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더 나은 세상이 온다는 말처럼 힘이 나는 말이 있을까요?”
달포 뒤에 수연이 동학 도인이 되겠다고 백사길을 찾아왔다. 화사하게 핀 봄꽃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는 날 맑은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입도식을 했다. 정갈하고 소박한 입도식이었다. 심고를 올리고 주문을 외우는 중에 정성껏 떠 놓은 청수의 한쪽이 힘 있게 빙글 돌더니 그릇에서 넘쳤다. 수연은 그것이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백사길은 몇 년 전 자신의 입도식이 생각나 수연에게 들려주었다.
백사길은 용담정에서 친구 수암과 입도식을 했다. 다섯 명이 입도하고 물러나온 자리에서 한 마디씩 소감을 말하였다. 수암이 결연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우리 다섯 명은 이제 하늘을 모시고 스승님의 도학을 함께 공부하는 수행의 형제가 되었네. 어두운 세상에서 앞을 모르고 헤매다가 수운 선생님을 만나 이렇게 입도하게 되니, 그 은덕이 무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다짐을 하나 하려고 하네.”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자네들이 먼저 깨달음을 얻도록 늘 염원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는 역할을 할 것이네.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좋은 세상이 더 빨리 오지 않겠는가?”
“그렇겠지.”
“우리와 인연이 되어 동학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먼저 하늘의 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헌신하세.”
모두들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친 김에 옆에 있는 종이를 끌어다가 서약서까지 썼다. 종이 한 쪽에 다짐하는 글을 쓰고 다른 한 쪽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원 바깥에서 햇살모양이 되도록 일자로 각자의 이름을 썼다. 자기가 알게 된 세상이 너무 좋아서 함께 좋은 세상을 알게 하자고 맹세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등세상을 민중들은 받아들였으나 지배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마음을 닦고 비워 하늘을 모시자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자는 것이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세상으로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서는 큰 희생이 필요했다. 권력을 가진 자의 탐욕은 가장 먼저 자기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하여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살피는 마음을 거두어 버렸다.
결국 지배층은 동학에 좌도난정의 벌을 내려 백성들이 그 세계를 알지 못하도록 막았다. 수운은 관군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것을 알았으나 피하지 않았다. 부당한 권력은 거부하였으나 자신이 사는 세계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자기의 죽음을 알고 미리 해월 최시형에게 도를 전하고 멀리 피하라고 일렀다.
한밤중을 틈타 관군들이 용담정으로 쳐들어 온 날 수암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외가의 장례식에 일손을 돕느라 집을 비우고 있었다. 백사길은 비밀리에 몇 자를 써서 사동의 손에 쥐어주며 수암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선생님과 나는 이제 잡혀가서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네. 부디 자네는 몸을 숨기고 멀리 떠나주게. 동학의 불씨를 지키는 것이 자네의 길이네.'
친구와 헤어진 일이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했다. 백사길은 수연에게서 수암의 모습을 떠올렸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연은 이제 막 조선 정부가 금하는 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에는 빛이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찬란한 빛이. 백사길은 수연에게 스승으로부터 배운 동학의 가르침을 전하고 수련 방법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동이네 집에 차린 서당은 제법 학동들로 붐볐다. 백사길은 아이들이 공부할 때 먼저 배운 아이가 나중에 배우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가르치게 했다. 아이들은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하였다. 맨 나중에 글을 배운 아이는 자기가 배운 것을 가르쳐 줄 아이가 언제 오냐며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배움은 이렇게 서로에게 흘러가야 한다. 한 사람만 알아도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배우게 되지 않느냐? 자기가 배우고 익힌 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쳐 주니 열두 명이 고루고루 문리가 트이게 되겠구나. 이 이치를 잘 명심해라. 자기가 배운 것을 이렇게 친구들에게 알게하니 얼마나 좋으냐?”
“네, 좋아요. 가르치는 게 재미있어요.”
“그렇지, 함께 나누니 여러 사람이 즐겁고 좋지 않으냐? 자기가 가진 것을 이렇게 나누어라. 내 것을 나누어 주고 나도 어려울 때 도움도 받고 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이치인 것이야. 열 사람이 먹을 것을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자기 곳간에 쌓아두고 있는 것이 옳으냐? 열 사람이 함께 먹고 두루 도와가며 사는 것이 좋으냐?”
“두루두루 도와가며 사는 것이 좋지요.”
“그래, 그렇게 서로 나누어 먹으면 사람의 정도 함께 나누는 것이 되어 덜 먹어도 훨씬 배가 부르게 된다. 그러니 사람이 나누는 인정이란 것이 바로 요술단지가 아니냐?”
“요술단지? 야, 요술이다 요술. 우리 옛날 얘기 해주세요. 요술얘기요.”
아이들의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밝고 신이 났다. 벌써부터 침을 꿀꺽 삼키며 스물 네 개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백사길을 바라보고 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야 하는 날인가 보았다.
“그럼, 오늘은 백두산 삼형제 이야기를 해주마.”
“예!”
“옛날 백두산 깊은 산속에 큰 인삼밭을 가진 할아버지가 있었어. 그런데 사람들을 실컷 부려먹고는 일한 값을 주지 않았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 노인을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불렀단다.”
“그런 귀신이 있어요?”
“밤중에 무덤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귀신!”
“으아, 무섭다.”
“노인이 일만 부려먹고 돈은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삼밭에서 일하지 않기로 했어. 사람들이 거들어 주지 않아서 구두쇠 노인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지. 인삼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게 되니 그만 망하게 되었지 뭐냐? 그런데 어느 날 튼튼하게 생긴 삼형제가 나타나 인삼밭 일을 하겠다고 나섰어. 마을 사람들이 인삼주인 영감에 대해서 말해주었지만 그 말을 듣고도 일하러 갔지. 인삼밭 노인이 삼형제에게 말했단다. 뭐라고 했을까?”
“돈 안 준다고요.”
“그렇지. 품삯은 주되 자기가 보관할 거라고 했단다.”
“그래서 삼형제는 뭐라고 했어요?”
“대신 조건이 있다고 했어. 일은 밤에만 하고, 일을 몽땅 도맡아서 할 것이며 이 일만 하지 다른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노인은 너무 좋아서 얼른 일을 맡겼단다. 그런데 노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어. 어느 날 아들이 마을에서 놀다가 그만 우물에 빠졌어.”
“에구, 우물에 빠졌대.”
“노인이 도와달라고 소리쳤지만 주변에 있던 셋째는 ‘나는 이 일만 하지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대. 그래서 노인은 첫째와 둘째에게 달려가서 사정사정하여 겨우 건져내기는 했지만 이미 죽은 지가 오래된 후였지.”
“아이, 불쌍하다.”
“다음날 아침 노인이 밖에 나가 보니 무덤이 열두 개나 파여져 있었어.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첫째가 밤에만 일을 하기로 해서 밤새 파다 보니 가족과 친척들 무덤까지 다 팠다며 인삼밭을 무덤구덩이로 만들어 놓았지. 둘째는 관을 수무 개나 사왔어. 노인이 왜냐고 물으니 일을 몽땅 맡기로 약속을 했으니 관을 있는 대로 몽땅 사왔노라고 했다. 화가 난 노인은 관아에 가서 삼형제를 고발했어. 마을 사람이 빨리 도망치라고 일렀지만 청년들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단다. 관군이 잡으려고 하자 삼형제는 산으로 갔어. 관군들이 삼형제를 쫓아갔지만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지. 산봉우리에 가서 삼형제는 커다란 산삼으로 변해 버렸어. 군사들이 이 산삼을 캐려고 하는 순간…….”
“어찌 되었나요?”
“어떻게 되었어요?”
“군사들이 이 산삼을 캐려고 하는 순간……. 산삼은 그만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단다.”
“하하, 요술이다. 요술.”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산삼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면 어느 산으로 가야 할까?”
“백두산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은 어디에 있지?”
“백두산이요.”
“그래, 백두산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뿌리가 되는 제일 큰 산이다. 옛날 우리나라는 백두산의 기운으로 많은 사람이 신선처럼 살았지. 그러나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하늘의 도를 잊고 살아 그 기운은 사라졌단다. 그래도 백두산 속에는 아직도 숨어 사는 도인들이 계신다. 그분들은 세상을 구하려고 마음을 쓰고 있지. 가끔은 세상에 나오지만 우리들은 그분을 몰라본다.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 보기에 초라한 모습으로 다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그분들이 너희 앞에 나타나면 알아볼 수 있겠니?”
“아니요.”
“모르겠어요.”
“남루하고 거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잘 대해 드려야 한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초라한 모습으로 다닌다고 했으니까.”
“예, 알았어요.”
동이는 언젠가는 백두산에 가서 스승이 이야기하는 도인을 꼭 만나겠다고 생각했다. 백사길은 그날따라 아이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것이 백사길이 아이들에게 해준 마지막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백사길을 볼 수 없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볕이 유난히 좋은 날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온 두 명의 사내들이 다급하게 백사길이 머무는 아전 한상유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한상유가 보니 평소에 친분이 있던 우종수네 하인들이었다.
“아니 자네들이 여기에 무슨 일인가?”
“여기 주인마님의 편지를 들고 왔습니다. 노마님이 위급하시니 의원 어른을 빨리 모시고 오라는데요.”
“어디 편지를 한번 보세.”
모친이 며칠째 앓고 있는데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빨리 와서 병을 보아달라는 우종수의 간절한 편지였다. 건네받은 글을 읽자마자 백사길은 하인이 데리고 온 말을 타고 오십 리 떨어진 초리면으로 달려갔다.
대문 밖에 나와서 초조한 표정으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우종수는 백사길이 도착하자 바로 모친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집안이 온통 노마님의 병환으로 어수선하였다. 우씨의 모친은 워낙 기력이 없는데다가 체한 상태로 제법 시간이 지난지라 위급한 지경이었다. 급히 소상혈을 찔러 피를 빼고 침을 놓기 시작했다. 거의 한식경이 지나서야 노마님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자 모두들 한시름 놓았다며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저의 모친을 이렇게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마음이 좀 놓입니다. 자리를 보아 놓겠습니다. 먼 거리를 급하게 오셨으니 푹 쉬십시오.”
“네, 그리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백사길은 자정이 지나도록 꼼짝도 않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색을 살피느라 건너편에 앉아 있던 주인 우종수에게 부탁을 했다.
“이 밤중에 고생스럽겠지만 열세 명분의 저녁밥을 지어 주면 좋겠습니다.”
우종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누가 지금 여기로 오는가요?”
백사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예, 지금 여기로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밥을 먹지도 못하고 달려들 올 것이니 몹시 시장할 것입니다.”
우종수는 묵은 병치레로 오늘내일하던 모친을 저만치나 살려 놓은 백사길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지는지라 더 묻지도 못하고 부인을 시켜 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부인은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자고 있던 언년이를 깨워 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씨의 부인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손님이 오기에 이 밤중에 열세 명분의 밥상을 준비하라는 걸까?’
자시가 막 지나자 우종수의 집 밖에 포졸들이 도착했다. 한밤중이라 마을 안은 깊은 정적에 쌓여 있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포졸들은 그대로 담을 뛰어 넘었다. 칼을 빼어 든 포졸들은 순식간에 방문을 열어젖히고 죄인을 묶는 붉은 오랏줄을 백사길 앞에 내던지며 뛰어 들었다.
“죄인 백사길은 순순히 오랏줄을 받으라.”
“이 사람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이게 무슨 소란인가! 내가 강도 죄인이나 된단 말인가? 나라 죄인이니 나라의 명령이라고 말하면 조용히 갈 것이 아닌가?”
낮으면서도 단호한 소리에 포교들은 움찔하고 물러서며 붉은 오랏줄을 얼른 걷어 버리고 칼을 내려놓았다.
“저기 문 뒤에 선 포교는 담을 넘다가 발을 다쳤으니 얼른 들어와서 약을 바르라고 하시오.”
문 뒤에서 선 포교가 그때서야 자기 발에 피가 흐르는 것을 알아채고 내려다보았다.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백사길을 바라보았다. 우종수는 마당에 가득 들어찬 포졸들을 보고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저녁밥을 차려 주십시오. 오십 리 길을 급하게 왔으니 시장할 것입니다.”
조선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계속되는 상소에 조정에서는 서양 세력이 조선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세우고 서학 신봉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여 처형했다. 동학도 한울을 믿는 것이니 서학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라며 서학 교도와 동학도에 대한 처벌을 함께 내렸다. 풍천 관아에도 조정의 명이 내려 왔다.
“죄인 백사길을 풍천으로 압송하여 당장 처형하도록 하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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