있었다.
강원도 모월산
“해월 선생이 은거했던 곳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어.”
송골 마을 앞 들판을 둘러보며 장일순이 말을 이었다.
“영월 직동이나 소밀원도 그렇고 단양 절골 등을 보면, 앞은 탁 트여 있어 관군이 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산으로 연결되어 있어 금방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야.”
장일순의 말에 유청은 앞으로 넓게 펼쳐진 논들을 바라보다 산 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정말이네요. 송골 또한 그런 지형적 특성이 있네요.”
유청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새삼스럽게 주변 경치를 자세히 살폈다.
“그렇지. 이렇게 지형적 특성까지 고려하여 은거한 치밀함 때문에 오랫동안 관의 체포를 피할 수 있었지. 해월 선생은 신유년(1861)에 동학에 입도하여 계해년(1863)에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았는데, 갑자년(1864) 3월 수운 선생이 체포된 그날부터 도피 생활을 시작해서 무술년(1898)에 체포되어 사형당하기까지 35년간을 끊임없이 피해 다니셨어. 그러면서도 해야 할 일은 다하셨지.”
“어떤 일을 했어요?”
“선생은 동학의 조직 체제를 정립하고, 수운 선생의 가르침을 민중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가르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지. 또 경전을 간행해서 동학의 기틀을 세우고 널리 포덕했어. 그 과정에서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과 당신의 가르침이 단지 헛된 이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낱낱이 실증되는 진리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셨지. 민중은 어쩌면 그런 모습에 감동되어서 더욱 동학의 교리를 믿고, 따르고, 수행에 참여할 수 있었을 거야. 말하자면 해월 선생이야말로 갑오년(1894) 전국적으로 불타오른 동학혁명의 불씨를 도인들 가슴마다 지피신 분이야. 한편 해월 선생이 관의 체포를 피하여 천지자연과 민중의 바다에서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이 강원도의 산천이자 그 속의 백성들인 것이고. 그러니 강원도에서 살아간다는 게 자랑스럽지 않나? 하긴 어느 지역에선들 사람들이 안 도왔겠어.”
유청은 장일순의 설명을 들으며, 100여 년 전 강원도의 첩첩산중을 넘나들며 신성한 일과 말씀을 통해 동학을 전파하는 해월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장 선생님 댁에 걸려 있던 액자 속에서 해월이 걸어 나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비로소 해월 선생이 한때 이 땅에서 살았던 한 인격체로 느껴졌다.
“동학을 알아 갈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지네요. 동학에서 강원도의 역할이랄까 그 의미를 조금만 더 말씀해 주세요.”
유청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재촉했다.
“강원도는 넉넉한 어머니와 같은 곳이야. 누군가 쫓겨 오면 말없이 품어 주는 땅이지. 그래서 치악산을 모월산(母月山)으로 불렀으면 좋겠어.”
“모월산이 무슨 뜻이에요?”
“모월은 ‘가부장은 가라’는 뜻이지. 가부장적 사고를 버리고 어머니 품 같은 자세로 살자는 거야. 어머니는 참 대단하지 않아? 임금도 안고, 남편, 자식도 안고…. 그 안에 세상이 다 안긴단 말이야. 달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길 안내를 하잖아. 술 취한 놈이든 도둑놈이든 가림이 없지. 남녀노소 가림이 없어요. 어머니와 달이 합쳐서 모월이야. 이 모월에 들어오면 나갈 수가 없어. 편안하고 신나니까. 강원도와 원주, 더 나아가서 이 나라와 온 세상을 그렇게 만들자는 것이지.”
“혹시 그게 원 월드 운동과 관련이 있나요?”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는가?”
“선생님께서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것을 논의한 것으로 아는데요.”
“한때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지. 세계를 하나의 연립정부로 만들면 국가 간의 갈등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군. 그래서 우선은 한반도 남쪽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서 서로 싸우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머니와 보름달의 마음으로 감싸 주고 안아 주자고 생각했어. 그래야 갈등이 풀리지.
“공감은 되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겠는걸요.
유청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어. 바로 우리 강원도 사람들이야. 누군가 쫓겨 들어오면 그가 누구든 가족처럼 안아 주고 숨겨 주었어. 조선 말기에 해월 선생과 동학 도인들은 탄압이 있을 때마다 강원도의 높고 험한 산악 지대로 숨어들었어. 최근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의 탄압이 있을 때마다 원주로 숨어들어 왔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린 김현장(金鉉奬),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문부식(文富軾)과 김은숙(金恩淑)도 원주로 피신했지. 그 외에도 강원도는 쫓기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을 안아 주고 보호해 주었어.”
‘장 선생님은 강원도와 원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장일순의 표정을 보며 유청은 존경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해월 선생은 이곳에서 얼마나 머물렀어요?”
“강원도에는 신미년(1871) 영해 거사(寧海 擧事) 직후부터 수차례 머무셨지. 그런데 원주에는 무술년(1898) 2월에 와서 4월 초에 붙잡히셨으니까, 실제로 머문 기간은 2개월밖에 안 돼.”
“그래도 동학의 역사에서 원주는 정말로 의미가 깊은 곳이네요. 해월 선생이 마지막으로 머무셨던 곳이니까요.”
유청은 작년 해외 연수로 이스라엘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예수가 마지막으로 머물다 붙잡힌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은 성지가 되었다. 유청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사람들은 예수(Jesus), 공자(孔子), 소크라테스(Socrates) 등이 살아 있을 때는 외면하고 탄압하다가 죽은 후에는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얼마 전까지 장일순도 정권으로부터 탄압받아 교도소에도 다녀오고, 사회안전법에 의해 늘 감시받아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아직 동학이나 해월 선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 워낙 갑오년의 희생이 컸기도 했지만, 동학을 탄압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되었어. 그후 해방이 되고 제1공화국이 들어설 때까지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정치 ‧ 경제의 권력을 잡고 있어.
오늘날 우리 인간은 무한대의 이기심 덕분으로 화려한 물질문명 사회를 이룩했지만, 그 결과 자연환경은 물론 자신에게조차 소외되어 버렸지. 해월 선생은, 모든 생명은 물론이고 일개 사물조차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 보았네. 이 도저한 생명 사상을 다시 주목해야 할 거야. 해월 선생은 우리 민족의 거룩한 성자시네.”
장일순의 말을 듣다 보니, 유청은 해월을 새롭게 보게는 되었지만 성자라는 표현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성자라고까지 할 수 있을까요? 평생 숨어 다녔다는 것, 동학의 제2대 교주라는 것 외에는 공적이라고 할 만한 건 없지 않나요.”
그녀는 해월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솔직하게 물었다.
“해월 선생 기사를 썼으면서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있군. 어디 자네뿐이겠나? 대부분 사람들이 해월 선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을 말하면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男), 손화중(孫華仲)만 말하지.
동학란 당시에는,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을 강조했어. 그러나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은 처음 동학을 포교할 때 후천개벽을 전제로 한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중시했어. 내 마음의 한울님을 믿고 정성과 공경을 다해 모시자는 것이었지. 그러다 최제우 선생은 동학을 편 지 4년 만에 대구 감영에서 사형을 당했어. 아직 동학의 세력도 약하고 동학 조직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지.
동학의 교리를 민중 속에 퍼뜨리고 세력을 확장한 이가 바로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었어. 그는 수운 선생이 강조한 시천주 사상을 사람을 하늘 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확대했지. 그는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는 스승의 유훈에 따라 동학을 널리 펴기 위해 35년간이나 피해 다니며, 동학의 사상을 온몸으로 실천했어. 그 덕분에 민중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모든사람이 평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선 거야.”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 낸 장일순의 시선이 하늘 한 귀퉁이를 향했다.
“……”
“세상이 동학을 주목할 날이 곧 올 거야.”
장일순은 유청을 돌아보며 말했다. 눈빛이 준엄했다. 유청은 이런 장일순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원주와 해월 최시형
“선생님, 해월 선생은 원주에서 붙잡힌 다음 어떻게 되셨어요?”
“원주에서 문막까지 가서 거기서 뱃길로 여주를 거쳐 서울로 끌려간 다음 압상되어 서소문 감옥에 갇히셨지. 이때 모모한 제자들이 모두 서울로 몰려들었고, 이종훈이란 도인이 일선에서 해월 선생과의 연락을 도맡았는데 서소문 감옥의 간수 두목 김준식을 찾아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더군.”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이종훈은 동학에 입도한 직후에 보은 취회가 있었는데 큰돈을 들여 그 비용을 충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동학혁명 당시에 지혜와 용력을 발휘하여 관군과 담판을 지은 일로 여주 일대에서 동학도들의 명망을 얻었지. 하여 일제강점기인 기미년(1919)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이기도 하지.”
“여주라면, 원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군요.”
유청은 호기심에 장일순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손병희나 김연국 등 해월 선생 측근에 있던 제자들은 이미 신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종훈이 나선 것이지. 이종훈은 여러 도인들이 모아 준 돈으로 김준식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고, 호형호제하면서 기지를 발휘해 결국 해월 선생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 해월 선생의 편지를 몰래 받을 수 있었지. 그때 해월 선생은 돈 50냥을 넣어 달라고 해서 굶고 있는 죄수들에게 떡을 사서 나누어 주었어. 당시에는 죄수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어. 해월은 옥에 갇힌 죄수들이 썩은 볏짚 베개를 씹으며 배고픔을 견디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지. 누구에게든 자상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모습이나,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한 해월 선생은 죄수들이나 간수들에게도 감화를 주었다나 봐. 해월 선생은 날마다 목에 칼을 쓰고 지금 종로 2가 사거리에 있는 재판소까지 걸어가서 재판을 받았는데, 72세의 고령인데다 옥중에서 계속된 설사병으로 몸이 너무도 수척해져 있었어. 해월 선생은 고통스럽게 몇 발자국 걷다 쉬고 걷다 쉬곤 해서 호송하던 옥졸도 칼의 앞머리를 들어 주기도 했다는 거야.”
“심문을 받을 때는 고문도 당하셨겠지요?”
“그렇지. 사형당하기 직전 해월 선생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고문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지.”
“그래요?”
“옷은 찢어지고 피로 얼룩져 있어. 엄지발가락이 바닥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발등이 퉁퉁 부어 있고. 그런데도 해월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단 말이야. 상대방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는 매서운 눈빛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지. 사진을 들여다보는 나에게도 묻는 것 같아. ‘당신은 떳떳한가? 진리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신념이 강한가?’ 하고 말이야. 해월 선생 앞에 서면 한 점 거짓이라도 숨길 수가 없어.”
“장 선생님 스스로 정직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튼 해월 선생은 평생 동안 하늘의 도를 추구하고 그것을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나누셨지. 하늘의 쉬지 않는 도를 당신 육신의 쉼 없는 노동, 민중을 향한 끝없는 베풂을 통해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네.”
“소박하고 민중적인 지도자네요.”
“언행이 일치된 참다운 지도자이지. 지도자란 말로만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지. 앞으로 세상에서는 이런 분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거야. 그런데 해월 선생을 재판한 사람이 누군 줄 아는가?”
“누군데요? ”
유청은 눈을 반짝거리며 장일순을 바라보았다.
“판사가 조병갑이었어. 고부 군수 시절 만석보를 만들어 백성을 착취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유발한 장본인이지. 전봉준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들이쳤을 때전주로 달아나 나중에 판사가 된 거야. 재판장은 그의 사촌인 조병직이고.”
“세상 참…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되풀이될까요?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조선인 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빨갱이라고 고문하고 죽이던 것과 어쩜 그렇게 똑같지요?”
“지금 세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지.”
씁쓸한 표정으로 장일순이 대꾸했다.
“해월 선생님은 유언은 남기지 않으셨나요?”
“미리 제자들에게는 흔들리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라고 하셨어. 교수형 직전에도 한 말씀 하셨다는군, 당시 지배 세력에게.”
“뭐라고요?”
“나는 죽지마는 우리 도는 영원할 것이다. 나 죽은 지 10년 안에 장안에 주문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니 그날부터 왜국의 국운은 기울어지리라”
“죽음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통쾌하게 야단을 치셨네요. 그게 마지막인가요?”
“조병직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며 5월 말일에 해월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틀 후에 좌포청에서 교수형을 집행했지. 좌포청은 지금의 종로 3가 사거리에 있었어.”
“이틀 만에요?”
“당시 새로운 법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지. 그때 해월 선생은 병이 위중하여 병사할 지경이었던가 봐. 조선 조정에서는 중범 죄인이 옥에서 병사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서둘러 형을 집행한 거지.
해월 선생의 시신은 사흘 동안 그 자리에 효시되었다가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매장을 하고 그날 밤 이종훈은 공동묘지에서 해월의 무덤을 찾아내었어. ‘동학 괴수 최시형’이라 쓴 팻말이 보인 거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이었어. 효시되었을 때 원한을 품은 이가 뒷머리를 내리쳐서 으스러진 머리를 겨우 수습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해월 선생님 묘소가 남아 있나요?”
“처음에는 경기도 송파의 한 도인집 뒷산에 매장했다가 몇 년 후 오늘날의 경기도 여주군 원적산 천덕봉 아래에 다시 이장을 해서 지금은 그곳에 있지. 송파에서 여주까지 해월 선생의 유해를 운구한 이는 천도교 4세 대도주가 되는 박인호 선생이야. 그 때도 비가 내렸다고 해. 손병희를 비롯한 나머지 도인들은 묘광을 마련하고 박인호를 기다렸지.”
“해월 선생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한 것 같아요. 그래도 해월 선생을 위하는 제자들 마음이 한결같이 정성스럽네요. 해월 선생님 묘소를 꼭 참배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게나. 육신은 떠났어도 한울님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 참배하면 기뻐할 것이네.”
“장 선생님, 원주 사람들이 나서서 송골에 지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장소이니 말이에요.”
장일순은 유청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유청은 찻집으로 장일순 선생을 안내했다. 장일순 선생님은 해월 선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었다.
찻잔을 앞에 둔 장일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장일순은 누구 앞에서든 솔직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선뜻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장일순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일순, 탄압 받다 (1960~1977년)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은 다음, 장일순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가 스물여섯 살이었다. 먼저 가족의 동의를 얻어 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동원하여 장윤(張潤), 김재옥(金在玉)과 함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한 다음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대성학교’로 이름을 지었다. 장일순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성중고등학교 인가 과정은 지난하였다. 공무원들은 장일순의 나이가 어리다고 쉽게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서류를 반려하기 일쑤였다. 막걸리라도 사 줘야 일이 처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정치를 통해 바로잡고 싶었다. 그때는 이승만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던 시절이었다.
1956년 장일순은 원주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으나 중립화 평화통일을 주장하여 낙선하고 말았다. 또다시 1960년 4‧19 혁명 직후 장일순은 사회대중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원주초등학교에서 후보자 합동 연설회가 있던 날이었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운동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차례가 되어 장일순은 단상 앞으로 나갔다. 그가 잠시 조용히 서 있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차츰 조용해졌다.
“여러분!”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운동장을 채웠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장일순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데, 남북한은 평화 통일을 해야 합니다. 북진 통일을 하면 또다시 피바람을 불러올 것입니다. 남북한이 서로 도우며 평화적으로 사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입니다. 남한은 미국의 자본주의 이념을 따르지 말고, 북한은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다른 나라의 간섭 속에 살아야 합니까?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합니다.”
국시와도 같은 북진 통일에 반대하는 장일순의 연설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그래도 장일순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용기 있다느니 무모하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사회대중당은 해체됐다. 며칠 후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 둘이 나타나 그를 막무가내로 차에 태웠다. 잠깐 가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의 행동과 말에 한 점 잘못 된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게 없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들은 장일순을 허름한 건물로 데려갔다. 지하실 입구에서 선글라스 한 명이 장일순을 걷어찼다. 장일순은 계단을 굴러 지하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빨갱이 새끼!”
키 큰 사내가 다가오더니 몽둥이를 들어 온몸을 마구 내리쳤다.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어 몸뚱이로 몽둥이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 냈다. 어깨뼈가 부러졌는지 오른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상이 아주 불순하구먼. 누구 사주를 받고 평화통일 주장했어?”
“누구 사주 받은 적 없소.”
“북진 통일 반대하면 빨갱이라는 것 몰라? 조봉암하고 연결된 빨갱이 끄나풀 이름을 대.”
“그런 사람 없소.”
“오창세(吳昌世) 알아?”
“한동네 살던 형님이오.”
“빨갱이 끄나풀이었지?”
“잘 모르오.”
“근로인민당에 가입했다가 6‧25 때 자진해서 인민군에게 부역한 걸 모른단 말이야?”
“…….”
“입 다물면 안 밝혀질 것 같아? 그놈 언제 만났어?”
“…….”
장일순이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사내는 또다시 몽둥이 세례를 퍼부었다. 장일순이 의식을 잃고 널브러지자 그제서야 매타작이 끝났다. 사내는 그를 짐짝처럼던져 놓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사라졌다.
며칠 후 장일순은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연행되었다. 사복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장일순이 기차에 올랐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 이인숙이 젖먹이를 업고 따라왔다. 기저귀 가방을 들고 함께 기차에 오른 아내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장일순은 아내의 눈길을 외면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한겨울 들판처럼 얼어붙은 마음과 달리 강원도 추월산은 눈부신 신록 빛을 띠고 우뚝 서 있었다.
‘저들이 하고자 한다면 무슨 짓을 못하랴. 내 뜻이 관철될 것도 아닌데…마음대로 해 보라지!’ 장일순은 심문 과정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 결과 그는 재판 1심에서 8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지 않았다. 그는 서대문교도소와 춘천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담당 검사가 ‘선생님같이 훌륭한 분은 처음’이라며 곧 풀려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반공을 국시로 한 박정희 정권은 장일순을 강원도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쉬이 석방하지 않았다.
장일순은 3년 만에 출소하여 다시 대성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부는 정치활동정화법과 사회안전법을 적용하여 그의 모든 활동을 철저히 제한했다. 심지어 집 앞 골목길 입구에 파출소까지 지어 놓고 감시했다.
그러자 친구와 이웃들도 차츰 장일순을 멀리했다.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는 장일순 때문에 피해를 볼까 봐 친구들이 떠나갈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했다. 자신이 고립되는 것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헤집어 버리는 정권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선생의 꿈을 안고 명문 사범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교직에는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연좌제로 인해 사상 조회에서 늘 걸렸다. 아내는 자신의 꿈이 뭉개졌는데도 한 번도 장일순을 탓하지 않았다. 타박이라도 한다면 속이라도 편하련만 그저 쓸쓸히 웃을 뿐이었다.
“교사는 내 운명이 아니었는가 보네요.”
학생들 앞에 떳떳한 교사로 서기 위해 노력했다는 아내, 피어나기도 전에 아내의 여린 꿈을 짓밟아 버린 자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선량한 사람의 앞길을 막은 위정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자신을 불태워서라도 그들을 고발하고 싶었다. 자신을 역사의 희생 제물로 바치고 싶었다.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하루 종일 헤매다가 빈손으로 밤늦게 집에 오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무능하게 느껴졌다.
장일순이 교도소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아내와 성당에 갔더니, 평소 잘 아는 사람이 차갑게 한마디 했다.
“빨갱이가 성당에 왜 나와?”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을 믿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서운했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서 흐느껴 울었다. 세상인심이 너무 야박했고, 예수님조차 진실을 외면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무지 때문이려니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창에 찔린 듯 아팠다. 그러나 그럴수록 장일순은 성당에 가지 않겠다는 아내까지 설득하여 계속 성당에 나갔다.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려 무진 애를 썼다. 의연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자고 결심에 또 결심했다. 그러나 메아리 없는 함성은 그를 금방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을 탓하며 분노하고 방황했다. 진탕 술 마신 날은 억울하게 죽은 조봉암 선생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
자포자기하며 술에 찌들어 생활하던 어느 날 장일순은 거울 속에서 초라한 사내를 발견했다. 절망에 찌든 모습은 낯설고 정나미 떨어졌다. 그는 도리질을 쳤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삶은 밝고 환한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손길과 눈길에서 벗어난 삶은 그의 모습만큼이나 먼지가 쌓여 삭막하게 보였다.
그는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듯 집안 정리를 했다. 거미줄을 걷어 내고 비로 쓸고 걸레질을 했다. 창고를 정리하다가 어렸을 때 썼던 먼지 묻은 붓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 붓글씨를 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붓의 먼지를 씻고 먹을 오래오래 곱게 갈았다. 흰 화선지를 펴 놓고 먹물을 듬뿍 묻힌 붓을 들자 마음 한 자락이 밝아져 왔다. 어려서 하루 종일 썼던 붓글씨의 감각이 되살아나자 들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선한 눈빛과 따뜻한 음성이 떠올랐다.
장일순은 붓글씨를 다시 쓰면서 차강 선생도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글씨를 잘 쓰면서도, 손자 붓글씨 교육을 관동 지방에서 이름난 서예가인 차강 박기정에게 맡겼다. 그는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강릉에서 살았다. ‘차강(此江)’이란 강물과 강원도를 뜻한다고 했다. 호를 통해 ‘강원도 사랑’을 강조했다. 강원도에 뿌리를 두고 세계로 뻗어 가는 포부를 표현하였다. 차강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총을 들고 왜병들과 싸우고, 나이 들어서는 자신의 서화를 팔아 독립운동을 도왔다. 장일순은 그의 스승이 얼마나 의롭고 훌륭한 분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장일순은 차강을 생각하며 자신의 호를 ‘청강’으로 지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맑게 살겠다는 뜻이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마음을 비우고 맑은 강물처럼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원수를 용서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남을 탓하고 세상을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의 삶부터 건강하게 가꾸어 가자고 다짐했다. 장일순은 밭을 사서 포도를 심기 시작했다. 흙을 만지고 나무를 심는 마음이 편안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라앉아 갔다.
장일순, 지학순 주교를 만나다
어느 날 장일순의 봉산동 집으로 한 신부가 찾아왔다. 지학순(池學淳) 주교라고 했다.
“함께 일할 신도를 찾았더니 누가 ‘저기 빨갱이로 몰려서 농사짓고 있는 사람 있으니 만나 봐라.’ 해서 왔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장일순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저는 로마 교황청에서 주교로 임명받아 원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황님의 뜻을 함께 실천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교는 좀 더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장일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꿈은 종교적인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지하게 묻는 지학순 주교의 눈빛이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맑았다.
“저는 사람들이 누구나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주교는 만면에 화색을 띠며 맞장구를 쳤다.
“그거야말로 제가 해야 하는 일이고 교황님의 뜻입니다.”
장일순은 그제야 주교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은 아무런 거짓도 없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교황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비로소 장일순은 주교의 말에 관심을 두고 물었다.
“성 바오로 교황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가 문 닫고 담 쌓으면 안 된다. 사회와 소통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데 천주교의 의미가 있다’고요. 이런 뜻을 실천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만들었지요. 저는 이 정신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실질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든 절이든 구분하지 말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일했으면 합니다.”
장일순은 가슴속이 탁 트임을 느꼈다. 지금까지 교회의 형식과 내용에 답답함을 느껴 오던 참이었다.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주교의 말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 어쩌면 정치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종교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장일순이 긍정적으로 나오자 지 주교가 반색하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셨군요. 저는 먼저 사회의 희망인 교회 청년들을 교육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교회를 쇄신하고 싶습니다. 활짝 문을 열고 다른 종교들과 협력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그가 사회에서 실천하고 싶었던 것을 지학순 주교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전부터 그는 유영모, 함석헌 선생이 주장한 종교 다원주의에 동감하고 있었다. 38세에 장일순은 교구사도회 회장이 되어 학교에서 못다 한 교육을 성당에서 실행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김찬국 등 기독교 진보 인사들은 물론 농업 전문 교수, 노동문제연구소 사회학자 등 각계 지식인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자연스럽게 원주에 지식인 그룹인 ‘원주 캠프’가 구성되었다.
1970년 봄, 서울 YMCA 강당에서 ‘삥땅 심포지엄’이 열렸다. 버스 안내양이 노동문제연구소에 편지를 보낸 것이 발단이 됐다. 노동문제연구소에서 그 안내양 고민을 해결할 수가 없어 장일순에게 상담이 들어왔다. 장일순은 여러 번 편지를 들여다보며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지학순 주교밖에 없습니다.”
아내의 조언에 장일순은 지 주교를 찾아갔다. 지 주교는 웃으면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 없으면 나라도 하지 뭐!”
장일순은 관련 기관의 사람들, 학자들, 종교계 인물들, 정치가들을 모아 놓고 ‘삥땅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회자는 지학순 주교였다. 그는 먼저 버스 안내양이 보낸 편지를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저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버스 차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루 16시간 차장 노릇을 하면서 사는데, 차장 월급만으로는 살기가 힘들어 날마다 돈 가방에서 300환씩 삥땅하며 살았습니다. 그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고, 시골에 사는 어머니 아버지 생활비를 보내고, 동생 중학교 학비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돈 가방에서 돈을 삥땅하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 같아서 양심에 찔리고 괴로워서 못 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²⁾
편지를 다 읽고 나서도 회의장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침묵을 깨고 지학순 주교는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에게 물었다. 아무도 나서서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든지 대답하기가 껄끄러운 문제였다. 잘했다고 칭찬할 수도 없고,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지 주교는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그 처녀에게 ‘네가 잘못했다. 죄인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거꾸로 물어보겠습니다. 버스 회사 박상구 사장님!”
뚱뚱한 박 사장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움찔 했다.
“당신, 월급 얼마나 탑니까? 다른 선진국에서는 8시간만 일해도 자기 행복을 다 추구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이 처녀는 그 곱절인 16시간 일해도 제 입에 풀칠을 못할 정도요. 당신은 얼마나 받소?”
박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윤준영 구청장님, 물어봅시다.”
구청장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당신네 구 소속 버스 회사에서 이렇게 딱하게 일하고 있는 처녀가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신은 월급 얼마나 받소?”
역시 윤 구청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번에는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을 돌아보았다. 부르기도 전에 그들은 숨기라도 하듯이 몸을 낮췄다.
“여러 장관님, 국회의원님들! 당신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오? 어저께 신문을 보니까 대통령께서 우리나라 수출 많이 했다고 즐거워하는 사진이 크게 찍혀 있습디다. 대통령께도 묻겠습니다. 수출해서 잘살아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수출을 많이 해도 이렇게 딱한 처녀애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인도 아니고 아직 미성년자인데 하루에 16시간 일해도 제 입에 풀칠을 못하다니 이게 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이렇게 해서야 진정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요?”
지 주교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심포지엄이 끝나자마자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지 주교와 장일순을 에워쌌다. 검은 선글라스 쓴 한 명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거론된 말들은 밖에서 절대 하지 마시오. 만일 밖에서 말이 돌면 당신들 책임이오.”
“오늘 문제에 대한 당신 답은 무엇이오?”
오히려 장일순이 되묻자 그들은 얼른 자리를 피해 버렸다.
이 ‘삥땅 심포지엄’을 계기로 장일순은 지금까지 원주 캠프에서 추구해 온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근원적으로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지금까지는 주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내세운 게 ‘자유권’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권과 생존권이 같이 해결되어야 했다. 모든 존재의 생명의 존엄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자유는 허울 좋은 하눌타리인 것이다.
장일순은 민주화 운동, 노동 · 농민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호를 ‘무위당(无爲堂)’으로 바꿨다.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에서 따왔다. 남을 돕되 뒤에서 자연스럽게 하겠다는 자신의 삶의 철학을 ‘무위’에 담은 것이다. 지학순 주교 뒤에는 늘 장일순이 있었다. 겉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말없이 도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압살과 경제란으로 민심이 뒤숭숭하던 한여름이었다. 초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밤이 깊어지면서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마을 방송이 갑자기 울려 퍼졌다.
“원주 시민 여러분, 방송을 듣는 즉시 가마니와 삽, 괭이 등을 챙겨서 마을 회관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물살에 논밭이 다 떠내려가게 생겼습니다. 급하니 빨리빨리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장의 다급한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장일순은 빗소리에 깨어 있던 터라 즉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검은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손전등을 켜 들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들로 나갔다. 개천의 물이 금방 넘칠 것 같았다. 개천의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짚 가마니에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날이 밝아 오도록 빗줄기는 그칠 줄 몰랐다. 논밭이 물에 잠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안 가득 물살이 밀려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남한강 대홍수로 14만 5천 명의 수재민이 생겼다.³⁾ 이들에게 남은 건 수마(水魔)에 휩쓸린 황무지뿐이었다. 뿌리 뽑힌 어린 벼, 파묻힌 논밭과 허물어진 건물 잔해를 보면서 한숨만 나왔다. 물난리는 삶의 뿌리까지 쓸어가 버렸다. 논밭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장일순은 온몸이 젖은 채 성당으로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주교님. 수재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당장 굶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결책을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정부에서 지원을 못하면 해외에라도 손을 벌려야 될 것 같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재단에 편지를 보내 지원을 호소하면 어떨까요?”
장일순과 지학순 주교는 해외 여러 가톨릭 단체에 편지를 보냈다. 거절의 답장만 받는 날들이 이어졌다. 장일순은 안타까움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드디어 긍정적인 답장이 왔다. 그것도 두 곳이었다. 국제 가톨릭 재단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s)와 독일 미제레올(Misereor)에서 291만 마르크(한화 약 3억 6천만 원. 당시 원주시 땅값이 평당 200~300원.)의 지원금을 보내 주었다.
1973년 초 원주 교구가 주축이 되어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수해지원금을 놓고 고민했다. 사람들이 당장 원하는 쌀을 무상으로 지급할 것인가? 쌀을 통해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할 것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은 결과, 마을별로 자율적인 모임을 만들어 일한 뒤에 쌀을 지급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무너진 집터를 정리하고 쓰러진 벼들을 세웠다. 그리고 땀 흘린 대가로 쌀을 받았다.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일하면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차츰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아 갔다. 그러자 장일순은 협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강연을 하며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분, 브라보콘 값을 누가 정하죠? 그래요, 브라보콘을 만든 곳에서 정하죠. 그런데 쌀값은 누가 정해요? 농민이 정하나요? 세상에 농민이 길러낸 쌀로 지은 밥 안 먹고 사는 사람 있어요? 이렇게 중요한 쌀값을 농민들도 정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협동조합을 하자는 거예요. 농사지은 사람이 쌀값을 매기고 그걸 사 먹는 사람도 누가 만든 곡식인지 알고 먹게 하자는 거지요.”⁴⁾
장일순의 강연을 들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서서히 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은 힘들이 서로를 끌어들이며 점점 큰 힘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장일순, 해월을 만나다
협동조합은 한편에서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농촌이 계속 허물어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농부가 작물의 품종을 스스로 선택하고 기계화도 많이 이루어졌다.
1977년 수출 100억 불을 달성했다고 대통령이 신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노동자의 낮은 임금과 낮은 쌀값 정책으로 이룩한 경제 성장이었다. 생산비를 밑도는 쌀값 책정에 농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금방 무성해지는데, 농촌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장은 정부의 방침이라며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심고 농약을 살포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신고가 들어갔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제초제와 비료를 선택했다. 농약 묻은 풀을 먹고 어미 소는 새끼를 낳지 못하고, 농부들은 농약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땅이 병들고 있었다.
‘농사는 살아 있는 생명을 길러 내는 일! 그런데 생명이 죽다니!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땅을 살리고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방법이 없을까?’
장일순은 고민했다. 그러나 농약에 길든 벼는 농약 없이는 잘 자라지 못했다. 땅도 힘을 잃었다.
“몇 배로 힘을 들여 농사지어 봤자 일반 쌀값에 팔리는데 고생만 하고 생산비도 못 건지는 무농약 농사를 누가 하겠소?”
자연농법으로 농사짓자는 그의 설득에 사람들은 비아냥거렸다. 지금까지 ‘무위당’이란 호를 쓰면서, 남 앞에 나서지 않고 민중을 위해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왔다. 그러나 무언가 빠져 있었다.
해결 방법을 고민하던 중 대학 시절 오창세가 들려 준 해월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생명 존재는 한울님이다.”
이 말이 계속 울림을 갖고 떠올랐다. 그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었다. 농사를 짓든지, 정치를 하든지 그것이 바탕에 깔렸어야 했다. 모든 생명 존재를 한울님으로 모실 때 농촌도 살고, 사람들의 삶도 살아나리라 생각했다.
장일순은 대학 시절 미군 대령의 서울대 총장 취임에 반대 투쟁하다 제적당했다. 그리고 고향 원주에 내려왔을 때였다. 천도교에 다니는 오창세 형이 해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해월이란 분에 대해서 들어보았는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어떤 분인데요?”
호기심이 일어 되물었다.
“그럼, 전봉준 장군은 들어 보았어?”
“그럼요,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고부 사람 전봉준 말이지요?”
“전봉준이 지휘했던 동학혁명이 꽃이라면, 해월 선생이 포덕했던 사상은 뿌리라고 할 수 있네.”
“해월 선생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신데요?”
“35년간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기 뜻을 세워 끈질기게 동학을 포덕하신 분이네.”
“동학은 조선 말기에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해서 일어난 민란이 아닌가요?”
“그 정도라면 말도 안 꺼냈지. 동학은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이자 종교야. 모든 생명은 한울님을 모신다고 보았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 개벽 세상이 온다고 하였네.”
“개벽 세상이요? 그게 뭔데요?”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은 앞 시대 5만 년을 개개인의 이기심과 물질문명과 기계가 지배하는 선천시대로 보았지. 그리고 앞으로 모든 생명 존재가 한울님으로서 정신과 영혼이 깨어나는 후천시대 5만년의 개벽 세상이 오리라고 예언했지. 그때는 모든 생명이 서로 도우며 지상에서 행복하게 산다고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이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네.”
“개벽 세상을 선포한 수운 선생은 정말 대단한 분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수운 선생이 동학을 포덕한 지 4년 만에 돌아가시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동학을 한반도 전역에 퍼뜨렸다네.”
우리나라에 동학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해월이란 분이 이렇게 큰일을 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해월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동학이 밑바탕 되어 1894년 전국적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났어. 그때 우리나라 국민 중 3분의 1이 동참했다고 해. 그중 3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지. 그 뒤로 동학 도인들은 항일 의병 전쟁에 참여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한 후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 같은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해 왔네. 어쩌면 동학이 왜 우리 역사 속에서 묻혀지고, 잊혀져 왔는지 그 까닭을 찾아가다 보면 자네가 고민하는 문제의 해답도 찾아질 거라는 생각이 드네.”
오창세는 천도교인답게 동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동학은 사상인가요? 신앙인가요?”
장일순은 동학에 민족의 자부심과 희망이 들어 있음을 느꼈다.
“글쎄, 둘 다 포함되는 것 같네. 동학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평등사상, 같은 도인끼리 재산과 지식으로 서로 돕는다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사상이 들어 있어. 그런데 민중의 어려움을 현실 속에서 해결하려는 점에서는 실천 중심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어. 주문 수행을 통해 내적인 한울님과 일치하려는 점은 신앙에 해당하지.”
오창세의 막힘 없는 설명을 들으며 장일순은 동학과 해월에 대해 점점 더 호기심이 깊어졌다.
“동학에서 가장 강조한 점은 무엇인가요?”
“수운 선생은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지. 태어나 살아가는 모습과 하는 일은 달라도 근본 바탕은 같다고 본 거야. 서로의 다른 능력을 발휘하여 나누고 협력하고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살린다고 본 거야. 말하자면 동학은 다름의 존중을 통해 만민, 만물 평등을 이루려는 진정한 생명 존중 사상이지. 그러나 그건 절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수행과 실천적 노력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장일순은 해월 선생의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과연 모든 존재의 마음속에는 한울님이 있는 것일까? 정말 깨달으면 다른 사람이나 동식물도 자신처럼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될까?
장일순은 농촌 운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고민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해월이 떠올랐다. 농촌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해월의 생명 사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창세는 6·25동란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당했으므로, 이제 와서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혼자서 공부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천도교에 연락했더니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표영삼은 오랫동안 동학과 해월 연구를 해 왔다. 장일순에게 동경대전, 용담유사와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등이 수록된 천도교경전과 천도교서 같은 동학의 역사서 들을 전해 주었다.
해월의 어록을 모은 해월신사법설에는 놀라운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장일순의 심장을 찌르는 말이 있었다. “천의인 인의식 만사지 식일완(天依人 人依食 萬事知 食一碗).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⁵⁾낟알 한 톨이 만들어지는 데 하늘과 땅, 햇빛과 바람, 비와 이슬 등 우주 전체가 있어야 했다. 그러니 낟알과 밥이 곧 우주였다. 우주 천지가 공양으로 서로를 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해월은 식사를 하기 전에 “우주 생명이신 한울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밥을 맛있게 먹고 저도 또한 이웃 생명의 밥이 되겠습니다.”라고 ‘식고(食告)’하고 우주를 맞이하듯 식사를 하였다. 이것은 우주 질서를 꿰뚫은 생명 사상이었다. 우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거대한 생명 공동체였다.
무엇보다 표영삼은 수운 선생이 태어나고 동학을 창도하기까지 돌아다니거나 이사다닌 지역, 해월 선생이 35년 동안 숨어 다닌 전국의 골짜기, 마을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그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표영삼의 설명 속에서 해월의 어록들은 단순히 글자로 남겨진 기록이 아니라, 우리 계절 따라 피고 지는 산과 들의 풀꽃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아 줄 때까지 늘 살아서 숨쉬고 있는 사상이자 철학, 그리고 후천 개벽의 이치임이 분명히 실감되었다.
장일순은 자신의 호를 ‘청강’에서 ‘일속자(一粟子)’로 고쳤다. 그가 ‘조 한 알’로 호를 짓자 사람들은 재미있다며 궁금해 했다.
“나도 사람이라 누가 추어올려 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잖아. 그럴 때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야.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⁶⁾ 사람은 말이지,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해. 한순간이라도 하심(下心)을 놓치면 안 돼. 문을 활짝 열고 바닥 놈들하고 나누고 어울려야, 그래야 개인이고 집단이고 오류가 없는 거라. 해월 선생님도 늘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어. 본인이 직접 일하시면서 말이지.”
장일순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식어 버린 차를 마셨다. 유청은 장일순의 말을 들으면서 한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비로소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유청은 장일순의 한살림 생명운동이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너무나 깨끗한 먹을거리만 강조한 것이 사치 같았다. 그러나 해월의 생명 존중 사상을 듣고 나서야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아는 것이 인간만사와 우주만물의 이치를 제대로 깨닫는 길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밥 한 그릇 안에는 자연의 숨결도 들어 있지만, 인간의 탐욕과 폭력, 위정자의 가치관,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장 선생님, 저도 동학과 해월 선생에 대해 배우고 싶어요.”
“동학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을 소개해 주지. 표영삼 선생님, 내가 말한 적 있지? 수운과 해월 선생을 비롯해 동학에 대해서만 30년 가까이 연구해 오신 분이야.”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유청은 해월 추모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생각했다. 치악고미술동우회 회원들에게 말하면 그들도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원주시민, 강원도민, 아니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청은 해월 피체지에 대한 보도 자료 준비에 들어갔다.
영해 교조신원운동이 끝나고 (1871~)
해월 최시형, 강수, 이필제, 김낙균 등 영해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킨 주모자들은 살아남은 도인들과 함께 영해부에서 용화동 일월산 아래 윗대치를 거쳐 봉화군 춘양면 각화산으로 숨어들었다. 해월 일행은 숲 속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나무가 울창하여 어둡고 음침했다. 여염 사람이 쉽게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 말이 없었다. 신발도 꿰신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피해온 길이다.
수운 최제우 동학 교조가 처형되자, 지배층에서 동학도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영해지역에서도 문중과 관아의 탄압으로 수운이 직접 임명한 영해 초대 접주인 박하선이 죽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죽거나 잡혔다. 그러자 이필제는 영해 관아를 점거하여 스승 최제우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동학도인에 대한 탄압을 못하게 하자고 박하선의 아들 박사헌을 앞세워 영해 동학교도들을 설득했다. 해월에게도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해월은 이필제의 요청을 거절했다.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필제는 영해 지역이 동학 탄압은 물론, 백성에 대한 탄압과 수탈이 가장 심한 지역이니 이곳을 점령하여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또, 한양과 멀리 떨어져 있어 관군이 쉽게 올 수 없고, 동쪽에 위치하여 동학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수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동에서 나서 동학이라 하셨으니, 영해 지역이 우리나라 동쪽인즉, 동쪽에서 난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영해부를 점령하면 조정을 위협하여 수운 선생의 원한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치는 고을의 폐습을 고칠 수 있다고 강변했다.⁷⁾
많은 도인이 이필제를 신인(神人)이라고 여겼다. 관의 부정 ‧ 부패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려 온 백성들은 그가 <정감록>의 진인이기를 바랐다. 이필제는 호랑이처럼 거대한 몸집, 이글이글한 눈빛, 뛰어난 언변 등을 갖고 있어 누가 봐도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등에 일곱 개의 점, 손바닥에 왕(王)자 표시가 있었다. 강수를 비롯한 도인들은 일제히 이필제의 뜻에 동조하여 해월을 설득했다.
결국 해월이 동의하자, 해월의 이름으로 경상 북부는 물론 남부 지역에까지 통문이 보내졌다. 거사는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 관아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500여 명의 도인들이 박사헌의 집이 있는 형제봉 중턱 병풍바위에 모여들었다. 검은 관에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서 형제봉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황혼 무렵 횃불과 죽창을 들고 영해 관아로 내달렸다. 영해읍에 집결해 있던 도인 100여 명이 합류하여 영해 관아를 에워쌌다. 관문을 지키던 관군이 대포를 쏘아 3, 4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성 밖으로 피하려고 우왕좌왕했다. 지휘를 하던 이필제가 소리쳤다.
“이미 시작된 일이다. 겁먹지 말라.”
다시 도인들은 횃불을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관문을 지키던 관졸은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영해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마당에 무릎을 꿇게 했다. 이정이 순순히 항서를 쓰지 않고 욕을 하며 대들었다. 그러자 이필제의 심복 한 명이 단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것에 대해 반발하는 도인들이 많았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지도부는 일차 목적을 이루었으니 각기 해산하자고 결정했다.
다음 날 대부분 도인들이 흩어지고, 100여 명의 지도부는 고을의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나누어 준 다음 각자 흩어졌다. 그중 30여 명의 핵심 지도부는 영양 일월산으로 향했다.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박제관을 토벌대장로 임명하고 동학군 추포에 나섰다. 출동한 관군은 이필제의 발자취를 뒤쫓아 영양 윗대치까지 포위하고 공격했다. 많은 도인이 쫓기는 도중에 죽거나 붙잡혀 물고를 당했다. 끝내는 참형을 당하거나 수십 명이 원지 유배를 가야 했다.
몸을 피한 해월은 산속을 헤매며 통곡했다. 아까운 도인들이 생목숨을 잃고 말았다. 수운 선생이 참형된 후 거의 씨를 말려 사라지려던 동학이 이제 겨우 일어서려는데, 또다시 피바람이 닥친 것이다. 아니, 무지한 자신이 자초한 것이다.
겨우 관군의 추적을 피한 해월과 이필제, 강수는 단양의 정기현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일행은 각기 집을 정하여 흩어졌다. 해월은 정기현의 아우 정석현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관의 지목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해월은 본디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주문을 외는 것으로 밀려오는 자책감을 씻으려 애썼다. 무념무상으로 땅을 갈며 생각은 오직 사방의 산과 그 위로 펼쳐진 하늘 사이를 오가고, 혹은 산에서 나무를 하고 혹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이필제의 강권을 끝내 이겨 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5월에 강수가 해월을 찾아왔다. 해월과 강수는 다시 힘을 내서 장래 도를 회복하기 위해 영월 직동 정진일의 집으로 갔다. 정석현과 한집안인 정진일은 해월과 강수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며 머물게 하였다. 영월 직동리는 주산인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두메산골이다. ‘직동리’, 피처럼 붉은 단풍이 계곡 전체를 물들인다고 이곳 사람들은 핏골이라 불렀다. 죽은 사람의 핏물이 골짜기 물을 붉게 물들여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했다.
해월은 얼마 후 부인 손 씨가 포졸들에게 끌려가 밀양옥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자 최준이와 매부 임익서도 죽고 말았다. 해월은 자신 때문에 고통당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쳤다. 넷이나 되는 딸들은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부인과 딸들을 구하러 가고 싶으나, 막막할 따름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거사에 참여했던 600여 명 동학도인 중 100여 명이 죽고 300여 명이 유배를 갔다. 해월은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목숨들이 꺾였구나. 한 번의 무지한 선택이 이렇게 큰 고통과 회한을 남길 줄은 몰랐다.
해월은 정진일 집에 머물며, 주인집과 이웃집의 막일을 거들며 살았다. 마당도 쓸고, 돼지 먹이도 주며, 퇴비도 날랐다. 그리고 틈만 나면 새끼를 꼬았다. 강수는 근처에 살면서 핏골 일대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어느 날 해월과 강수가 저녁을 먹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웬 사람이 사립 밖에서 집안을 기웃거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경계하며 강수가 일어났다.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훤칠한 사내는 소탈해 보였다.
“저는 박용걸(朴龍傑)이란 사람입니다. 여기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막골이란 외진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긴장한 강수는 계속 물었다.
“예, 저는 일 보러 직동에 자주 나옵니다. 그때마다 두 분 어르신이 보통 분들이 아님을 짐작했습니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데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부터 두 분을 찾아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오게 됐습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깊은 산골에 들어온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지요. 저는 강 처사, 이분은 최 처사라고만 해 두지요.”
강수는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누군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는 점 이해합니다. 깊은 속내야 말씀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와 주시면 성심껏 돕겠습니다. 저는 학식이 부족하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둡지 않은 편이라 제 나름으로 사람 보는 안목은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해월은 강수가 낯선 이를 대하여 지혜롭게 처신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였다. 관의 지목이 서슬 퍼런 지금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의 생활도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마감해야 했다. 8월 초순, 인근에 머물러 살던 영양 접주 황재민이 해월을 황급히 찾았다. 이필제가 정기현 등과 무리를 다시 모아 문경의 무기고를 급습하였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정기현이 잡혔다면, 이곳도 무사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월, 강수, 전성문은 급히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낮에는 설익은 산앵두나 청미래 열매를 따 먹거나 헛개나무열매를 훑어서 씹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시금털털한 개복숭아 열매를 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먹을 것이 없어 물로 허기를 달랬다. 밤에는 큰 바위틈 동굴에 의지하여 잠을 청하며 아침을 맞고 저녁을 보내기를 몇 날 며칠. 추위와 굶주림이 극에 달하였다.
강수는 더 이상 산속에 머물다가는 굶주린 채 산짐승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리라 여기며, 인가를 찾아 내려가자고 해월에게 말했다.
“또다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오.”
“얼마 전 우리를 찾아왔던 박용걸이 기억 나십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돕겠다고 했습니다. 막골로 가십시다.”
“여기가 안전하지 못하다면, 그곳인들 안전하겠소?”
“그래도 그곳은 더 외진 마을이니 여기보다 나을 것입니다. 일단 박용걸 집으로 가서 바깥 동향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산속으로 숨어들어 막골로 향했다.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며 눈짐작으로 직동리 안쪽의 막골에 당도한 것은 이미 사방이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등불 빛이 정겨웠다. 강원도에는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그나마 안심이었다. 주인 여자가 나왔다. 그 집이 바로 박용걸 집이었다.
박용걸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강수는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동학에 무단히 연루되어 쫓기고 있다고 반쯤은 감추고 말했다. 박용걸은 내막을 더 물어 보지도 않고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해월 일행은 고마워하며 바깥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박용걸에게 부탁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바깥 사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은 고단한 몸을 좀 쉬십시오.”
해월은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고요한 산골의 밤, 귀뚜라미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몸을 뒤척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멀리서 수탉 우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벌써 새벽이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간 박용걸이 정오가 넘어서 돌아왔다. 이필제가 일으킨 문경 사변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전해 주었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포졸들이 영월 산골 길목마다 초막까지 짓고 지키고 서서 일일이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머물던 정진일 집도 난리가 났더군요. 재산은 다 빼앗기고, 그 아내는 잡혀갔답니다. 그곳에서 하루라도 더 지체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모두 긴장해서 박용걸의 설명을 듣고만 있었다.
“포졸들이 직동까지 왔다면 이곳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떠납시다.”
박용걸이 하루쯤 더 머물기를 간청했으나 해월은 출발하자며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해월, 자살을 시도하다
음력 9월 초 태백 산중에는 단풍이 한창이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낙엽송이며, 참나무가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졌다. 벌써 떨어진 진갈색 나뭇잎은 산길마다 수북했다. 밟을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낙엽 소리는 마치 말을 거는 듯도 하고, 해월의 마음을 알고 함께 울어 주는 듯하였다. 좁은 산길로 오르고, 골짜기 암벽을 타면서 다시 태백산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해월 일행은 수운 선생의 유족이 살고 있는 영월 소밀원 근처에 당도하였다. 황재민을 산에 머물게 하고 해월과 강수는 약초꾼처럼 약초 담는 바구니를 메고 찾아갔다. 마침 수운의 부인인 박 씨와 세정, 세청 형제가 있었다. 이들이 들어서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이필제가 다시 난을 일으켜서 잠시 피하려고 왔습니다.”
강수가 사정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우리는 지금 동생 혼인 때문에 양양에 갈 예정입니다. 군식구를 거둘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세청이 매정하게 거절했다.
“외려 잘되었네! 선생님이 말고삐를 잡고, 내가 함을 지고 감세. 그러면 누가 의심하겠는가?”
세정이는 그도 좋은 방도라 여기며 응하였으나, 세청이 워낙 완강하였다.
“안 될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우리가 두 분 때문에 위험해졌습니다. 얼른 속히 떠나 주시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하룻밤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해월이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밥상이 들어왔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장기서 어른이 두 분을 빨리 내보내는 것이 좋다고 해서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지만, 조반 드신 후 떠나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뭐라고? 세상에 이런 무례한 일이 다 있나? 장기서는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렇게 모질게 대한단 말인가?
강수가 밥상을 잡고 던지려고 했다.
“참게나.”
해월이 강수를 붙들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만 동행하면 안 되겠는가?”
해월이 세청에게 물었다.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하고 세청은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해월이 한 숟갈의 밥을 떠서 입안에 넣는데 목이 막혀서 넘어가지 않았다. 강수는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소밀원에서 나와 다시 황재민이 머무는 산속으로 숨어들어 왔다.
9월이라고는 하나 강원도 산간의 밤은 어느새 겨울이었다. 큰 바위 틈새 바위굴에 의지하여 지내기로 하고 굵직한 나뭇가지들을 주워다가 바위 주변을 감싸듯 땅에 박았다. 억새꽃 줄기를 끊어다가 칡넝쿨로 이엉을 엮어 울타리 삼아 말뚝에 둘러쳤다. 나뭇가지들을 칡 줄기로 발을 엮어 지붕도 덮었다. 벽이나 지붕 공간마다 풀들을 듬뿍 쑤셔 넣어 바람이 새어들지 않게 했다. 바닥에는 낙엽을 두툼하게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안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훨씬 아늑해졌다. 찬바람과 서리를 피할 수 있는 키 작은 초막 한 채를 지은 것이다.
계속되는 굶주림으로 그들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산속에는 도토리, 밤, 더덕 뿌리, 칡 뿌리 외에는 먹을거리가 없었다. 도토리 알맹이를 깨물면 떨떠름하고 쓴맛이 났지만, 먹고 난 혀끝에는 단맛의 여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것도 많지 않아서 하루 종일 산을 뒤져야 했다.
해월은 초막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지극한 기운이시여, 지금 여기 저와 함께하시는 숨결이시여, 바라건대 저에게 내리소서. 정성으로 마음에 모시오니, 바깥의 한울님과 소통하여 일치하소서. 순간마다 잊지 않고 있으니 저절로 한울님의 덕을 실천하게 하소서.’ 해월은 숨결을 들여다보았다. 들고 나는 숨결에 자신의 생명이 얹혀 있었다. 생명은 들숨과 날숨의 끊임없는 소통과 조화 속에 있었다. 순간마다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숨결에는 네 것 내 것이 없었다. 모든 생명이 나눠 갖는 우주의 샘물이었다. 그러다 언뜻 창과 칼에 피 흘리며 쓰러져 간 수많은 도인의 모습이 보였다.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에 통증이 일어났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한울님, 스승님. 앞길을 열어 주소서. 깜깜한 길을 헤매는 저를 인도하소서.’
해월은 간절하게 심고(心告)했다. 칠흑의 어둠 너머에서 좀처럼 빛이 비춰오지 않았다.
산속에 들어온 지 1주일이 지나자, 황재민이 견디다 못해 해월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 먹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약간의 소금과 장만 남았습니다.”
“…….”
초췌하게 여윈 황재민을 보고 해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배가 고플 때마다 소금 한 알 입에 넣고 침으로 녹이며 배고픔의 통증을 견뎠다. 황재민은 무슨 말을 더 할 듯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한 움큼의 소금도, 몇 숟가락의 장마저도 떨어졌다. 해월은 앞날이 깜깜하게 어두워짐을 느꼈다. 이제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13일째 되던 날 황재민은 영남 지방으로 간다며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해월에게 굶주림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등바등 목숨을 지키려고 구차하게 피해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위태롭게 하는 자신의 처지였다. 자신 때문에 죽은 수많은 도인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올 때도 끝내 살아남고자 했던 것은, 수운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고비원주(高飛遠走)의 가르침, 높이 뜻을 펼치고 멀리까지 동학의 가르침을 펴야 한다는 말씀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생각하면 함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스승님은 내 어떤 면을 보고 그 크나큰 일을 당부하신 것인가? 이제는 내려 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해월은 강수와 더불어 선바위산으로 올라왔다. 산 중턱에 바위가 쇠뿔처럼 솟아 있다 해서 사람들은 선바위라고 불렀다. 선바위는 사면이 수직 절벽이었다. 산길은 절벽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었다. 위험하게 급경사로 난 옆길을 지나 더 올라가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바위가 나왔다.
해월은 깎아지른 절벽 끝으로 다가섰다. 언뜻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앉아 있던 수운이 보였다.
고비원주, 그 말씀은 멀리멀리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도 되었다. ‘스승님, 이제는 더 날 곳도 뛸 곳도 없습니다.’⁸⁾
해월의 몸이 벼랑 쪽으로 기우뚱했다. 옆에 있던 강수가 해월을 덮치듯 붙들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강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가까스로 해월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해월이 몸부림을 쳤다. 강수는 온몸으로 해월을 부둥켜안으며 울부짖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지금까지 잘 견뎌 오셨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네. 스승님도 더 이상 가르침을 들려 주시지 않아. 이제 내 운은 다한 것일세.
해월이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 많은 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네. 그 바람에 우리 도가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어.”
“그것이 어찌 선생님 탓이겠습니까? 제가 선생님을 이필제에게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이필제의 생각이 그처럼 짧은 데서 끝날 줄은 그때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언변에 속아 마음이 어두워진 제 탓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직 저를 믿고 허락하신 게 아닙니까?”
“결국 책임(責任)은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있지 않겠는가, 기도를 할 수가 없네. 한울님이, 스승님이 기도에 감응하지 않는 듯하이….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내 죄가 한울님을 돌아서게 하였음이야.”
해월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큰 고통을 참고 있는 줄 몰랐다. 강수는 자신의 둔함을 자책하며 그저 해월을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었다.
강수로서도 감추어 온 속생각이 있었다. 강수는 한때 이필제가 수운을 이을 후계자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점점 그의 달변에 매료되었다. 이필제는 사서삼경에 능하였고, 동학의 교리에도 막힘이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해월보다 이필제가 후계자로 더 적임자라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해월이 옳았다. 자신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시면 수운 스승님의 도맥도 끊어지고 맙니다. 뉘라서 선생님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도를 살리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지켜낼 분은 선생님뿐입니다.”
최경상, 도를 닦다
해월은 통곡했다. 강수도 따라 울었다. 해월은 이 목숨을 오직 도를 위하여 쓰겠노라 다짐하였다. 강수도 남은 목숨을 해월을 위하여 쓰겠다고 결심하였다.
해월은 이윽고 울음을 멈추었다. 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툭 트이며 기운이 맑아졌다.
맑고 차가운 산바람을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높은 태백산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굽이굽이 능선의 이쪽과 저쪽은 양지와 음지가 섞여 있었다. 빛과 그늘은 둘이 아니었다. 산봉우리들을 그윽이 바라보니 부드러운 흙 가슴으로 뼈들을 감싸고 있었다. 산봉우리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건 없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았다. 가파른 벼랑에 군락을 이루며 서 있는 소나무들이며 회양목들이 거친 바람에도 꿋꿋하게 견디고 있었다. 바람 불면 허리를 숙였다가 지나가면 금세 허리 펴고 햇빛을 머금었다. 자기 자리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해월은 바위 위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강수도 그 곁에 앉았다. 주문 암송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내 이름은 경상(崔慶翔)이었다. 어머니의 친가인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나 이듬해에 고향인 영일군 신광면 터일로 와 그곳에서 자랐다. 내가 다섯 살 때, 웬일인지 아버지가 밖에 나가 놀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동네 어귀 타작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집쪽에서 오며 ‘너 어매가 애 낳는단다.’고 하는 소리에 집으로 달려갔다. 마당에 들어서자 방안에서 어머니의 “아~악 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무슨 일인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관심도 없이 왔다 갔다 서성거리고 있고, 이웃집 아주머니도 웬일인지 희색을 띠고 분주히 방을 들낙거리는 게 더 서러웠다. 얼마가 지났을까, 방에서 아주머니가 붉은 갈색을 띤 아기를 안고 나와 ‘울지 말고 와서 봐라. 니 동생이다.’ 했다. 멀찍이 서서 쳐다본 아기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어제 그 징그럽던 살덩이가 고운 아기로 바뀌어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낳고는 산후 조리가 잘못되어 얼마 후 돌아가셨다. 상여가 마을에서 떠나갈 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아버지와 함께 상여 뒤를 촐랑촐랑 따라갔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모셔 왔다. 정 씨라 했다. 새어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먹을 것을 잘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밥을 주었지만, 안 계시면 새어머니는 친척들을 데려와 자기들끼리만 먹고 말았다. 그때마다 굶주린 배를 안고, 우는 여동생을 달래곤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돌림병에 걸려 온몸에 열꽃이 피더니 얼마 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러자 새어머니도 집을 떠나 버렸다. 겨우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었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여동생과 먼 친척 집에서 머슴살이, 식모살이를 했다. 어린 여동생이 한겨울에도 찬물에 설거지하고 빨래하느라 손등이 터져서 피가 배어난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남몰래 울었다. 친척 집에서도 배가 고픈 것은 여전했다. 사람들은 나를 ‘머슴놈’이라고 부르며 마구 부려 먹고 무시했다. 배고픔이나 추위, 힘든 일은 참을 수 있었으나 머슴놈이라고 비웃는 말은 죽기보다 싫었다.
터일 안쪽 올금당 마을은 닥나무가 잘 자라고, 시냇물이 풍부했다. 그곳에 제지소가 있어서 겨울이면 많은 사람이 일하러 들어왔다. 열일곱 살에 제지소에 들어갔다. 행동거지가 바르고 성실하며 붙임성이 좋다고 사람들이 나를 칭찬했다. 아버지를 닮아 손기술도 뛰어나 종이를 잘 만들었다. 내가 만든 종이의 질이 좋아서 잘 팔렸다. 덕분에 주인의 신임을 얻어 흥해, 영덕, 경주 등 거래처에 한지를 날라다 주는 일을 하면서 인근에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열아홉 살 되던 해 흥해에 사는 과부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일찍 청상과부가 되었지만, 재산이 많다고 혼인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남의 덕에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대신 먼 일가의 중매로 흥해 매곡에 사는 손 씨를 아내로 맞았다. 손 씨는 마음씨가 곱고 심지가 곧아서, 내 마음에 흡족했다.
스물여덟 살 때 경주 신광면 마북동으로 이사했다. 한두 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내게 집강 일을 맡겼다. 정직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관아를 찾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고 울력이나 마을 집집의 대소사를 무난히 처리해 나갔다. 집강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마을 어른들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관아를 출입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관의 비리와 서리들이 부리는 농간을 알게 됐다.
마북동 땅은 척박하여 생산량이 넉넉지 못했다. 서른세 살 때 식구가 늘어나자 검곡으로 이주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기로 했다. 거친 산을 일구며 한 뼘의 땅이나마 내 땅을 갖고 싶었다. 몸은 고단했으나, 방 한쪽에 쌓아 둔 곡식 자루를 보면서 마음은 편안했다.
신유년(1861) 서른다섯 살 때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경주 용담에 신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알려 주었다. 최씨 집안의 먼 친척인 수운 최제우가 도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곧 용담으로 찾아가 동학에 입도했다. 한 달에 두세 번 용담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경주 인근의 상민들은 물론이고 학식이 깊은 유생도 있었고,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다.
8월 중순경이었다. 수운 스승님의 제자들이 천어(天語)를 경험한 이야기들을 했다. 모두 열심히 수행하여 천어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주문을 외웠지만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정성이 부족함을 느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스승님께 절을 올렸다.
“날이 저물었는데 70리 길을 어떻게 가겠느냐?”
수운 스승이 말렸다. 그러나 밤새도록 걸어 금등골 집으로 돌아왔다. 나도 천어를 체험하고 싶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강력한 수련을 실천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내 뜻을 설명했다. 아내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내 뜻에 따라 주었다.
이튿날부터 일도 하지 않고 수련에만 집중했다. 두 달간 밤낮으로 주문을 외웠으나 천어는 들려오지 않았다. 더욱 전념하기 위해 멍석을 방문 앞에 쳐서 햇빛을 가렸다. 캄캄한 방에서 온종일 주문만 지극 정성으로 읊었다. 한 달이 또 지났다. 그래도 천어는 들리지 않았다. 정성이 부족한가 싶어 음식을 줄이고 수련에 몰두했다. 다시 스무 날 동안 집중했으나 몸만 수척해졌다.
큰 보람도 없이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멍석을 들치고 밖으로 나오니 보름을 며칠 앞둔 달빛이 환한 한밤중이었다. 한겨울이라고는 하나 군불 땐 방에서 수련에 전념하다 보면 온몸은 땀으로 젖곤 했다. 그날도 계곡으로 내려갔다.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살갗이 찢어지는 듯,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 수련을 하는 동안 뜨거운 기운이 퍼지며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 날도 찬물 속에 들어가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공중에서 엄중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찬물에 갑자기 들어앉는 것은 몸에 해로우니라.”
나는 깜짝 놀랐다. 드디어 나에게도 감응하시는구나! 감격했다. 그런데 한울님 말씀치고는 너무 평범했다.
그 뒤로는 방안에서 수련했다. 밤낮이 없는 어둔 방안에 있어도 마음은 온통 환한 빛 속에 있었다. 세상 살아가는 수많은 이치가 밝게 해득이 되었다. 때로는 무념무상의 시공간에 들어 꼬박 하루를 앉아 있기도 했다. 눈이 녹아 길이 열리자 영덕에서 친구가 기름 두 병을 가져왔다. 그제야 반 종지 기름을 부은 이래로 서너 달이 지났음을 알았다. 영덕의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부터 벅찬 희열이 솟구쳐 올랐다.
해월, 다시 일어서다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다시 용담으로 갔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 스승님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먼 길을 떠나 용담은 인적이 끊겨 있었다. 언제 귀환할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관의 지목이 들끓고, 가정리 일대 최씨 문중과 수운 스승님의 부친인 근암공의 제자들이 수운의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질색을 하는 바람에 기약 없이 용담을 떠난 것이라 했다.
금등골로 돌아온 해월은 다시 일상적인 삶과 수련을 병행하며 공부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7월 어느 날 묵상에 잠겼다가 스승을 생각하자, 경주 서면 박대여(朴大汝) 집이 눈앞에 환히 보였다. 급히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과연 그곳에 수운 스승님이 와 계셨다. 전라도 남원 땅에서 겨울을 지내고 여름이 되어서야 경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내가 여기 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고 찾아왔느냐?”
수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깊은 묵념 중에 스승님을 생각했더니 문득 이곳이 보였습니다.”
나는 스승에게 천어를 들은 것과 등잔 기름이 마르지 않았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대는 큰 조화를 받은 것이니 기뻐할 일일세.”
스승님의 인정을 받으니 내 마음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런데 스승님은 잠시 뭔가를 깊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그대가 들은 천어는 그날 그 시각 내가 남원에서 수덕문(修德文)을 지을 때 읊은 구절일세.”
“예? 하오면….”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면 그때 제가 들은 것은 천어가 아니었습니까?”
스승님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문득 깨달음이 왔다.
‘제발 찬물에 목욕하는 것만은 그만 두세요. 건강 해치십니다.’ 얼음물을 깨고 목욕하는 것을 알고 내게 채근하던 아내의 말이 바로 수운 스승님의 말씀이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님께 크게 절하였다. 스승님은 그 자리에서 공손히 마주 절하여 내 절을 받으셨다.
‘스승님과 한울님이 둘이 아니요, 스승님 말씀이 한울님 말씀과 둘이 아니며, 나와 스승님이 또한 둘이 아닌 것을….’ 천어에 마음을 빼앗겼던 지난날의 장면이 한순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천어에 대해 깨달은 바를 수운 스승님에게 말했다.
수운 스승님은 잠시 묵념을 하다가 말씀하셨다.
“그대의 경지가 한 고비를 넘어섰도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리라. 그대는 영덕과 영해와 내륙 지역을 순회하며 포덕에 힘쓰라.”
친구에게 벼 100석을 빌려 노자로 삼고, 7월 하순부터 포덕에 나섰다. 내가 순회하고 포덕하자 가는 곳마다 도인이 늘어났다.
용담에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차고 넘치자 이번에는 경주 관아에서 스승님을 잡아들였다. 사술로 민심을 현혹한다는 죄목을 붙였다. 최자원과 백사길, 강원보 등이 수많은 도인을 이끌고 와 항의하자, 이레 만에 내보내주었다. 스승님은 한동안 제자들의 왕래를 금하게 하더니 다시 용담을 떠나 흥해 손봉조 가에 처소를 정하였다. 나는 스승님의 명에 따라 용담을 오가며 스승님의 가족들을 보살피는 한편으로 용담으로 찾아오는 도인들의 공부를 돕는 일도 도맡았다.
그해 섣달 그믐께 스승님은 경상도 일대 각 지역을 맡아 도학을 전수하는 접주를 임명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들지 못하였다. 오히려 스승님의 명을 받아 포덕에 힘쓰느라 다른 겨를이 없었다.
계해년(1863) 7월, 스승님은 내게 뜻밖에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이라는 중책을 맡기셨다. 북도중주인의 뜻을 물었어나 훗날 알게 되리라 하시고 연이어, 해월(海月)이라는 호까지 내려 주셨다. 그리고 이제부터 도의 일을 신중히 하고, 더욱 더 스승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라 하셨다.
말씀이 엄하고 예사롭지 않아 그 뜻을 다시 여쭙자 스승님은 노기를 띤 것 같은 얼굴로 묵념에 들었다가, 다시 편안한 얼굴로 돌아와 말씀하셨다.
“경신년(1860) 4월에, 한울님은 나를 만나 성공하였다 하셨네. 나는 그대를 만나 성공하였네. 이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대의 운수일세.”
나는 수운 스승님께 큰절을 올렸다. 그날 스승님은 자리를 함께한 도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앞으로는 누구든 검곡을 거쳐 용담에 찾도록 하라.”
그날 이후 나는 용담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지난 8월, 보름을 앞두고 늦은 밤에 용담에 당도하여 문안을 여쭈었다. 스승님은 좌우를 물리고 나와 독대하여 대좌하였다. 스승님은 심고로써 나와 스승님의 기운이 둘이 아님을 보이시고 스승님의 조화가 나에게 이르렀음을 일러 주신 후에 도운이 모두 나에게 임하였으니 힘써 지켜 나가라 하셨다. 그 시각 이후로 정좌하여 묵상에 잠긴 채 밤을 지새웠다. 나 또한 스승님과 마주 앉아 묵묵히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었다. 신새벽 닭 우는 소리에 문득 스승님의 기척이 있어 눈을 떴다. 스승님은 우리 도가 유불선 세 도를 겸하여 나온 이치를 말씀하시고, 경신년 이후 스승님이 지나온 내력을 낱낱이 말씀해 주셨다. 이미 알고 있던 행적은 물론이고, 누구도 알지 못하던 은적암 이야기며 지극한 한울님의 기운을 받던 정경까지도 일일이 일러 주셨다. 그러는 사이에 훤히 날이 밝아 왔다. 스승님은 책상 아래에서 ‘수심정기(守心正氣)’ 넉 자가 쓰인 종이를 꺼내 전해 주셨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어 ‘수명(受命)’ 두 글자를 써서 주었다. 그 도저한 과정이 모두 나에게는 꿈인 듯 생시인 듯 아득하였다.
그리고 스승님은 다시 한식경에 걸쳐 묵상에 드셨다가 문득 시 한 수를 지어 쓰셨다.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용담수류사해원 검악인재일편심)’
스승님의 말씀이 뒤따랐다.
“이 시는 그대의 장래를 위하여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비결이다. 앞으로 더욱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라. 그대 장래의 일이니 길이 지켜서 바꾸지 마라.”
11월에 스승님은 내게 그동안 필사로만 배포하던 당신의 글들을 인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그 글들을 필요로 하는 이도 많아졌거니와 필사하는 사이에 빠진 글자도 생기고 혹 잘못된 글자도 섞이게 되어 수운 스승의 본뜻이 잘못 전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염려하던 스승님은 경전을 보급하도록 당부했다. 나는 몇 명의 도인들과 의논하여 판각할 일정을 잡기로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용담정에서 뜻밖에도 수운 스승이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경전 간행도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스승님은 한양으로 압송되다가 철종 잉금이 승하하자 다시 대구의 경상 감영에 갇혔다. 변복을 하고 겨우 스승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내가 감옥 포졸로 변장한 뒤 찾아가니 스승 혼자 독방에 갇혀 있었다. 희미한 등잔 불빛 속에 스승님은 온몸이 피범벅으로 얼룩졌지만,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를 알아본 스승님에게 말없이 목례하였다. 스승님은 담뱃대를 내밀었다. 옥 밖에서 나와 열어 보니 ‘등명수상무혐극 주사고형역유여(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시 한 구와 ‘고비원주(高飛遠走)’라고 써진 종이쪽지가 나왔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북쪽 일월산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원통하게도 수운 스승님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속된 관의 지목 때문에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수운 스승님의 가족을 보살폈다. 그러면서 동학을 재건해 나갔다. 그러다 이필제가 스승님의 신원을 위한다며 거사를 도모하여 아들과 매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도인이 죽었다. 그리고 부인 손 씨가 관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고 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흩어진 도인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가슴을 졸이고 있을까? 가족과 도인들에게 생각이 미치니 가슴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수운 스승은, 도의 앞날이 이처럼 험난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나에게 도통을 전수한 것일까?
눈을 감고 떠올려 보는 지난 40여 년이 한순간 같았다. 앞으로의 삶 또한 한순간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루를 10년, 100년처럼 살 수는 없을까? 수운 스승님은 도의 깨우침으로 후천개벽 5만년을 준비했다. 스승님은 도를 깨우친 뒤 4년 만에 돌아가셨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순간마다 도인으로, 한울님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지몽매하게 사느냐, 깨달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었다. 더는 두렵지 않았다. 수염을 흔드는 바람이 한울님의 입김이요 생명 기운이었다. 바람은 우주 허공의 모든 생명을 쓰다듬다가 자신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들숨과 날숨이 파도처럼 경계 없이 안팎을 넘나들었다. 어느 순간 몸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는 존재만이 남았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이곳과 저곳, 너와 나의 경계도 사라졌다. 햇빛처럼 텅 빈 자유, 환한 기쁨만 가득 찼다. 주변 풍광이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변해 선명했다.
해월이 움직이는 기척에 강수는 눈을 떴다. 옆에 있는 해월을 바라보니, 눈빛이 달라져 보였다. 눈빛이 또렷하고 고요해졌다. 두려움이나 슬픈 빛은 보이지 않았다. 호수 속인 듯 평온하고 깊었다. 강수의 마음속에 한 차례 전율이 일었다. 강수 마음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차분해졌다.
“가세!”
해월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목소리가 힘 있고 밝았다.
“예?”
“박용걸 집으로 가세나.”
해월이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박용걸 집으로요?”
“그렇다네. 박용걸 집으로 가서 일어날 궁리를 해 보세나.”
해월이 앞장서서 걸었다.
“선생님!”
강수는 자신도 모르게 해월을 불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절했다.
“앞으로 선생님을 제 형님으로 모시고 언제든지 따라다니며 돕겠습니다.”
“어서 일어나게나. 고맙네. 나도 강 접장을 동생으로 여기고 의지하겠네. 우리 함께 동학을 되살리세나.”
해월이 다가와 강수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영월로 돌아가다
“주인장, 안에 계십니까? 계십니까?”
한밤중 외딴 산골 집 밖에서 소리 죽여 부르는 소리에 장봉애(張奉愛)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여보, 누가 왔어요. 어서 일어나시오.”
남편 박용걸을 깨웠다. 박용걸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가더니 인사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장봉애는 재빨리 옷을 갖춰 입었다. 이불 갤 틈도 없이 손님 두 사람을 방 안으로 데려왔다. 보름 전인가 들렀던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볼은 홀쭉해지고 광대뼈만 튀어나왔다. 그러나 쑥 들어간 두 눈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품어져 나왔다.
해월과 강수의 무명 저고리와 바지가 얇아서 몹시 추워 보였다. 그동안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상투는 헝클어졌고, 옷은 찌든 때에 절어 있는데다가 군데군데 찢어져 살갗이 드러나 보이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밤늦게 찾아와서 실례합니다.”
키가 크고 마른 강수가 들어오며 인사말을 했다. 이마가 넓고 수염이 텁수룩한 해월도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이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박용걸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이부자리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해월과 강수에게 큰절을 올리려고 하자 두 사람도 무릎을 꿇고 맞절을 했다.
“방 안에 들어오니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어 비로소 살 것 같습니다.”
강수가 활발하게 말하자, 해월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등잔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몹시 지치고 허기져 보였다. 장봉애는 급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먹고 남은 강냉이죽이나마 챙겨서 상을 차렸다.
“늦은 밤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한데, 이렇게 식사까지 대접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두레상 앞에서 식고를 드린 다음 먹기 시작했다.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해월이 고개 숙이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그동안 어디에서 지내다 이제야 오셨습니까?”
박용걸은 두 사람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숭늉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태백산 함백산 깊은 산중을 헤매다 왔습니다.”
강수가 14일간 산속에서 지낸 이야기를 간추려 말해 주었다. 9월 밤은 쌀쌀했다. 그런데 이불도 집도 없이 산속에서 10여 일을 지냈다니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긴 셈이라고 장봉애는 생각했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모여 부지런히 일하고 세 끼 굶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이번 산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삶도 쉽지 않습니다.”
박용걸은 지난 삶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곳 형편은 어떻습니까?”
해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의 감시와 탄압이 조금 느슨해졌습니다. 직동까지 나오던 포졸들이 며칠째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한시름 놓겠습니다.”
강수가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해월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때 강수가 해월을 한번 보더니 박 씨 내외를 한참 쳐다보았다.
“박 처사님, 사실 이분은 동학 북도중주인 해월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이분을 보필하는 강수입니다. 그동안 속여서 죄송합니다. 수운 대선생님이 대구 감영에서 참형 당한 이후로 우리 동학 도인은 늘 관의 지목을 받고 쫓기며 살아왔습니다. 그 뒤로도 이필제가 벌인 영해 교조신원운동이며 문경 사변으로 수많은 우리 도인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속였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할 게 뭐 있겠습니까? 처음 두 분 선생님 뵈올 때 예사 분이 아님을 짐작했습니다. 이제는 어디 가지 마시고 이곳에서 기거하십시오.”
“말씀은 고맙지만, 함께 지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겨울을 나게 되면 나를 아는 동리 사람이 많으니 두 분이 난처해질 것입니다.”
해월이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안방에 있으면 누가 알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계십시오.”
박용걸이 장봉애게 눈을 찡긋했다. 박용걸의 말에 장봉애는 맘 한편으로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밥과 빨래는 누가 다 한담. 끼니마다 무슨 반찬 내놓을까 걱정하는 안사람 생각은 조금도 안 하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온몸에 노독이 깊이 쌓였을 것입니다. 부디 마음 편히 지내면서 풀기 바랍니다.”
“하면….”
“…….”
“친척도 아닌데 안방에 있기가 미안하니 박 처사님과 제가 형제의 의리를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저야, 귀인과 형제가 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말미를 주시지요.”
그렇게 해서 안방을 해월과 강수에게 내주고 장봉애와 박용걸은 건넌방으로 왔다.
“당신은 저 어른들을 우리 집에 머물도록 권하시는데, 집에서 손님 대접할 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군요.”
장봉애가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당신 마음 이해하오. 그러나 두 분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구려. 사지를 넘어 우리 집으로 오신 분들이오. 우리 집에 머물 두 분은 또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소?”
“그걸 저라고 어찌 모르겠어요. 하지만 뜻밖의 손님을 겨우내 모실 생각을 하니 여간 걱정이 아니에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궁지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도우라 하였소. 그래서 당신도 나와 만나지 않았소?”
갑자기 장봉애는 지난날이 떠오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늘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하는 당신과 부모님 뜻을 생각한다면 어려움을 이겨 내야지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고맙소. 훌륭한 사람을 모신다는 것은 기쁜 일이오.”
박용걸은 장봉애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남대천 물고기의 주인
장봉애는 양양 오대산 자락에서 부모님을 비롯하여 일곱 형제자매와 함께 살았다. 그곳의 물은 오대산 가마소 계곡과 두로봉에서 발원하여 법수치리 계곡, 남대천을 지나 동해안으로 흘러갔다. 양양 사람들은 남대천을 모천, 즉 어머니 강으로 불렀다. 황어, 은어, 연어 떼가 시기별로 산란하기 위해 바다에서 돌아오는 풍족한 강이었다. 그러나 강에 고기가 많아도 그녀 가족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남대천을 비롯하여 양양에 있는 하천들은 다 관아에서 관리하여 물고기도 마음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산간 지방처럼 풀뿌리를 캐고, 한 뙈기 밭농사에 온 가족이 매달려 살았다.
그녀는 장녀로 태어났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들 때문에 어머니 젖은 늘 말라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린 동생을 먹일 수 있도록 생쌀을 씹으라고 했다. 쌀을 가루가 되도록 씹어 뱉어서 끓인 죽이 암죽이었다. 한번은 쌀이 정말 먹고 싶어 꿀꺽 삼키다가 들켜, 부지깽이로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았다. 어른들은 쌀을 못 먹어도 젖먹이 동생들은 암죽을 먹고 자랐다. 그녀는 그 많은 동생을 업어 키웠다. 어머니는 집안 식구들 먹을거리를 대느라 늘 밭 매고, 채소와 곡식을 가꾸느라 바빴다.
어느 해 보릿고개 때였다. 장봉애의 집도 먹을 것이 없어 쑥과 옥수수 가루로 쑨 말간 죽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된장국과 멀건 죽밖에 없어 부모와 형제들은 누렇게 부황이 들었다. 부모님이 텃밭을 일구고, 자신은 부지런히 나물을 뜯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와도 허기졌다. 곡기와 기름진 것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풀만 먹었다. 솔잎을 찧어 가루로 만들어 쪄서 먹었더니 시고 떨떠름한 맛이 먹을 만했다. 그것을 먹고 난 동생들은 똥구멍이 막혔다. 아버지가 억지로 막대기 꼬챙이로 파다 똥구멍이 찢어졌다.
그날 밤중 아버지 장필생(張必生)은 지게를 짊어지고 나왔다. 어둑한 길을 한참 걸어 남대천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시린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날씨도 추웠지만, 장 씨 몸이 유난히 더 떨린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보릿고개 때는 황어가 돌아왔다. 알을 낳기 위해 강을 오르는 황어의 습성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낮에 준비해 온 대나무 살을 굽이도는 여울목에 쳤다. 하류 방향에 살을 엮어서 치면 한번 들어온 물고기들은 빠른 물살에 다시 빠져나오지 못했다.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갔다. 다른 때는 집 구들장에 등만 댔다 하면 아침이 왔는데, 그날 밤에는 시간이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았다. 장 씨는 시린 손을 비벼대며 추위 속에 서너 시간을 왔다 갔다 했다. 어느새 새벽이 오려는지 주변의 윤곽이 희뿌옇게 잡혀 왔다. 장 씨가 댓살을 살펴보니 황어와 쏘가리 등 열대여섯 마리가 펄떡거리며 물살을 튕겼다. 그의 심장은 벌떡벌떡 뛰었다. 장 씨는 손발 시린 줄도 모르고, 살막이 안에서 피해 다니는 물고기를 두 손으로 잡아 뚜껑 달린 짚 바구니에 담았다. 여남은 마리 정도 넣으니 바구니가 묵직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짚 바구니를 지게에 졌다. 장 씨는 주변을 살피며 부지런히 걸었다. 부리나케 남대천을 벗어나 법수치리 계곡에서 가마소 계곡으로 난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건너편에서 포졸 두 명이 오고 있었다. ‘아차!’ 그는 어디 숨을 곳이라도 없나 둘러보았으나 위아래가 다 절벽으로 막혀 있어 피할 곳이 없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 씨는 아랫배에 힘을 넣고 태연하게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에서 두 포졸과 만났다. 장 씨는 그들에게 거친 숨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천천히 숨을 쉬었다.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 옆을 지나갔다. 포졸 둘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지 그들이 지나가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들을 막 지나쳐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데, 지나쳤던 포졸 한 명이 그를 불렀다.
“어디 갔다 와?”
배가 나온 포졸이 되돌아보며 물었다.
“예, 제사 지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요.”
그는 속이 뜨끔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아래옷이 다 젖었어?”
배불뚝이 포졸이 그를 유심히 보더니 또 물었다.
“오다가 그만 강에 빠졌습니다.”
할 말이 탁 막혀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바로 걸렸구나 싶었다.
“강에 빠지면 윗도리도 젖어야지. 이리 와 보게.”
“왜 그럽니까요?”
장 씨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반문했다.
“잔말 말고 오라면 어서 와!”
배불뚝이가 반말로 명령했다. 다른 뚱보 포졸도 뭔 일이냐고 물었다.
“몸이 젖어서 곧 얼어 죽게 생겼습니다. 빨리 가야 하는데요.”
장 씨는 사정하듯 말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잠깐 오라는데 잔말이 많군. 아무래도 이상한 걸.”
그들은 다시 장 씨에게 되돌아왔다.
“바구니 안에 있는 것은 뭔가?”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입니다.”
“요즘 춘궁기에 제사 지내는 집도 있나? 그것도 제사 음식을 싸 줄 정도로 부자여? 아무래도 이상한데? 지게에서 내려 열어 봐!”
“안 됩니다.”
장 씨는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걸음을 빨리 옮겼다. 그러자 포졸들이 달려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리저리 피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포졸들이 바구니를 획 낚아챘다. 그 순간 짚 바구니가 땅에 떨어지며 뚜껑이 열려 버렸다. 황어와 쏘가리들이 길바닥에 쏟아지면서 펄떡거렸다. 몇 마리는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 내 거야.”
그는 소리치며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썼다. 그가 엊저녁 내내 추위에 고생하며 잡은 고기들을 다 뺏길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이것 어디서 났어?”
포졸들은 장 씨에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사 지내고 남은 물고기입니다.”
“어디에서 제사 지냈는데?”
“우리 형님 집에서요.”
“형님 집은 어딘데?”
“…….”
장 씨는 그만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 집이 어디야? 이놈 처음부터 수상했어. 이놈을 관아로 끌고 가자.”
“저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장 씨는 보내 달라며 애원했다.
그러나 포졸들은 끈질기게 추궁했다. 장 씨는 순간 굶어서 파리해진 얼굴에 두 눈만 덩그러니 커진 자식들이 눈앞에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식들에게 먹이지 못하고 다 뺏긴 것이 원통했다.
“…….”
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이 물고기들 남대천에서 잡아 왔지? 이거 도둑질해 왔구먼. 남대천 물고기는 다 주인이 있다는 것 몰라? 나랏님 물고기야.”
포졸들은 그를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발로 찼다. 지게는 부서지고 그의 온몸에 멍이 들었다. 장 씨는 포졸들에게 질질 끌려가 양양옥에 갇히고 말았다.
영월에서 49일 기도
다음 날 장봉애 아버지 장필생은 양양옥 관아 뜰에 놓인 형틀에 묶여 곤장 십여 대를 맞고서야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어머니가 면회가 허락되었을 때는 엉덩이 살이 짓물러지고 터져서 양양옥 멍석 바닥에 엎드려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는 옷 한 벌과 돈 30냥을 가져다 속전으로 바쳤다. 어머니가 딸 시집 밑천으로 모아 둔 돈이었다. 그러나 관아에서는 아버지를 내보내지 않았다. 어머니와 그녀는 날마다 감자며 조밥 등을 해 왔다. 잘 먹어야 장독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웃집에서 빌린 돈으로 곡식을 샀다. 집에 있는 그녀 동생들은 굶어서 누리끼리한 얼굴로 물배만 커져 있었다.
“저…. 남편을 언제쯤 내보내 주시는 겁니까?”
장봉애 어머니가 옥을 지키는 포졸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라 물건을 훔친 것은 중죄이기 때문에 쉽게 보내 줄 수가 없다.”
포졸은 냉정했다.
“그래도 언제라는 기한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모른다. 형방 어른에게 물어봐라.”
형방을 찾았더니 형방이 더 기막힌 소리를 했다.
“돈 50냥을 죗값으로 더 내놓으면 풀어 주겠다.”
“이미 30냥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해. 네 남편 죄가 얼마나 무거운 줄 모르느냐?”
형방의 말을 전해들은 장 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우리 집에는 돈 한 푼도 없습니다. 굶어 죽어 가는 자식들 살리려는 것도 죄가 되오? 물고기 몇 마리 잡았다고 그것이 80냥이라니요.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오.”
“죗값을 갚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방이 네 딸을 보고 반한 모양이다. 네 딸을 소실로 보내는 것이 어떠냐?”
형방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살자고 딸을 팔다니요.”
“누가 팔라고 했단 말이냐? 이방의 소실로 가면 귀염받고 호의호식할 것이다.”
“첩으로 가는 신세가 어찌 귀염 받는 것이라 하십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에이, 그놈 고집 한번 세군. 고생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쉽게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다음 날 그녀와 어머니는 아버지만 바라보다 돌아갔다. 이 소문은 이웃 마을까지 퍼졌다. 다행히도 장 씨와 절친한 박 씨가 도움을 주려고 50냥을 들고 찾아왔다. 논 사려고 모아 둔 돈이라고 했다. 장 씨가 양양옥에서 나온 뒤 장봉애는 그 집 둘째 아들과 결혼했다. 그가 바로 박용걸이다. 시집와서 알았다. 시부모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왔다는 것을. 그 뒤로 양양옥 이방이 박용걸에게 자꾸 시비를 걸어 그는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이 깊은 산속 영월로 이사 오고 말았다.
장봉애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동네 우물로 나갔다. 이웃집들은 멀리 띄엄띄엄 있지만, 산골에 동네 우물은 하나였다. 아낙네들은 이곳에 모여서 세상 소식을 주고받았다. 벌써 삼척댁과 인제댁이 물을 긷고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오늘은 웬일로 늦었소? 밤일을 찰떡지게도 했구먼.”
아침부터 농담이었다.
“자기 한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네 그려. 아침부터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가? 서방님 잡아먹고 싶지 않거든 아껴 가면서 써.”
받은 만큼 농담으로 되돌려 주었다.
“양양댁 말하는 품 좀 봐.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겠네 그려. 뭔 일 있소?”
저 여편네의 예민한 직감에 놀라며 장봉애는 입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엊저녁에 온 두 양반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되면 남편이 다칠 수 있었다.
“일은 뭔 일. 아무 일도 없어. 쓸데없이 말 만들지 말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나 아낙네들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게다가 입은 가볍기가 그지없었다.
“양양댁이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구먼, 괜시리 날이 선 것이….”
더 말하다가는 스스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장봉애는 물동이에 물을 채워 똬리 위에 얹고 얼른 들어와 버렸다.
그녀가 부엌에 동이를 내려놓자 남편이 대접에다 막 떠온 물을 담아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안방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한울님께 고하겠습니다. 두 분은 앞에 서 주십시오.”
강수의 말에 해월과 박용걸이 옷을 바르게 하고 의젓하게 섰다.
“한울님, 해월 선생님과 박용걸 처사가 인연이 깊어 형제가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박용걸 처사가 형이 되고, 나이 적은 해월 최경상 선생이 동생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 분은 형제로서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할 것입니다. 오늘의 소중한 인연을 길이 이어 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두 분이 서로 화합하여 큰일 이루는 데 보탬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고합니다.”
해월과 박 씨는 합장하며 절했다. 형제가 된다는 약속으로 청수를 나누어 마셨다.
그날 이후 해월과 강수는 박용걸의 안방에만 머물렀다. 해월은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묵상을 하거나 글을 썼다. 강수는 곧잘 자리에 앉아 수련을 하다가도 수시로 일어나 밖에 귀를 기울였다. 침착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수선스러운가?”
어느날 해월이 한마디 했다.
“태백산에서는 먹고 자는 것이 힘들더니, 지금은 방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듭니다. 불쑥불쑥 가슴이 방망이질하고 바깥세상 소식이 궁금해집니다.”
“마음과 바깥이 둘이 아닐세. 강 접장 마음이 편안하면 바깥세상도 편안해질 것이네.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한울님이 강림하시어 같이 화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네. 그것을 궁을 부도라 하네. 자네의 마음이 그 부도로 가득 차야만 천도가 다시 살아나고 세상의 모든 백성을 건질 수 있게 될 것이네.”
“한울님이 강림하시는 모습?”
“그렇다네. 일찍이 스승님께서 네 몸에 모셨으니 멀리서 찾지 말라 하지 않으셨는가.”
해월의 소리는 저 깊은 동굴에서 울려 나온 듯 시원하면서도 차분하였다.
“저는 아직 도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강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닐세. 누구나 본래 한울님이니,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리고 조용히 기다리면 반드시 감응하실 걸세. ”
“그런데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꾸 잡념이 떠오릅니다.”
“스승님께서도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마음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오직 한울님 마음을 향하여 정진하기만 하면 되네.”
“…….”
“이 방은 나와 자네를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나와 자네를 잡으러 오는 관졸의 추적이 두려운 것이 아닐세. 사나운 범이 무서운 것도 아니요, 벼락이 치는 것이 무서운 것도 아닐세. 오직 두려워할 것은 한울님의 마음일세.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비방하고 원망한다 해도 한울님께서 나의 앞길을 열어 주신다면, 내 어찌 주저함이 있을 것인가. 그러니 자네나 나나 이곳에 있는 동안 오직 힘쓸 것은 우리의 마음 기둥이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튼튼히 하는 일일세. 그것이 수련 아니겠는가?”
“마음 기둥이 무엇입니까?”
“스승님께서도 마음기둥이 튼튼해야 도의 맛을 알게 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또 이어서 오직 한 생각을 한결같이 하여야만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진다 하셨네. 마음기둥이란 우리 몸을 지탱하는 뼈대와 같아서 자신이 애초에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힘이지. 그 기둥이 튼튼하여 흔들림이 없어야 비로소 한울님이 그 마음 먹은 바를 이루도록 도와준다네. 몸을 써서 일하는 이가 잔병치레를 하지 않듯이 마음을 수련하여 튼튼히 해야만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야 한울님이 강림하시는 법이라는 말일세.
해월은 말하기를 마치고 벽을 향해 돌아앉아 묵상에 들었다. 강수도 벽을 향해 자리를 고쳐 앉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풍랑 치듯 어지럽던 마음이 차츰 잦아들고 몸도 반듯하고 조용해졌다.
이날부터 해월과 강수는 먹고 자는 최소한의 시간을 빼고는 수련에 임했다. 49일 수련은 수운이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한 데서 유래했다. 강수는 49일 기도를 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에 더욱 집중하였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희열이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무수한 잘못의 파편들이 회초리가 되어 온몸을 매질하는 고비를 넘어, 다시 한 걸음 오직 주문만을 생각하며 나아갔다.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고, 잡념을 생각하는 마음도, 몸도 사라졌다. 그러므로 희열도 참회의 심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환한 허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49일 기도가 끝났다. 그 새벽에, 해월과 강수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서로를 향하여 크게 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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