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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12회)-3장 1892년 공주 3장 1892년 공주 해월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강시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해월을 보았다. 해월 앞에 앉아 있던 서장옥, 서병학, 윤상오는 숨을 죽이고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접장들께서는 법헌의 고민을 모르셔서 이러십니까? 20년 전 이필제와 함께 도모했던 영해 거사의 실패로 조직이 풍비박산이 나고 관의 탄압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에도 법헌께서는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셨고, 사가의 많은 분들이 붙잡혀서 고초를 겪고 또 죽은 이는 얼마입니까? 그 고초 끝에 이제 도의 운수가 안정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도인들이 없는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세는 관에 맞서 싸워서가 아니라 정성 들이고, 공경을 다하였기에 이룩한 것입니다. 이제 세력이 수십 ..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11회)-2장 1892년 공주 2장 1892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의령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후 장을 열어 깊숙이 넣어 두었던 보자기를 꺼냈다. 일 년 전 저수지에 몸을 던졌을 때 구해 준 선비가 벗어 자기 몸에 덮어 주었던 도포였다. 도포의 사연을 알고 배씨 부인이 빨아서 정성껏 손질한 후에 의령에게 전해주며 혹시나 살아가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도포에 담긴 선비의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의령은 도포를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선비를 만났으니 도포는 당연히 선비에게 돌려줘야 했다. 도포를 돌려줄 때는 장날에 옷감을 사서 손수 중치막을 지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과거를 끊어 내리라 생각했다. 의령은 더 이상 지난날의 후회와 고통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며칠 후 장날,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10회)-2장 1892 공주 2장 1892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동이는 배씨 부인이 자신의 혼란스런 마음을 눈치 챌까 겁이 났다. “어머니 집에 오기 전에 죽으려는 저를 살려 주었던 그 선비님이오.” “어머나, 그래? 어디서?” 의령이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저수지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선비에 대해서는 털어놓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듯 배씨 부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어제 감영에서요. 차림새로 보아하니 행세께나 하는 양반인가 봐요.” 기대에 부풀었던 배씨 부인의 얼굴이 양반이라는 말에 한순간 걱정으로 변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덮어 주었던 도포로 지체 높은 양반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금영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는 말에 지레 걱정이 되었다. 현재 금영에서의 잔혹한 수탈과 횡포는 위..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9회)-2장 1892년 공주 2장 1892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그 선비였다. 의령은 억지로 필사하려던 붓을 놓고 자신을 쳐다보던 선비를 떠올리며 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저수지에 빠져 죽으려 들어가기 직전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세차게 뺨을 맞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뺨을 맞고 정신을 차리자 물에 젖은 몸이 추위와 무서움으로 정신없이 떨렸었다. 아픔 때문이었는지 슬픔과 무서움 때문이었는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참아왔던 서러움이 한순간 몰려왔다. 자신의 치부를 몽땅 들켜 버린 사람이라 더욱 더 미웠다. 그러나 미우면서도 고마웠다. 의령은 그동안 몸과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자신을 질책하며 쏘아 보던 선비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라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살았다. 그를 다시 본다..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8회)-2장 1892년 공주 2장 1892년 공주 그 소녀다. 1년 전의 소녀가 분명하다. 유상은 금영(충청감영)의 감사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감영 안에 있는 소녀를 보았다. 포졸들이 저잣거리에서 동학도들로 의심된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잡아왔다는데 소녀는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소녀는 햇볕에 그을렸지만 맑고 투명해 보이는 얼굴에 커다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부릅뜬 채,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지도 않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그저 몇 명의 훌쩍이는 아이들을 모아 안고 조용조용 달래고 있는 당찬 모습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것이 낯설지 않아 유상은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유상은 소녀를 알..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7회) - 1장 1891년 공주(5) 1장 1891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선생님이라 불린 어른의 말씀이 이어졌다. “죽음도 삼라만상의 이치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므로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지만, 아직 어린 의령이를 잃고 저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두 분이야 오죽할까요? 그러나 자신의 핏줄만 소중한 것은 아니지요. 핏줄을 앞세우고 가문만을 내세운 지금의 세상이 어찌 되었습니까? 수운 대선생께서는 집에서 부리는 노비 두 명을 면천하여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한 사람은 여식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동학을 한다는 것이지요. 백정 출신 남계천 대접주나 덕망 있는 윤상오 대접주나 여기 사지에 갔다가 돌아온 이 아이나 모두 같은 하늘님입니다. 만인이 평등한 세상, 이것이 동학을 행하는 마음입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마음을 끌었다. 동이는 ..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6회) -1장 1891년 공주(4) 1장 1891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잠시 후, 부인이 조그만 상을 들고 들어와 동이 곁에 앉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미음 좀 먹자꾸나.” 동이는 그 소리에 주인나리의 손을 놓고 부인을 쳐다봤다. “자아, 어서.” 그녀가 동이의 몸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워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앉혔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에서 멀건 미음을 떠 입으로 후후 불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던 동이는 재촉하듯 숟가락이 다시 다가오자 동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물처럼 묽은 미음을 받아 입에서 굴린 후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입안이 소태처럼 썼다. 그러나 미음을 떠서 입가로 나르는 부지런한 숟가락의 움직임에 달뜬 마음이 묻어나 동이는 차마 물릴 수가 없었다. 미음이..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5회) - 1장 1891년 공주(3) 1장 1891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부인이 이불을 동이의 어깨까지 올려 덮으며 다독였다. “오늘은 뭘 좀 먹었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주인어른의 목소리가 동이의 등 뒤에서 들렸다.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 쉬자 동이의 얼어붙었던 가슴에 조그만 균열이 생겼다. “어서 기운을 차려서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곧 일어날 겁니다.”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말소리에 확신이 묻어났다. “손님들은 가셨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안에서 소란스러웠겠군요. 이 아이가 놀라지 않았는지 걱정이네요.” 둘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해월 선생께 그리 호되게 꾸지람을 들으셨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리니…. 영감이 난처 하셨겠어요.” “태인의 접장들이 저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해월 선..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4회) - 1장 1891년 공주(2) 1장 1891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우리 의령이와 비슷한 나이 같지요?” 그 순간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렴. 다 잘될 테니까. 어서 일어나야지.” 불안한 동이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일까? 또다시 가만가만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동이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뜨고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어머, 정신이 돌아오나 봐요. 얘야, 정신이 드니?” 동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만히 눈을 뜨니, 처음엔 흐릿하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얘야, 내가 보이느냐?” 낯선 얼굴 둘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봤다. 아! 역시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다. 다정한 눈빛들이지만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역시 꿈이었구나. 동이는 절망하며 다시 눈을 감.. 더보기
비구름을 삼킨 하늘(3회) - 1장 1891년 공주(1) 1장 1891년 공주 도망치다시피 상엿집을 뛰쳐나온 동이는 뒤집어쓴 도포를 더욱 몸에 감쌌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죽으려 물속에 들어간 순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약조하라던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선비가 뛰어들었다. 어머니의 바람 때문일까? 동이는 어머니를 생각하자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에 한기를 느꼈다. 그러자 다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포로 아무리 몸을 감싸도 떨림은 멈추지 않고 더욱더 심해졌다. 동이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지도 못하는 목숨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울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힘들단다. 동이야, 동이야. 눈물 젖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