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 3월 12일. 드디어, 때가 왔다. 은월당 마당에는 백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김석진과 영옥이가 충의라고 새겨진 깃발을 대나무에 묶었다. 대나무에 매달려 파란 하늘 속으로 솟구쳐 올라가는 깃발을 바라보다. 얼굴을 돌려 김석진을 향해 영옥은 방긋 웃었고, 김석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바람을 받는 깃발의 힘을 지탱하느라 기우뚱대는 대나무를 김석진이 힘껏 잡아 쥐자 깃발이 하늘에서 휘날리게 힘차게 나부끼었다.
“와-와-!”
함성이 힘차게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보던, 은월이와 영옥이는 가슴이 터지듯 했다. 김석진이 깃발을 오른손으로 잡고, 무리를 향해 큰 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동도 여러분!”
“예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원역으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는 인근 지역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전라도 지역에서까지 수천 명은 족히 될 동학 도인들이 모일 것입니다. 수운 대선생의 신원과 동학에 대한 금압을 풀어 달라는 소장을 제출하고, 임금님에게 상소를 한 것이 몇 차례입니까? 이제 대도소에서는 우리 나라의 형편이 단지 우리 동학만의 문제가 아님을 직시하고, 나라 전체를 바로 잡는 일부터 해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와--!”
“이제 제원역에 가면 우리를 이끌 대접주님들의 명에 따를 것입니다. 하나 오늘 이곳에서 함께 나서는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 흩어지지 말고 가장 앞장서서, 가장 용맹하게 싸우기로 맹세합시다!”
“와--!”
영옥이는 군중 앞에서 일장의 출사표를 막힘없이 풀어내는 김석진을 보며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 아--.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김석진이라니….’
“자, 이제 출발합시다! 다시 개벽의 새 세상으로 출발합시다!”
다시 한번 함성이 울리고, 동학 도인들이 제원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근 고을에 사는 사람이란 사람은 모두 몰려 나와 뜻밖의 구경거리에 놀라워했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주문 소리가 시작되었다. 주문에 발을 맞추고, 발에 주문을 맞춰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는 그것은 맟춤한 행진악이 되어 깃발을 더욱 더 춤추게 만들었다.
“와-와-!”
“둥-둥-둥!”
“보국안민!”
“보국안민!”
여인들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고, 서로 두 팔로 힘껏 안았다. 김석진이 젊은 도인들 앞에 섰다. 영옥이가 아낙들과 함께 수레에 짐을 잔뜩 실고 그 뒤를 따랐다. 은월은 옥녀봉에서 그들이 가는 길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충의의 붉은 기가 힘차게 휘날렸다.
충의 깃발은 곧 제원역(濟原驛)에 당도했다. 흰 두건을 쓰고, 몽둥이를 든 수천의 동학도와 농민들 함성이 제원역에 울려퍼졌다. 역졸 몇 명이 무슨 일인가 싶어 창을 들고 나섰다가 농민군의 기세를 보고는 일찌감치 흩어져 가 버렸다.
바로 그 시각 진산 방축리에서 집결한 수천 명의 동학 농민들이 모여 제원역에 당도하였다. 조재벽 대접주와 최공우 접주가 이끄는 본진이었다. 천둥 같은 함성이 산야를 뒤흔들었다.
“와-와-!”
“보국안민!”
“보국안민!”
제원역에 회집한 각처의 동학도들은 모두들 잃어버린 가족을 만난 사람들처럼 한덩어리로 어울렸다. 앞장선 접주들이나 입도한 지 오래된 동학 도인들은 이미 보은 취회 때에 안면을 튼 사람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이제 첫 대면이지만, 모두는 동학 도인이라는 끈 하나라, 아니 지에는 생사를 같이할 형제 같은 사람으로 서로의 얼굴을 감격스럽게 쳐다보고 통성명이 오갔다.
선봉장 이야면이 준비된 대 위에 올랐다.
이야면의 모습을 본 농민군들이 다시 한 번 함성을 내질렀다. 이야면은 잠시 그 광경을 흐뭇이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드디어, 오늘입니다. 우리가 오랜 시간을 두고 참아왔던 설움과 고통을 풀어 버릴 날이 왔습니다. 우리가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이 저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야면은 미리 준비한 듯 거침없이 기포의 뜻을 밝혀 나갔다. 이야면은 조재벽 접주의 명이라 전제하고, 이제 곧 모든 동학 도인이 일거에 기포하여 탐학한 수령 방백을 징치하고, 나라를 바로 잡을 것이며 이곳 진산에서 그 모범을 보인 후 전라도 모처에서 삼남의 동학 도인들이 일거에 회집하여 서울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야면은 수천의 동학 도인들과 농민군들을 앞장서서 이끌 접주들을 다시 한 번 점고하고, 악덕한 관리배들은 일일이 찾아내어 그 죄상을 묻고 부정한 재산은 압수하여 그 고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며, 일말이라도 사취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어떠한 경우에도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진천군수는 사로잡아야 한다는 군율까지 제시하였다.
“우리는 용담현을 먼저 치고, 이어 금산 관아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시각 아마도 조재벽 접주가 이끄는 도인들이 금산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내 수천 명의 흰 두건을 쓴 사람들은 금산 읍내의 관아로 향했다. 기포가 일어난 제원역은 읍에서 동쪽 10리가 약간 넘는 거리에 있다. 그곳은 제원도 찰방역이다. 제원역은 옛날부터 전라도의 주요 역도(驛道)의 하나였다.
나라에서 정해준 길은 수탈과 지배를 하기 위한 곳이었다. 이 길을 통해 민초들의 피땀으로 만든 공물들을 조세라는 이름으로 한양으로 갔다. 뿐만 아니라 서울 양반 소유의 소작지에서 수확된 곡식도 이 길을 따라 한양로 갔다. 조정에서 정한 길 한복판을 지나 이제 동학 도인들이 관아를 향해 나아간다. 아니 금산을 너머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길에서 저항하는 자와 지배하려는 자들의 한판 싸움이 시작을 알리는 금산과 진산의 기포는 개벽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나름의 계획을 세운 것이 무색하게 용담현은 이미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다. 현아는 텅 비어 있었고, 무기고도 그대로였으나 변변한 쇠붙이는 몇 개 되지도 않는 한심지경이었다. 김석진은 신속하게 고을을 샅샅이 뒤져 뒷단속을 하고, 곧장 금산 읍내로 향하기로 했다.
금산읍은 순식간에 동학군의 의로운 깃발이 휘날렸다. 서쪽을 책임진 박능선 금산 접주와 합세한 무리의 선봉은 김석진이 담당했다. 김석진이 주먹을 치켜들고 외쳤다.
“앞으로!”
영옥은 노상 부엌을 벌릴 차비를 갖추어 놓고 금산읍으로 달려갔다. 영옥은 무리로 모여 있던 보부상이 눈에 들어왔다. 동학도들이 관아로 방향으로 빠르게 진격하자, 보부상들은 동학도처럼 행세를 하며, 서리(胥吏)들의 집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영옥은 깜짝 놀라 뛰어갔지만 이미 늦었다. 서리들의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보부상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거리로 뛰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동학비도들이 민가에 불을 냈다! 불을 냈다!”
무리의 보부상들은 동학도인 행세를 하면서, 상인들에게 물건을 빼앗았다. 심지어는 아낙들을 희롱까지 했다. 금산읍내 민심은 술렁였다. 영옥은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다가 땅 바닥에 덥석 주저앉았다.
“이를 어찌할고....”
2015/06/21 - [소설/한박준혜] - 은월이(8회) - 불난 집을 보고도 그냥 못 본 척 하자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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