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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장상미

비구름을 삼킨 하늘(1회) - 프롤로그

프롤로그 : 1891년 공주

 

분명 소녀다.

달빛에 비친 창백한 얼굴과 풀린 눈동자, 앞 저고리가 풀어 헤쳐져 봉긋하게 삐져나와 반쯤 들어난 작은 젖가슴, 겉치마 한쪽이 찢어졌는지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걸을 때마다 치마사이로 뽀얀 허벅지가 허옇게 드러났다.

이유상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아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유상이 사대부의 체통도 잊고 흐트러진 소녀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에게 놀라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다 그녀의 발길이 주저 없이 저수지 물속으로 향해 걸어가는 것을 불길하게 지켜봤다. 달빛에 흔들리는 소녀의 그림자가 위태로웠다.

“위험해! 뭐 하는 짓이냐?”

잠시 후 저수지 물속으로 소녀의 발목이 잠겨 들어가자 이유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소녀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이유상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소녀의 작은 몸이 점점 검은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이런 젠장, 위험하다니까. 멈춰라.”

이유상은 다급하게 도포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한여름 밤의 저수지 물은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이유상이 반은 걷고 반은 헤엄치며 소녀에게 다가가 가까스로 팔을 잡은 것은 그녀의 몸이 가슴까지 잠긴 후였다. 이유상에게 붙잡힌 소녀의 팔은 부러질 것처럼 가늘고 여렸다.

“뭐하는 짓이냐. 미쳤으면 곱게 미쳐야지!”

이유상이 소녀의 양쪽 팔을 붙잡고 물 밖으로 끌어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정신 줄을 놓고 힘없이 붙잡혀 있던 팔에 갑자기 힘이 들어간다고 느끼자마자 소녀가 잡힌 팔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손 놓으세요. 그냥 죽게 좀 놔 두라고요.”

이유상이 절규에 놀라 멈칫한 순간 소녀가 악착같이 빼려는 팔을 다시 힘주어 잡고 물 밖으로 끌어냈다.

“일단 나가자.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나가서 죽을지 살지 다시 정하자꾸나.”

그는 화가 치솟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낮게 달래는 목소리로 끌려 나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소녀를 힘으로 둑 위 끌고 올라갔다.

“제발 놔요. 이 손 놓으라고!”

소녀가 악을 쓰고 소리치며 급기야는 몸을 틀어 이유상을 향해 물어뜯을 듯이 달려들었다. 이유상이 그녀의 완강한 기세에 놀라 순간 손을 놓치자 주저 없이 다시 저수지 쪽으로 달려갔다.

이유상은 소녀의 뒷머리를 낚아채며 쓰러뜨리고 온몸으로 짓누르면서 소리쳤다.

“이제 그만 하라고, 정신 좀 차리란 말이다!”

한동안 이유상의 품을 벗어나려 버둥거리던 소녀는 마침내 온몸이 축 늘어지며 맥을 놓았다.

소녀에게서 비릿한 피 냄새와 저수지의 물비린내가 났다. 뒤이어 그녀의 체온과 격한 떨림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이유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급히 끌어 모으며 소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소녀가 옆으로 몸을 돌려 누우며 흐느꼈다.

이유상은 벗어던진 도포를 주워 소녀의 몸에 씌워 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 해라. 그리고 잠시 몸을 말릴 곳을 찾아보자”

이유상이 달래듯 말하면서도 언제 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지 몰라 소녀의 몸을 끌다시피 안고 저수지를 벗어났다. 

저수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상엿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이유상의 품에 안기다시피 끌려가면서도 소녀의 흐느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상엿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생전 처음 들어와 보는 상엿집 안은 커다란 꽃상여가 가운데 놓여 있어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좁고 어두웠다. 이유상은 젖은 몸을 웅크리며 떨고 있는 소녀를 둥그렇게 말아 놓은 가마니 속에 밀어 넣었다.

이유상의 거친 손놀림에 작은 몸이 흔들리면서도 소녀의 눈동자는 허공을 헤맸다. 그 순간 소녀의 조그만 얼굴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