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891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우리 의령이와 비슷한 나이 같지요?”
그 순간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렴. 다 잘될 테니까. 어서 일어나야지.”
불안한 동이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일까? 또다시 가만가만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동이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뜨고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어머, 정신이 돌아오나 봐요. 얘야, 정신이 드니?”
동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만히 눈을 뜨니, 처음엔 흐릿하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얘야, 내가 보이느냐?”
낯선 얼굴 둘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봤다.
아! 역시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다. 다정한 눈빛들이지만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역시 꿈이었구나.
동이는 절망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얘야, 일어나서 미음 좀 먹자. 조금만 기운을 차려 보거라.”
동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걸 알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등을 돌렸지만 그들은 깨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동이가 정신을 차린 후 며칠째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어머니와 비슷한 모습의 부인은 동이가 먹을 것을 입에 대지도 않고,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죽은 듯 누워 있는데도 화를 내거나 채근을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미동도 없이 돌아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동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다 스님의 진언 같은 소를를 중얼거리기만 했다.
“..천.. ..화정 영...망 만사.., 시천... 조화정 영세.. 만사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뜻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왠지 낯설지 않은 그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주문 소리. 어디서였더라?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리셨던가? 어머니가 한밤중에 숨죽여 울면서 했던 말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친숙한 그 소리에 동이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 할 기운 없이 누워 있는데도 그 주문소리에 실처럼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기운이 한 곳으로 몰리면서 저절로 등이 움찔거렸다.
동이는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손의 온기와 주문소리에 울컥 눈물이 났다.
“윤 접장께서는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그때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하세요. 안에 병자가 있어요. 다 끝난 일인데 여기까지 따라 오셔서 왜 이리도 소란입니까? 태인 접장들께서 이러시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목소리를 한껏 죽였지만 단호했다. 동이에게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주문을 외우던 주인어른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해월 선생께서 그동안에도 상하 반상 구별이 없이 처리하셨다지만, 윤접장의 호남우도편의장 직을 빼서 좌도편의장 남계천에게 좌우도편의장을 겸하게 하다니요. 남계천이 누굽니까? 백정 출신입니다. 백정이요.”
주인어른의 말을 받아 소리치는 목소리는 화가 잔뜩 난 듯 낯설고 거칠었다.
“김 접장 말이 맞아요. 백번 양보해도 이번 처결은 해월 선생님이 너무 성급하셨어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누군가 말하자 여기저기 동조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돌아가세요. 저는 해월 선생님의 뜻에 따릅니다. 지금 저희 집에 우환이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 제발 돌아가세요. 해월 선생께서도 충분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동학에서 우리가 배우는 법도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하늘입니다. 해월 선생 말씀대로 반상, 적서, 빈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우리 도가 수행하는 거예요. 그러니 모두들 돌아가세요.”
주인어른의 낮지만 단호한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곧 한 무리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도 한참이나 인기척이 없더니 이윽고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방안에서 듣고 있던 부인도 기척 없이 등을 두드리던 손길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밖의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시린 동이의 어깨에 부딪쳤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2015/05/21 - [소설/이장상미] - 비구름을 삼킨 하늘 1장 -- 1891년 공주
'소설 > 이장상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구름을 삼킨 하늘(6회) -1장 1891년 공주(4) (0) | 2015.06.12 |
---|---|
비구름을 삼킨 하늘(5회) - 1장 1891년 공주(3) (0) | 2015.06.05 |
비구름을 삼킨 하늘(3회) - 1장 1891년 공주(1) (0) | 2015.05.21 |
비구름을 삼킨 하늘(2회) - 프롤로그(2) (4) | 2015.05.14 |
비구름을 삼킨 하늘(1회) - 프롤로그 (8) | 2015.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