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892년 공주 (전회에 이어서)
동이는 배씨 부인이 자신의 혼란스런 마음을 눈치 챌까 겁이 났다.
“어머니 집에 오기 전에 죽으려는 저를 살려 주었던 그 선비님이오.”
“어머나, 그래? 어디서?”
의령이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저수지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선비에 대해서는 털어놓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듯 배씨 부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어제 감영에서요. 차림새로 보아하니 행세께나 하는 양반인가 봐요.”
기대에 부풀었던 배씨 부인의 얼굴이 양반이라는 말에 한순간 걱정으로 변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덮어 주었던 도포로 지체 높은 양반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금영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는 말에 지레 걱정이 되었다.
현재 금영에서의 잔혹한 수탈과 횡포는 위로는 감사로부터 아래로 향리에까지 그 극심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너를 알아보더냐?”
“그런 눈치였어요.”
“감영 안에서야 아는 척 하지 못했겠구나.”
배씨 부인이 그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제고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그런 곳에서 만나게 되니 당황스러웠지요.”
“이 서방에게 누구인지 알아보라 그럴까?”
배씨 부인이 의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일이 어느 방향으로 번져나갈지 알 수 없는데 섣불리 더 다가갈 수는 벗는 노릇이었다.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겠지요. 서로 반가운 처지도 아니고요. 다만 저야 그 덕분에 아버지 어머니를 만났으니 은인이라면 큰 은인이니 항상 빚을 진 기분이었거든요.”
의령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더 이상 지난 일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야 너 같은 딸을 죽지 않게 살려서 우리에게 보내 주었으니 우리에게도 은인인 거지. 다만 금영을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하니 조심은 해야 할 것 같구나. 혹시 그 일을 빌미로 협박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 말에 의령은 선비의 차가운 눈빛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분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어제 저를 만났을 때 아는 척을 했겠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쩌면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지요. 제가 금영에 또 잡혀가면 모를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난 어제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한다. 이 서방이 빨리 손을 써서 다행이었지 아버지도 안 계신데 어찌 할 뻔 했니.”
배씨 부인이 실없는 소리에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령을 나무랬다. 의령은 그런 어머니의 걱정이 마음에 닿아 가슴이 시려왔다.
“죄송해요. 정말로 조심할게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어요. 필사할 것들도 아직 남았고 저녁도 준비하게요.”
동이가 말하며 안심하라는 듯이 가만히 배씨 부인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고 토닥이는 손이 따스했다.
“그래라. 참, 저녁 먹고 술시(저녁 7시~9시) 전에 모임이 끝나도록 조금 일찍 모이자꾸나. 아이들이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면 좋지 않느니라.”
“그리 전할게요.”
의령은 안방을 나와 잠시 멈춰 서서 집안을 돌아보았다.
의령은 안방을 나와 대청마루에 잠시 멈춰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 사곡면의 신평마을은 금영에서 마곡사로 가는 도중에 있다. 동쪽으로 무성산이, 북쪽으로는 태화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북서쪽의 상원골에서 발원된 마곡천과 유구천이 만나 산은 높고 들은 좁은 산악지대를 이루어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윤상오의 집은 뒤쪽이 바로 숲으로 연결 되어 있어서 1년 전 저수지에서 내려와 쓰러져 있던 동이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동이는 자신이 내려왔던 숲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눈을 돌려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인 윤상오는 동네에서 꽤나 부자였지만 본채는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러나 안채와 떨어진 사랑채는 제법 넓고 방도 여러 개여서 사람들이 항시 북적거렸다.
요즘은 윤상오의 부재로 사랑채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모여 동학 수련과 기도를 하고 강도회를 열었다.
그녀는 사랑채를 가만히 건너다보다 마당으로 내려가 우물속의 두레박을 건져 올려 손을 씻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성연과 몇몇 사람이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연아, 오늘은 사랑채에 손님이 몇 분이나 되더냐?”
“지금 남은 사람들은 다섯 분이라는데요?”
“그럼 함께 온 아이들까지 함께 먹어야 하니 넉넉하게 해야겠다.”
의령은 쌀독으로 가서 합장하여 절한 후 쌀을 한 그릇만큼 덜어 그 옆의 큰 쌀독에 옮겨 담았다. 끼니 때 마다 조금씩 모은 것이 단지 안에 반 이상이 찼다. 윤상오의 집에서는 이렇게 모은 쌀이 독에 가득차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는 비단 윤상오의 집에서 뿐만 아니라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집안의 사정에 따라 독의 크기나 덜어 놓는 곡식의 종류와 양만 다를 뿐 각자의 처지에 맞게 모아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의령은 덜어내고 남은 쌀에 보리와 잡곡이 섞여 있는 단지를 열고 퍼 담았다. 그것을 가지고 우물로 나가 정성껏 쌀을 씻었다.
손바닥에 부딪치는 껄끄러운 곡식 알갱이들이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지금에야 이렇듯 쌀이 섞여 있는 잡곡밥을 배불리 먹는 처지가 되었지만 일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사랑방에는 10여명의 남녀노소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앉아 저마다 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잠시 후 의령과 배씨 부인이 들어와 사람들과 마주 앉아 큰절을 했다. 의령이 자리를 정돈하고 가운데 작은 책상 위에 청수를 봉전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심고를 드렸다. 그리고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는 묵 송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를 외우고 또 외웠다.
의령이 사경을 헤맬 때,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가 된 윤상오와 부인이 머리맡에서 쉼 없이 외워 주던 주문이었다. 한참을 묵 송을 하고 나자 배씨 부인이 필사본 서책을 펼쳤다. 매일 저녁 이어지는 배씨 부인의 동학 이야기는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기 바쁜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오늘은 해월 선생님께서 말씀 전해주신 「내수도문」에 대해 말씀 드리겠어요. 의령이 언문으로 필사해서 나눠 드린 것을 보세요. 모든 이들이 이것을 외우고 외워서 몸에 배게 하면 하늘님의 뜻에 따라 동학을 하는 것이에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종이를 펼치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께 효도를 극진히 하오며,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오며, 내 자식과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오며, 하인을 내 자식과 같이 여기며, 육축이라도 다 아끼고, 나무라도 생 순을 꺾지 말며, 부모님 분노하시거든 성품을 거슬리지 말며 웃고,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하늘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하늘님을 치는 것이오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이를 치면 그 아이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 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 힘쓰옵소서. 이같이 하늘님을 공경하고 효성하오면 하늘님이 좋아하시고 복을 주시나니, 부디 하늘님을 극진히 공경하옵소서.”
배씨 부인은 글을 낭독한 후 말을 멈춘 뒤 가만히 어린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어린아이 네 명이 몸을 꿈지럭거리며 각자의 어미, 아비에게 몸을 기댔다.
“수운 대선생과 해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고 이 하늘님은 양반이나 노비나 서자나 백정이나 아이나 노인이나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모두 똑 같다고 했어요.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인 육축과 생순의 자연까지도 생명으로 아끼고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요. 하물며 여인의 경우는 하늘님을 품고 낳는 하늘님이므로 더욱 더 존귀해요. 사람은 누구나 존귀한 존재이므로 함부로 하지 마시고 하늘님을 모시는 것처럼 서로 보듬어 주시어 평화롭게 사는 것이 바로 우리 동학이 전하는 말이에요”
배씨 부인이 자신의 발밑으로 다가와 치마를 만지작거리는 어린 여자아이를 무릎위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아이들을 때리거나 말로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아이 치는 것이 곧 하늘님을 치는 것이라는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하셔야 해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귀애해 주시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시라는 말은 아니에요. 옳고 그름을 확실히 알게 하시되 그것은 회초리나 말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행동으로 보여주시면 아이들은 부모나 어른들의 올바른 행동을 고대로 배우고 따라합니다."
배씨 부인의 부인수도에 대한 이야기는 반 식경 가량 계속 됐고 바로 문답이 이어졌다. 이윽고 마치는 심고를 하고 서로에게 맞절하는 것을 끝으로 사람들은 각자 집과 처소로 돌아갔다.
성연마저 방으로 먼저 돌아가자 의령이 배씨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오늘도 좋은 말씀이었어요. 언제나 어머니의 말씀은 귀에 쏙쏙 박히고 가슴을 울려요”
의령이 배씨 부인을 동경의 눈으로 쳐다보며 어머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그저 수운 대선생님이나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대신 전해 주는 것뿐인데 뭘. 이일도 이젠 너에게 물려줘야 하니 너도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한다.”
“예? 벌써요? 전 아직 멀었어요, 어머니.”
의령은 배씨 부인의 말에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언젠가는 어머니처럼 사람들에게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에 담긴 말씀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은 한참 지난 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지금은 우리 집에서만 하지만 앞으로는 너도 다른 곳에 가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운 대선생님이나 해월 선생님의 말씀들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그녀는 배씨 부인의 단호한 말에 놀랐지만 담담히 대답했다.
“알겠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할게요. 그래서 말인데요. 동경대전에 있는 말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특히 아녀자나 어린아이들은 알기가 어렵잖아요? 그걸 알기 쉽게 이야기로 만들면 어떨까 그 생각을 했어요.”
의령은 그동안 생각만 했던 일을 배씨 부인에게 조심히 털어 놓았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용담유사야 언문으로 쓰여져 읽기 쉽다지만 그것도 글을 알거나 시간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그런 거지 글을 모르거나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 그걸 재미난 이야기로 풀어서 전해주면 더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겠구나.”
배씨 부인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의령은 기쁘게 웃었다. 잠시 후 저녁 문안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니 고단했는지 성연은 벌써 잠들어 있었다.
의령은 성연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손때가 반들반들하게 묻은 동경대전을 펼쳤지만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선비가 또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기억에서조차 지우고 싶은 끔찍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몸을 유린하고 짓누르던 더러운 손길과 역한 냄새를 풍기던 더운 입김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 숨이 막혔다.
의령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을 지우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괴로워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내왔기에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아주 잊기에는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고통이 너무 컸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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