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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12회)-3장 1892년 공주

31892년 공주

 

 

 

해월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강시원이 걱정스런 얼굴로 해월을 보았다. 해월 앞에 앉아 있던 서장옥, 서병학, 윤상오는 숨을 죽이고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접장들께서는 법헌의 고민을 모르셔서 이러십니까? 20년 전 이필제와 함께 도모했던 영해 거사의 실패로 조직이 풍비박산이 나고 관의 탄압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에도 법헌께서는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셨고, 사가의 많은 분들이 붙잡혀서 고초를 겪고 또 죽은 이는 얼마입니까?

그 고초 끝에 이제 도의 운수가 안정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도인들이 없는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세는 관에 맞서 싸워서가 아니라 정성 들이고, 공경을 다하였기에 이룩한 것입니다. 이제 세력이 수십 배로 커졌다 하나 이럴 때일수록 신중을 기하자는 것입니다.”

해월의 침묵을 기다리다 못해 교조 신원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는 것은 신중히 하자는 뜻으로 강시원이 말했다.

저희가 왜 모르겠습니까? 저희들이야말로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입니다. 강 접장 말대로 지금 우리 동학의 교세가 급증하여 하루에도 수백 명이 입도하고 있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학이 공인된 지가 10년이 넘으면서 조선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도는 수운 대선생의 억울한 죄명도 풀어드리지 못하고 사도로 탄압을 받고 있으니 제자 된 도리로서 이런 불경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지금 당장 도인들이 관의 지목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삶터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가산을 팔아 속전을 내는 것으로 관의 탄압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서장옥이 강시원과 해월을 번갈아 쳐다보며 강한 어조로 밀어부쳤다. 이번에야말로 응낙을 받아 내고야 말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법헌 영해의 경우와 지금은 다릅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동학의 위세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에 봉착 할 것입니다. 게다가 영해 때처럼 무기를 들자는 것도 아니고 합법적으로 소장을 제출하자는 겁니다. 우리의 뜻이 올바른 이상 저들도 끝까지 물리치기만 하겠습니까? 아무튼 스승님의 신원이 이루어지면 됩니다. 법헌, 부디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서병학도  해월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해월을 쳐다보았다. 내처 호남의 신진 도인들의 들끓는 여론을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해월이 그런 사정을 모를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것이 해월이 결단을 내리는데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윤상오는 해월을 쳐다보았다. 해월의 깊은 고뇌가 느껴졌지만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법헌, 얼마 전까지 저희 집에 계셨으니 충청감사 조병식의 횡포를 잘 아실 겁니다. 그자가 동학을 금지한다는 구실로 동학도인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가렴주구를 일삼아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이것뿐입니까? 왜인, 청인, 양인들까지 조선을 한입에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만 합니다. 이제 더는 물러서실 수 없습니다.”

윤상오가 낮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잠시 후 해월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고뇌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월이 한동안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접장들의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말씀대로 며칠 전까지 저도 공주 신평에서 윤 접장 집에 머물고 있다가 조병식의 동학 금령으로 체포령이 떨어져 이곳으로 피신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중해야 합니다. 저는 수운 대선생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해월이 말을 마치자 혹시나 기대했던 세 사람은 동시에 아쉬움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서장옥이 입을 열어 반문하려 하자 해월이 손을 들어 막았다.

이번에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시작해야 합니다. 영해에서와 같은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해월은 들었던 손을 조용히 내려놓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호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동학을 한다는 이유로 도인들과 백성들을 사지로 내 모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안전하고 정당하게 스승님의 신원이 회복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의논하고 준비를 시작해 주십시오.”

해월의 말이 끝나자 방안은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 순간 감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해월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심하고 고민한 끝에 수운 생의 신원을 위한 길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해월의 결단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법헌. 도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지혜로운 처신으로 반드시 수운 대선생님의 신원을 성사시킬 것입니다.”

서장옥이 넙죽 절을 하며 눈물을 삼켰다. 강시원, 서병학, 윤상오도 뒤따라 절을 했다. 해월도 그들과 맞절을 했다.

고개를 드는 모두의 눈은 붉게 상기되고 눈물이 맺혀 있었다.

 

**드디어 해월의 승낙이 떨어져 역사적인 1892년 공주취회를 위한 태동이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의령과 유상에게는 또 어떤 일들이 닥칠지 곧 출간될 책으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연재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