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모두 모인 것 같습니다.”
김용희가 방안의 사람들을 지긋이 쳐다보고 나직이 말했다. 해가 질 무렵이지만, 초를 켜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방안에는 김용희와 김은경, 김성지, 김화성, 황성도, 이희인 같은 양반 출신 도인들과 원씨 등이 같이 앉아 있다. 인근에서 행세깨나 하는 양반들이었다. 향교나 서원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세도에 따라 앉는 자리까지 정해지는 것이 향교와 서원에서의 양반 세계다. 하지만 김용희의 집에 모인 이들은 둥그렇게 자리를 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을 모아서 ‘심고’.”
김용희의 말에 따라 모두 눈을 감고 양반다리를 한 채 손을 모았다.
“오늘 여기 대선생의 뜻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아직은 대선생의 뜻을 잘 모릅니다. 이 땅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오로지 성리학에만 매달려 왔던 우리입니다. 성인의 뜻은 다르겠으나, 오늘의 성리학은 허울만 세상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한 지 오래요, 천지와 더불어 소통하지 못하는 책상물림의 허학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으로 나를 위하고 밖으로 세상을 위하는 참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바른 마음으로 동학(東學)을 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겠습니다. 심고.”
모두 눈을 떴다.
“오늘 회합에서는 근자의 조선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우선 스물한 자 주문을 외우고 시작하겠습니다.”
김용희의 말에 따라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 萬事知)’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고 어떤 이는 양반다리를 하고 주문을 외웠다.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작고 천천히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주 빨리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무엇을 그리 염원하지는 모르나, 이들의 얼굴 표정은 하나같이 간절했다. 유학의 정좌 수행에 비하여 동학의 주문 수련은 단시간 내에 미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이 특장이었다.
주문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한동안 계속되자 김용희가 박수 소리를 냈다. 주문을 외던 사람들은 일시에 소리를 멈추고 고요히 묵송을 해 나갔다. 유에서 무로, 무에서 무무의 세계로 침잠해 가는 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백 리 밖에서 들리는 듯한 김용희의 박수 소리에 ‘푸우’ 하고 숨소리가 배어 나왔다. 김용희는 사람들이 기운을 조섭하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오늘의 나눌 말씀은 일본과의 교역 문제입니다. 근자에 들어 왜놈들이 쌀을 대량으로 사들인다고 합니다. 시중보다 조금 비싸게 쳐준다고 하니, 왜놈들에게 팔아 이문을 남기는 상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러다 조선 백성들이 먹을 쌀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습니다.”
김용희가 말하자 여기저기서 긴 한숨소리가 들린다. 김은경이 뒤이어 제 의견을 피력하였다.
“일본국과의 사이에 강화도조약이라는 것을 강제로 체결한 다음, 인천과 원산항까지 왜상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지 오랩니다. 가까이 태인이나 공주 나루에서조차 왜인들의 배에는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합니다. 접장님 말씀대로 이러다간 조선에 쌀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요즘 해질 무렵 굴뚝에 연기가 나도 막상 죽도 제대로 못 먹는 집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최근엔 금이나 구리도 많이 사들인다는 소문입니다. 쌀이야 저들도 배가 고프면 먹을 수 있으니 그렇다 해도 금과 구리까지 가져간다는 것은 이 조선땅을 다 헤집어 놓겠다는 것 아닙니까? 왜놈 상인들을 막아야 합니다. 이러다 조선 사람들이 먹는 거 입는 거, 심지어 제각의 놋그릇까지 다 털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 접장님들 말씀 중에 나서서 뭣 하지만,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원씨가 입을 열자 시선이 모아졌다.
“접장님들께서 모아 주신 쌀과 잡곡들이 벌써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도인들이 형편이 나아지면 조금씩 되가져오던 것이 많이 줄었습니다. 6할 아래로 내려간 적이 별로 없었는데, 도인들 형편이 예상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쌀을 몰래 나눠 주고 오면 이상하게도 다음날 귀신같이 관아에서 밀린 세금을 내라며 득달같이 달려와 향리들이 다시 쌀을 빼앗아 간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근자에 열흘 동안은 곳간을 열지 않았습니다만은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씨가 접장들의 눈치를 살폈다. 접장들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원 접장의 소임을 관아에서 알고 있는 것인지, 우리 동학도인들의 비밀이 새 나간 것인지는 아직 단언하기 이릅니다. 하지만 확실히 원인을 밝히기는 해야 하고, 그럼 당분간 원 접장의 소임을 다른 도인에게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당분간은 회합을 중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저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하시고요. 주막은 사람이 많아 그만큼 눈과 귀가 많으니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모두 이희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조정에서는 동학이 강원도와 충청도에 걸쳐 널리 퍼져나간다는 걸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첩자들을 보내기도 하고, 마을 사람을 매수해 도인들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된 관리들도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목천과 천안, 성환, 전의에서는 동학에 입도하는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서 관아에서도 더욱 예의주시한다는 걸 접장들도 알고 있었다.
회합이 끝난 자리에 이희인과 원씨만 남았다.
“원 접장, 할 말이 있으시다고 했지요?”
이희인이 천천히 말을 건넸다. 이희인, 세종의 후예다. 썩어빠진 조정엔 출사하지 않겠다며 목천에서 학문하는 이다. 엄연히 왕가에 속한 어른이다. 그런 그와 단둘이 한 방에 있는 것이 원씨에겐 여간 부담이 아니다. 허나 아들 혼사, 아니 동학이 이루고자 하는 올바른 세상과 직결된 일이다. 어쩌면, 며늘아기의 생사와도 관계된 일이니 없는 지푸라기라도 만들어야 할 상황이다.
“예 접장님, 저….”
원씨가 침을 한 번 삼켰다.
“어려워 마시고 말씀을 하세요. 그동안 원접장님의 도움을 몇 번이나 받았는데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마땅히 그리 할 것입니다.”
이희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 아들놈, 칠성이 일입니다.”
원씨는 운을 뗀 뒤 그간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다. 혼인한 지 열두 해 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다. 원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칠성이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마을사람들도 원씨의 아들사랑이 지극정성인 누구나 알아주었다. 농사꾼 아들이지만 글도 가르쳤다. 아비를 쏙 빼닮은 다부진 체격까지, 동네에선 골목대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말을 마친 원씨는 이희인의 입술을 주시했다.
잠시 생각을 갈무리한 이희인이 걱정스레 대답했다.
“그 오가라는 자가 기어코 일을 낼 심산인가 봅니다.”
“어제 오가 놈이 연지네를 찾아왔었습니다. 이제 영락없이 연지를 빼돌릴 것인디, 그라문 우리 칠성이는 보나마다 눈이 뒤집힐 것입니다. 어제 야심해서 집을 나갔는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습니다. 어찌해야 할지요? 뭔 사단이라도 나는 판엔….”
원씨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형님, 칠성이 형님, 저기 보시오. 수상한 놈들이오.”
상현이가 칠성이를 급히 깨웠다.
“어어. 왜?”
사흘째 밤잠을 못 잔 칠성이의 벌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오가 놈 집을 매일 밤 염탐하고 있는 칠성이다. 오늘은 힘이 부쳐 상현이와 함께 왔다. 마을사람들은 오가 놈이 어찌 재물을 모았는지 의아해한다. 땅 한뙤기 없던 오가 놈이 지난해 겨울부터 밭과 논을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했지만 그 재물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지난 해는 흉년이 들어 배를 곪는 이들이 허다했는데, 오가 놈이 땅을 산다는 소식에 수군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왜놈들과 가끔 만난다는 풍문이 퍼지고 퍼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칠성이는 그 풍문에 의존해 지금 오가 놈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문에 들었던 왜놈이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
정말, 오가 놈이 윤지를 첩으로 삼으려 하는지도 사실 모른다. 하지만 윤지를 지켜야 한다. 윤지와 언약을 했다. 반드시 지켜 주겠다고.
“형님, 저기, 저 하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두 놈이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했소. 왜놈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말을 하는 걸 보니, 왜놈 같아 보이오. 저기 키가 작은 놈은 두루마기만 입었지, 인사하는 모양새도 이상하고….”
칠성이는 상현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상현이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구나. 도대체 저 놈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왜놈들과 뭘 얘기하는 거지? 물건을 거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 오늘은 반드시 뒤를 밟아 밝혀낼 테다.”
칠성이가 유심히 살펴보고 있을 때쯤, 오가 놈과 도포 차림의 남자 두 명, 시중을 드는 한 명 이렇게 넷이서 오가 놈 집을 나섰다. 오가 놈도 두루마기를 걸쳐 입은 게 가까운 거리를 가는 건 아닌 듯 했다.
‘이렇게 야심한 밤에 저들은 누구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이룬 칠성이는 방금까지만 해도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왜놈이라는 말에 다시 정신을 곧추 세웠다.
앞서가는 오가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 칠성이와 상현이가 몰래 뒤를 밟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렀지만, 둘은 숨소리조차 삼켜 가며 그들을 따랐다. 그들이 잡은 길은 직산과 입장 방면이었다. 천안삼거리에서 제법 멀리 왔다. 직산 근처에 오더니 큰길에서 샛길로 접어든 이들은 큰 나무 옆에 있는 조그만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다가가보니 그들이 들어간 곳은 살림집이 아니라, 당집이었다.
칠성이와 상현이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예사로운 일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형님, 저놈들이 당집은 웬일일까요, 귀신이라도 붙으면 어쩌려고”
나직한 목소리로 상현이가 칠성이에게 물었다.
“쉿, 조용히 해 봐라.”
칠성이는 유심히 당집을 바라봤다.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만 보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오가 놈과 일행은 당집에서 나왔다. 또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하자, 오가 놈은 연신 “하이(예), 하이(예)” 하며 굽신거렸다. 도포 차림의 낯선 사내 중 키가 큰 쪽이 조선말을 했다.
“여기 있네. 다음엔 더 많은 걸 가져와야 하네. 직접 가져오거나 장소만이라도 알려주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받을 수 있네. 이건 수일 내에 우리가 가져갈 것이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일은 그 누구도 알아선 아니 되네. 자네 마누라한테도 절대 발설해서도 안 되고…. 누구든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자네 목숨은 그날로 끝인 줄 알게. 알았나!”
그자는 손으로 목 주변에 칼을 대는 시늉을 했다.
“아, 예, 지 마누라는 죽어 없습니다요.”
오가 놈이 굽신대며 대꾸했다.
“그런가, 안됐구만…. 참 그리고 그때 얘기했던 여자는 준비되고 있는가?”
키 큰 사내는 오가에게 말을 한 뒤 키 작은 사내에게 왜놈 말을 하더니 또 오가 놈을 쳐다보았다. 상현이와 칠성이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예, 예, 걱정 마십시오. 거의 다 됐습니다.”
오가 놈이 허리를 숙이며 헤헤거리자 조금 전 얘기했던 사람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오가 놈에게 전했다.
“감사합니다요. 고맙습니다요. 아리가토(고맙습니다), 아리가토….”
오가놈이 또 허리를 굽신거리며 인사했다.
“뭐냐, 아리가토가 뭐지?”
상현이가 칠성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칠성이는 손을 상현이 입에 대더니 오가 놈 일행을 유심히 살폈다.
두 손으로 주고받는 걸 보니, 꽤 묵직한 것으로 보였다. 일행이 자리를 떠나자 오가 놈은 서둘러 물건의 주둥이를 풀어헤쳐 안에 든 것을 살폈다.
엽전이었다. 오가 놈은 주머니를 헤집어 가며 쩔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신이 난 듯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우헤헤헤, 이렇게 돈을 벌다니. 세상사 요지경이구나….”
한참을 혼자 히죽히죽 웃던 오가 놈은 그 돈을 허리춤에 단단히 차고서 집 쪽으로 난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사내들과 오가 놈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칠성이와 상현이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당집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고, 자물쇠는 튼튼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허술해 보이기만 했던 당집 안에서 벽을 겹겹이 쳐놓은 것처럼 튼실했다. 당집 둘레를 둘러봐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출입구 하나뿐이었다.
칠성이와 상현이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상현이가 당집 옆 큰 나무 아래서 바지춤을 내렸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곳이다. 평상시 같으면 대낮에도 혼자 다니기 무섭다는 길이다. 칠성이도 상현이 옆에서 바지춤을 내려 오줌을 눴다. 둘은 말이 없었다.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만 크게 울려 퍼져 적막을 깼다.
“형님, 돈보다 귀중한 게 뭘까?”
“금 아니면 은일 게다. 근자에 직산에서 금을 캐는 사람이 많으니…. 그래 그것 말고는 없어”
칠성이가 확실하냐는 듯 상현이를 쳐다보았다.
“두 해 전에 아버지하고 같이 방죽안 쪽에 갔었어. 직산에는 한양 궁궐에서 관리하는 금광이 있대. 그런데 어떤 사내가 몰래 금을 캐려고 들어갔다가 들켜서 곤장 수십 대를 맞았다는 거야. 그 사내는 시름시름 앓아서 죽었다고 했어. 사는 것이 힘드니까, 몰래 금을 캐다가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야. 태인 쪽엔 청나라 사람들과 양놈들이 많이 온다잖아. 왜놈들도 많고. 거기서 그걸 거래한다고 하더라. 헌데, 근자엔 궁궐서 나온 놈들도 돈만 주면 금을 캐든 은을 캐든 다 눈을 감으니, 오가 놈도 그런 것이겠지. 금을 어디서 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가 놈이 그걸 내다 팔기는 힘들었을 거고. 그래서 저렇게 몰래 왜놈들과 거래를 하는 것 같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관에 들키지 않은 게지. 이놈이 그래서 재물을 모은 거였어. 이제 알았어! 금을 몰래 캐내는 건 중형으로 다스린댔어. 오가 놈을 잡아넣을 수 있겠어. 이제 됐어!”
칠성이가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 들떠 상현이를 쳐다봤다.
“그런데 상현아, 오가 놈과 그 키 큰 놈이 여자가 어쩌고 하는 얘기,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들떠 있던 칠성이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재우쳐 물었다.
“응, 나도 들었어. 무슨 말일까? 오가 놈이 윤지를 자기 첩으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봐. 그놈들이 여자를 구해 달라는 말 같았어.”
상현이도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다면, 오가 놈이 그 왜놈들에게 윤지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칠성이가 말없이 멈춰 섰다.
“상현아, 아까 그 당집에 그 왜놈들이 또 온다고 했지. 우리가 그 전에 다시 가 볼까? 아니다, 아니다. 생각을 좀 해 보자. 만약에 내가 관아에 가서 발고를 하고 관원들과 거기를 가면 오가 놈과 그 왜놈들이 잡혀갈 거야. 그렇게 되면 해결되는 거야. 그렇지”
칠성이가 상현이에게 생각을 구했다.
“아니, 형님. 잘 생각해 보소. 우리가 발고를 한다 해도 관원들이 무시할 수도 있는 거고. 관원들이 간다 한들 만약 그 왜놈들이 그걸 가지고 간 후에 도착하면, 우리가 거꾸로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어. 증좌가 없으니까. 오가 놈도 모른다고 잡아뗄 것이 분명하고, 그 향리 놈까지 있으니까…. 어찌 한다…. 형님, 아무래도 아저씨에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놈들까지 끼어있는 게….”
상현이가 걱정스레 말했다.
삼거리 근처에 다다랐다. 곧 동이 틀 시간이다.
“상현아, 일단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절대 말해선 안 된다. 아버지한테도. 알겠느냐?”
“아니 왜, 형님, 일단 원씨 아저씨한테는 말씀 드려야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상현이가 칠성에게 대들 듯 물었다.
“아니, 내 말 들어. 지금 이 일은 윤지를 지켜 내느냐 빼앗기느냐의 일이다. 아버지까지 알게 되면 도인들한테도 알려질 테고, 자칫 이 일로 가뜩이나 동학도들을 붙잡으려고 눈을 밝히는 판국에, 혹시나 말이다. 일이 잘못되면…. 그러니, 내가 방도를 찾아 볼 테다. 그때까지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아니 된다. 알겠지?”
칠성이가 다짐을 받듯 상현이를 바라보았다.
“알았소, 형님. 그런데 어쩌려고?”
상현이가 칠성이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칠성이는 두어 발 먼저 집으로 향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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