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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2회) - 프롤로그(2)


프롤로그(전회에 이어 계속)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고 고집스러웠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은 작은 점 하나 없이 투명했고 울어서 부은 눈과 선이 고은 콧날은 단아하고 고왔다.

그러나  소녀의 입매는 고집스럽게 꾹 다물어졌으나 가끔씩 초조한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서영이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니 열여섯 일곱 가량 되겠구나.’

이유상은 소녀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정혼자였던 서영을 생각했다.

서영을 떠올리자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는 소녀에게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산목숨을 끊으려 하다니, 도대체...”

유상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 말고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소녀가 고집스럽게 아래쪽으로 내리 깔았던 눈을 들어 이유상을 쏘아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왜 살려줬어요? 누가 살려 달랬나요?”

이유상이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내뱉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왜 살렸느냐고요. 누가 살고 싶다고 했나요? 날 살려주면 어쩔 건데요? 선비님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살렸느냐고요.” 

이유상은 예상치 못한 낮은 목소리에 놀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소녀의 깊고 낮은 목소리가 마치 온 몸에서 나오는 울림으로 전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7월의 한여름 밤이었지만 흠뻑 젖은 몸에 한기가 몰려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상황이면 누구나 나처럼 한다. 알겠느냐? 눈앞에서 죽으려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다고! 그렇게 죽고 싶었으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죽었어야지! 넌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살려 달라고 소리친 거라고!”

이유상은 소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서영의 죽음으로 인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슬픔을 억지로 참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내가 살고 싶었는지 죽고 싶었는지 선비님이 어떻게 알아요?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나 있어요?”

소녀는 갑작스럽게 화를 내며 달려들 듯이 다가오는 이유상을 향해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맞받아 쳤다.

“진짜로 죽고 싶은 것이냐? 정녕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더냐? 그렇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막지 않을 테니 어서 물속으로 기어 들어가거라. 어서!”

 

소녀의 말에 이유상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두 팔을 움켜잡고 거적문 쪽으로 몸을 밀었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의 몸을 으스러지듯 잡고 흔드는 그를 피하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었다.

“아뇨, 죽든지 살든지 그건 내가 선택할 문제예요. 아무도 나에게 살라 말라 할 권리 없다고요! 제가 죽든지 말든지 선비님이 무슨 상관이에요?”

이유상은 소녀의 말에 움켜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소녀의 말이 맞았다. 유상은 소녀가 죽든지 말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져 버렸다.

이유상이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서 있자 소녀가 밖으로 나가려다 멈추고 돌아보았다.


“고맙다고 안 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 원망할 거예요. 그러나 걱정 마세요. 다시 물에 뛰어 들지는 않을 테니까. 어차피 굶어죽거나 매 맞아서 죽거나 할 테지만….”

소녀의 젖은 눈동자가 유상을 노려보며 야무지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는 잊었다는 듯이 몸에 둘렀던 도포를 거칠게 벗어 유상에게 내밀었다.

“됐다.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 혹시 다시 죽으려거든 절대로, 절대로 남의 눈에 띄지 말거라. 알겠느냐?”

이유상은 옷을 내미는 소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소녀가 손끝에 걸린 옷을 어찌할까 망설이다 다시 자신의 몸에 둘러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유상은 소녀가 사라진 뒷모습을 쳐다보며 뒤쫓아 가서 붙잡아야 하나 망설이며 몸을 일으키다 주저 앉았다.

갑자기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에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 서야 사방이 눈에 들어왔다.

 

상엿집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 앉아 있으려니 뒷골이 섬뜩했다.

‘오늘 하루가 왜이리 길었는지. 집으로 가야 하는데...’

이유상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녀가 누워있던 가마니 속으로 몸을 뉘었다. 소녀의 젖은 옷으로 인해 가마니 바닥에 깔려 있던 축축한 냉기가 올라왔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는 사실이 찌르르 살속으로 파고들며 아프게 되살아났다.

‘살고 싶었던 사람은 죽었고 죽고 싶었던 사람은 살았다.’

 

오늘 이유상의 정혼자인 송서영이 죽었다. 이유상과의 혼인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유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서영과는 오래전부터 집안에서 혼인이 정해진 사이였고 이유상에게 그녀는 첫 정인이었다.

집안끼리 친밀히 왕래하는 사이였고 자라면서는 서로에게 사랑이자 그리움이었다.

불과 한 달 후면 혼인하여 서로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승에서는 영영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이유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서영을 위해 슬픔을 내비칠 수도 없었고 하다못해 서영과의 마지막 인사조차 이유상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사랑했던 여인의 마지막조차 함께하지 못하는 양반가의 법도.

이유상의 집안에서는 드러내 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정혼을 했다 하나 집안에 들어 온 후에 죽은 것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안도하는 그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달래려 집을 나와 무심코 걷다 보니 인적 없는 곳까지 오게 돼서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렸다.

 

이유상은 서영이 죽은 마당에 죽고 싶어서 스스로 물에 뛰어든 여자 아이를 살려주고 거기에 힘을 쏟아 버린 자신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는 잠들기 직전 가엾게 작은 몸을 떨던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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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 [소설/이장상미] - 비구름을 삼킨 하늘(2)-프롤로그-이장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