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겠습니까. 다 이게 지가 무식해, 못나서 이 사단이 벌어진 걸. 저…. 윤지, 그놈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윤지 아버지가 힘없이 얘기했다.
“아니 되네. 내 자식 살리자고 윤지를 왜놈들에게 보낼 순 없네. 절대 안 되네. 칠성이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걸세. 자네는 평생 딸년 팔아먹은 아비가 되는 것이고, 나는 제 자식 살리자고 남의 귀한 딸 죽인 죄인이 되는 것이네. 칠성이와 연지는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겐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네. 지금 이희인 어른과 접장님들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무슨 수가 나올 걸세.”
원씨가 윤지 아비의 팔을 잡고 애걸하듯 말했다. 울상을 짓고 탁배기를 들이키는 윤지 아버지의 탁배기가 사발 밖으로 흘러 넘쳤다.
“올해 오가놈에게서 논을 사고 형편이 나아지면, 봄에 고운 옷 한 벌 지어주고 혼사를 치르려고 했었는디…. 형편 나아지면 윤지도 걱정 없이 시집가 잘 살 것이고…. 다 지 때문입니다. 나가 죄인이요. 어쩌자고 시집갈 딸년을 나 좋자고 끼고 앉아서 이 사단을 벌였는지, 지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애비입니다.”
윤지 아버지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원씨도 목이 메이자, 탁배기를 들이켰다.
‘흐흠.’
이희인이다. 문 밖에서 두 아비의 이야기를 귀동냥한 눈치다.
“어찌 되었습니까, 접장님!”
원씨가 얼른 일어나며 물었다. 이희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방으로 드는 그의 하얀 버선마저 무겁게 보였다.
“상황이 좋지가 않소. 일이 좀 복잡하게 되어서…. 아무래도 왜놈들과 깊숙이 연결이 된 듯하오. 칠성이의 발고가 사실로 밝혀지면, 왜놈들이 직산에서 금광을 찾는 사실이 공론화될 것이고, 그 반대이면 칠성이는 허위사실을 발고한 죄로 중벌을 받게 되는 것이오. 그 오가란 자가 치밀하게 꾸민 계략에 완전히 빠져 버린 듯하오. 직산 황 접장이 알아본 바도 비슷하고. 미안하오. 아직은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했소.”
방안은 무거운 숨소리로 가득 찼다.
열흘이 지났다. 삼거리 윤지네 집 사리문 앞에는 아침나절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날이 찬데도 값비싼 꽃가마를 구경하느라 가마 주위를 빙 둘러쌓다. 붉은색 술로 장식한 꽃가마를 보며 속 모르는 입방아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오가놈은 비단옷을 잘 차려입고 곰방대로 거드름을 피우며 윤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꼭 신부집 상객(上客) 같은 모습이다.
“아버님, 저 길 떠나옵니다. 만수무강하세요.”
윤지가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방안에는 칠성이의 아비와 어미도 들어 있었다.
“두 분도 절 받으세요. 평생 제 시아버지, 시어머니로 생각하고 살겠습니다.”
윤지가 절을 하자, 부부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이것은 칠성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서찰입니다. 나중에 꼭 전해주세요.”
윤지가 서찰을 전하고 마당으로 나오자 마을 사람들은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값비싼 비단 치마저고리에 놀라 입이 벌어졌다. 곱게 분칠한 연지는 고왔다. 생전 처음 꽃단장한 연지다. 붉은 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입은 연지에게 사람들은 연신 곱다, 고와라며 탄성을 질러댔다. 한양 부잣집 젊은 신랑에게 첩실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낸 건, 오가놈이었다.
“내가, 인물을 제대로 봤구만. 이만하면 흡족 하다마다, 암 족하고 말고….”
혼잣말을 하던 오가놈이 가마꾼들에게 출발을 재촉했다. 꽃가마는 제물포로 향했다. 오가놈은 연지 아버지에게 일본인들이 사는 홍예문 근방에서 손꼽히게 큰 집이라고 말했다. 이름도 알려주었으나 연지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시부사와 소이치로(澁澤 莊一郞). 상현이도 멀리서 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아, 칠성이형!’ 상현이는 속으로 부를 뿐 입 밖으로 칠성이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무슨 겨울에 장마도 아니고, 세상이 하수상하니 하늘도 이상해지나?”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밀려왔다. 칠성은 툇마루에 앉아 손을 뻗어 처마 밑으로 손을 내밀어 봤다. 손바닥에 부딪치는 물방울이 무척이나 차갑고 굵어 따끔따끔거렸다.
얼굴에 맞으면 제법 아플 만큼 비는 세차게 퍼부었다. 하늘을 보니 시커멓다. 겨울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이상했지만, 잠시 내릴 비가 아닌듯했다.
“아무래도 다녀와야겠구만.”
칠성이가 갈모와 도롱이를 챙겨 입었다.
“이 날씨에 어디를 가려하느냐?”
칠성 아비와 어미가 의아해 물었다.
“아무래도 목천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날이 이상하니 오늘은 웬만하면 나가지 마시고 집에 계셔요. 냉큼 다녀오겠습니다.”
말수가 부쩍 줄어든 칠성에게 원씨 내외는 더 묻지 않았다.
칠성은 서둘러 상현이네를 찾았다.
“형님, 이 날씨에 목천에는 왜요?”
상현이가 물었다. 꼭 가 봐야 하냐는 말투다. 상현이 옆에는 애들 셋이 나란히 서 있다.
“어서 가세. 가면서 얘기할 테니….”
상현은 칠성을 뒤따라 빗속으로 나섰다.
비는 계속 쏟아졌다. 장대같은 비는 하늘을 뚫고 땅거죽마저 뚫을 기세다. 칠성과 상현은 빨리 걷고 싶었지만 길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질퍽거리는 흙이 자꾸만 발을 잡아당겼다. 한겨울 빗발은 아프기도 했지만, 추위가 더 힘들었다. 두 사내가 목천 주막 근처에 도착할 때 즈음, 둘의 입술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동구를 따라 다시 반식경을 걸으니 마을의 가장 안쪽 김은경의 집에 당도했다.
칠성은 동경대전 간행을 위해 급하게 만든 간행소가 불안했다. 이듬해 봄에 간행 작업이 완성될 것이라 예상하고 지붕을 일 때 서릿발 폭설과 바람 정도만 대비하면 된다고 예상했다. 이렇게 큰비가 쏟아질 줄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김은경의 집에 도착해 보니 일가 모두 처마 밑에 모여 있었다. 근심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원칠성 도인과 훈장이 어찌 오셨소? 그렇지 않아도 비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오.”
김은경이 칠성과 상현을 반갑게 맞았다.
“축대가 걱정돼서 왔습니다. 이 간행소를 지을 때, 이만한 폭우는 예상하지 못했잖습니까. 그때 저도 있었습지요.”
칠성이가 도롱이를 입은 채 처마 밑에서 김은경을 보며 말았다.
“자네도 같은 생각을 했구만. 이렇게 내일까지 비가 쏟아지면 축대가 견디질 못할 것 같네. 아무래도 판각한 것들을 모두 옮겨야 할 듯하네. 불안해서 더 이상 두고 보질 못할 것 같으이. 자네 생각은 어떤가?”
김은경이 각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비가 오늘 그친다 한들, 이렇게 비가 오면 아무래도 판각한 판이 물을 먹게 되고, 그러면 인출 상태가 좋지가 않습니다. 접장님 말씀대로 수를 써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일손이 부족했는데, 이렇게 지원군이 오셨으니 다행입니다.”
각수의 말에 김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이희인 일행도 도착했다. 그의 열두 살짜리 아들도 함께 따랐다.
“이 접장님도 오셨군요?”
김은경의 말에 모두 마당을 보았다. 이희인이 앞서고 뒤에 셋이 따르고 있었다.
“아니, 목천에 사는 우리보다 삼거리 도인들이 먼저 오셨구만. 한 발 늦은겐가?”
이희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김은경 일가와 도인들은 모두 도롱이를 걸쳐 입었다.
종이는 구할 수는 있지만, 판각한 판은 절대 젖어선 아니 되었다. 사내들이 판각판을 가슴팍에 안고 김은경의 별채로 하나씩 옮겼다. 빗물에 마당은 질척거렸고 하얀 버선은 흙바닥과 범벅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겨울비에 사내들의 입술은 퍼렇게 변했다. 삼방 대청에선 사내들이 옮겨온 판각판들을 김은경의 아내와 여자 가솔들이 정성껏 방으로 옮겼다. 사람은 빗물에 젖어도 판각판은 절대 젖어선 아니 되었다.
간행소에 놓여 있던 것들을 모두 옮기니 사랑채가 꽉 찼다. 일을 마치고 도인들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도롱이를 벗고 허리도 폈다. 한겨울 오들오들 떨며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은경의 아내는 화롯불을 가져왔고 삶은 밤을 내왔다. 살짝 데운 약주도 함께였다.
“자, 우리 도인님들 덕에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김은경이 약주를 한잔씩 권했다.
“역시, 추울 땐 데운 약주만한 게 없지요. 몇 잔 더 들이켜야 할 것 같습니다.”
이희인이 연거푸 약주를 마시며 말했다.
칠성이도 잔을 들었다. 연거푸 두어 잔을 마시자 온몸에 돌던 냉기가 좀 가시는 듯 했다.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따뜻한 술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뿌듯한 마음도 퍼져나갔다.
그때였다.
‘우지직’거리는 소리가 빗속을 뚫었다. 임시로 지었던 간행소 가옥 축대 하나가 힘없이 주저앉은 것이다. 그러더니 곧 지붕과 나머지 축대들도 무너져 내렸다. 눈 깜짝 할 사이였다. 모두 놀라 동그란 토끼 눈으로 입만 벌렸다. 놀라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서로를 쳐다볼 뿐 순간 말을 하지 못했다. 숨을 참았던 이들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니, 어찌 어찌….”
김은경도 이희인도 칠성이도 상현이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황망해했다.
“거참, 이 엄동설한 비가 이렇게 거세차게 내릴 줄은 몰랐소.”
이희인이 놀라 말했다.
“도인님들, 그래도 옮긴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황망하지만, 길조입니다. 흉조는 아닙니다.”
칠성이가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 자네 해석이 옳으이. 액땜했다고 생각합시다. 참,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 그려. 허허허….”
김은경이 웃어넘겼다. 모두들 약주 잔을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는 그렇게 그날 밤 자정을 넘어서야 그쳤다. 매서운 추위도 한풀 꺾였다.
<다음회에 계속>
'소설 > 변김경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이 있더냐(12회) - 3장 탄생, 비밀과 기쁨 (0) | 2015.07.28 |
---|---|
꿈이 있더냐(10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0) | 2015.07.14 |
꿈이 있더냐(9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0) | 2015.07.07 |
꿈이 있더냐(8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1) | 2015.06.30 |
꿈이 있더냐(7회)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0) | 2015.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