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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8회)-2장 1892년 공주

 

 

 

 

21892년 공주  

 

 

그 소녀다.

1년 전의 소녀가 분명하다.

유상은 금영(충청감영)의 감사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감영 안에 있는 소녀를 보았다.

포졸들이 저잣거리에서 동학도들로 의심된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잡아왔다는데 소녀는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소녀는 햇볕에 그을렸지만 맑고 투명해 보이는 얼굴에 커다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부릅뜬 채,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지도 않았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그저 몇 명의 훌쩍이는 아이들을 모아 안고 조용조용 달래고 있는 당찬 모습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것이 낯설지 않아 유상은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유상은 소녀를 알아보았다.

유상과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했던 소녀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하도 당당해서 오히려 당황한 유상이 얼굴을 돌렸다.

웃다니.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그때도 그렇지만 참 맹랑한 아이로구나.’

유상은 포졸들이 모여 있던 무리들을 감영 안으로 몰아넣는 것을 지켜보다가 옆의 서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디서 뭐 하는 자들을 잡아 온 것이냐?”

, 저자들 말입니까요? 거야 뭐장터 한구석에 모여서 뭔가 꾸미고 있는 듯하여 잡아 왔답니다요.”

아이들과 아녀자도 있는데, 훤한 대낮에 거기다가 사람들도 많은 장터에서 무슨 짓을 꾸몄단 말이냐? 증좌라도 있어서 잡아왔느냐?”

유상은 소녀와 무리들이 사라진 쪽을 쳐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 뭐증좌가 있다기보다는동학도로 의심만 되도 잡아들이라는 감사의 명이 있는지라.”

서리가 유상을 흘낏거리고는 말끝을 흐리며 도망치듯 감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상은 순간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공연히 끼어들었다는 후회가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틀 전이 서영이 죽은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아까 본 소녀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마음의 동요가 더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유상처럼 소녀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동학도로 의심을 받아서 잡혀 왔다니. 십여 년 전 서학도들을 발본색원한다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이제 나라에서 그 활동을 자유로이 하도록 허락하는 마당에 정작 동학도들을 사도로 몰아 마구 잡아들인다면 또다시 피바람이 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유상은 무엇보다 율법을 엄수해야 할 관에서 확실한 증좌도 없이 마구잡이로 백성을 잡아들여 재물을 갈취하는 일이야말로 인심을 흉흉하게 하고, 안팎으로 어려운 나라 형편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유상은 한 발 뒤쯤에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임기준을 불렀다.

기준아, 아까 동학도 무리들 중에 열일고여덟 가량 되어 보이던 여인이 있었지 않았느냐?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그 여인에 대해 은밀히 알아보고 나에게 알려 다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동학도가 맞는지.”

, 도사 나리.”

유상의 말에 기준이 무언가 물으려 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감영 안으로 사라졌다.

감영 안은 보지 않아도 동학도로 의심되어 잡혀 들어온 자들의 가족들이 정해진 돈을 내고 잡힌 가족을 빼내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유상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불쾌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유상은 충청감사에게 인사하려던 생각을 접고 저잣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장날의 저잣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중에는 적지 않은 수의 왜인과 청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유상은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저잣거리 한복판에 길을 잃은 듯 한동안 서 있었다.

 

다음날 기준이 유상을 찾아왔다.

알아냈느냐?”
, 신평에 사는 윤상오라는 자의 여식으로 이름은 윤의령, 나이는 열아홉이라고 하옵니다. 윤상오는 양반은 아니오나 신평에서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자로, 재물도 상당하고 동네에서 인심도 좋고 평판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의령은 친딸이 아니라 일 년 전에 거렁뱅이로 집 앞에 쓰러져 다 죽어가는 것을 살려서 딸로 삼았다고 합니다.”

유상은 기준이 전해 주는 뜻밖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한 재력과 세력을 가진 사람이 사연이 많아 보이는 거렁뱅이를 거두어 여식으로 삼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럴리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텐데.”

, 여러 번 확인해 보았는데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윤상오의 집에서는 노비들도 가족처럼 지낸다고 합니다.”

유상은 기준의 말을 직접 듣고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윤상오에게 다른 자식들은 없다더냐?”
윤상오는 두 번 혼인을 하였는데 첫 번째 혼인하고 이태 후에 아이를 낳다 부인과 아이가 죽고 일 년 후 지금의 배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어릴 때 괴질로 모두 죽었고 딸은 지금의 윤의령이 양녀로 들이기 직전에 죽었답니다. 전라도 부안에 소실이 있는데 그 소생으로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재산은 신평뿐만 아니라 전라도 쪽에도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소실 소생이라도 아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그것도 계집아이를 양녀로 삼았다? 믿기 힘든 일이로군.”

유상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기준을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윤상오의 양녀가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느냐?”

그는 의령이 무슨 일로 저수지에 빠져 죽으려 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준을 쳐다봤다.
전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합니다.”

그래? 그런데 어제는 왜 잡혀왔다고 하더냐?”

그게, 장터에서 아이들에게 서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낮고 깊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로 나긋나긋 책을 읽어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 줬다? 무슨 책인지는 모르고?”

처음에는 잘 살고 있는지 단순한 호기심으로 알아보라 한 것인데 그녀를 알면 알수록 궁금하고 의심스러웠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2015/06/19 - [소설/이장상미] - 비구름을 삼킨 하늘(7회) - 1장 1891년 공주(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