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경
광양의 엄마 집으로 돌아온 숙정은 며칠간 아무 일도 안 하고 잠만 잤다. 엄마는 숙정의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날마다 특별한 건강식을 만들어 먹이려고 하셨다. 집에 더 있자 해도 엄마에게 못할 일이었다. 한국에 아는 친구들은 몇 없고 그나마 그 친구들도 다 가정을 꾸리고 있어 마땅히 기댈 언덕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숙정에게 권했다.
“한겨레 휴센터라는 게 생겼는데, 거기 프로그램이 좋아. 이번 여름에는 공주 마곡사에서 한다더라. 프로그램에 참가해 본 사람들이 좋다고 추천하던데 거기 한번 가 봐. 말 그대로 힐링이 된다던데….”
2013년 8월 초 가장 무더운 여름날 숙정은 3박 4일을 마곡사에 있었다. 그리고 명상 프로그램을 따라 하면서 가슴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듯하였다. 도인 체조도 좋았다. 그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한국의 아름다운 산이 거기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불현듯 떠올랐다. 기인처럼 생긴 강사분이, 키가 많이 크고 빼빼한 몸에 힘이라곤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분이 구수한 목소리로 조용조용 해 주셨던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당에 물을 버릴 때도 행여 뜨거운 물을 쏟게 되면 생명체가 데일까 봐 한 김 식혀서 뿌렸습니다. 아이를 만나도 공손히 절하고 어른을 만나도 공손히 절하였습니다. 여자와 남자도 서로 한울님 대하듯이 모시려고 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이 서로 맞절하였습니다. 관리가 찾아와도, 동네 거지가 찾아와도 똑같은 밥상을 차려 함께 먹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사람을 대하면 한울처럼 귀한 사람으로 한결같이 대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사람만 그리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모든 것을 한울님으로 모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신 분들 중에 저희 외할머니도 계십니다. 저희 외조부모님께서는 육고기는 물론 생선도 일절 드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 사시다 보니 하루는 영양실조 비슷하게 어지러워 길을 가다가 냇가에 앉아서 잠시 쉬고 계셨더랍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새가 나타나 죽은 물고기를 외할아버지 계신 곳에 떨어뜨려주고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신 분들이 바로 동학 도인들입니다. 내년이면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삶이 아름답다 여겨진다면 동학 도인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 보셔요. 좋은 몸 공부, 마음공부가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숙정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이제까지 숙정은 세계인권선언 제1조를 삶의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살아 왔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천부인권을 지녔고, 사람들은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시절 숙정을 사로잡았던 인권 의식은 어렵고 힘든 세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폭제였다. 그런데 인권을 넘어 모든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한울사상이라니! 숙정은 그 짧은 강의 몇 마디에 몸 전체가 출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만이 생명의 원천은 아니구나. 사람 너머에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거대한 생명의 뿌리가 있었고, 그 진리를 알고 실천한 사람들이 이미 두 갑자 전에 있었다니….
그래서 그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동학도인들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 그분은 웃으셨다.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찾아가 봐요. 동학 공부도 쉬엄쉬엄 하시고요.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천도교 수련원이 있는 경주 용담정에도 한번 다녀와요. 숙정 씨가 국제인권센터 일을 하였으니 세계인들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어쩌면 숙정 씨는 동학기념관이나 용담정에서 인권을 지키는 삶을 어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삶의 모델을 찾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숙정은 지난해 여름 마곡사의 힐링 기억을 잊고 살았다. 마곡사에 머무를 때는 정읍도, 경주도 한번 가보자고 생각했는데 광양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냥 시들해져 별 생각 없이 살았다. 그 사이에 한국 엠네스티 지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숙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런던에서 연락이 왔다.
“숙정아, 나 세리.”
“응, 반가워. 근데 무슨 일 있어. 바쁜 친구가 전화를 다 하고?”
“나 이번 휴가 기간에 한국에 갈까?”
“응. 그거 괜찮네. 얼른 와. 나도 심심했는데 같이 여행 다니자. 내가 한국 여행 가이드 해 줄게.”
숙정은 세리의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날부터 세리와 함께 할 여행지를 물색하는데 마음을 쏟았다. 어디로 갈까? 한국의 대표적 여행지 하면 서울, 경주, 제주도가 아닌가. 서울은 오가는 길에 보고 싶은 곳을 보면 될 것이고, 제주도도 좋긴 하지만 육지 여행부터 해 보자 생각하고 세리와 함께 하는 첫 여행지는 경주로 정했다. 그다음 여행지는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가볍게 움직이자고 생각하니 마음도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았다. 세리가 오는 날이 학창 시절 친구들이랑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기다려졌다.
세리는 남쪽에 벚꽃이 만발한 사월 오일 인천 공항에 도착했고 바로 서울역으로 가서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경주역에서 내리자 숙정의 얼굴이 보였다. 서로를 향하여 달려온 두 사람은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숙정, 한국 너무 예쁘다. 기차로 내려오면서 보니까 한국 전체가 온통 꽃밭이야.”
“예쁘지! 영국도 좋은데 한국도 참 좋아. 나도 가끔 봄날 한국처럼 아름다운 산하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내가 정말 아름다운 계절에 잘 왔네.”
“응, 세리야. 너 남자 친구랑 같이 왔어도 좋았을 텐데….”
“뭔 소리, 난 너랑 여행하는 게 더 좋은데. 그리고 그 친구 지금 정신없어. 일이 막 쏟아진다더라.”
“하긴 나도 너랑 둘이 여행하니까 더 좋아. 우리 맘껏 이 여행을 즐겨볼까요, 친구!”
“좋아, 나는 숙정이가 데려가는 곳이면 어디나 오케이.”
“그럼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 불국사부터 가 볼까요.”
숙정은 오랜만에 세리와 함께 깔깔거리고 수다를 떨었다.
불국사 일원은 온통 벚꽃 천지였다. 바람에 벚꽃 잎이 눈 내리는 것처럼 하얗게 날렸다. 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머리 위에도 하얗게 꽃잎이 덮였다. 세리는 나무 밑동에 수북한 꽃잎을 머리 한가득 면사포라도 쓴 것처럼 얹더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진기 화면 속 꽃잎을 머리에 올린 친구도, 그 뒤에 배경도 별천지인 것처럼 아름다웠다. 경주 불국사 경내 전경도 자연과 어우러져 숙정과 세리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전날 새벽녘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설산 풍경까지 어우러진 사월의 경주는 세리를 흥분으로 이끌었다.
“숙정아, 한국 너무 멋지다. 이리 멋진 나라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지?”
“그거야. 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다 똑같지 않을까? 사랑, 행복, 평화….”
“한국에도 인권 운동이 있겠지?”
“한국의 인권이라….”
한참을 생각에 잠기던 숙정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눈빛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아, 맞다. 동학! 용담정! 세리야 우리 용담정에 가 보자. 거기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권 운동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물어물어 용담정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 틈틈이 숙정은 교과서에서 배운 상식과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총동원하여 세리에게 동학의 사상과 역사를 설명했다. 숙정은 비로소, 자신이 동학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실감했다.
용담정은 경주 시내를 벗어난 곳에 있었다. 용담정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몇 사람만 타고 있어 한산했다. 버스에서 내려 용담정 이정표를 보고 몇 걸음 들어가니 현곡 마을 길가에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모습이 숙정이의 시선을 끌었다. 무쇠 솥뚜껑을 화덕에 걸어 놓고 할머니가 파전, 감자전을 부치고 계시는 것이었다. 마침 배도 고프던 터라 세리의 팔을 이끌어 화덕 옆으로 다가갔다. 할머니는 부스스한 파마머리 아래로 이마와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달고 있었다. 할머니가 두 사람을 보고 웃자 입가에 팔자주름이 더 깊어졌다.
“세리야, 한국식 피자야. 먹고 가자.”
“할머니, 파전 하나, 감자전 하나 맛있게 부쳐 주셔요.”
“오늘 파전도 감자전도 마싯따. 근데 처자들은 어디서 오싰으까?”
“할머니, 우리 전라도에서 왔어요. 할머니, 요 위에 용담정에 사람들 많이 오나요?”
할머니는 전을 잽싸게 뒤집으면서 대답했다.
“어데. 사람들이 불국사로만 많이 가고 여는 많이 안 온다카이. 아는 사람들은 용담정 최제우 대신사가 불국사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분이라 카던데 내는 잘 모린다.”
할머니가 부쳐 주는 전을 맛있게 먹고는 용담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르면서 바라보는 구미산은 봉우리가 부드럽게 펼쳐져 편해 보였다. 적당한 오르막의 길 가에는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은행나무는 여리고 작은 싹을 나뭇가지 밖으로 여기저기 조금씩 내밀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란색 물결이 사람들을 환영하겠지만 사월 초입의 은행나무는 쭉쭉 뻗은 나무 등걸이 시원스러웠다.
용담정 주차장을 지나자마자 넓은 뜰 왼편으로 최제우 선생의 동상이 보였다. 얼굴은 길쭉하고 키가 자그마한 양반이 사람 마음에 하늘이 들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숙정은 그 동상을 뒤로 하고 용담정으로 올랐다. 거대한 신식 한옥 건물을 지나고 중문을 지나 산길을 5분 남짓 오르다 보니 이내 용담정이 눈에 들어왔다. 잘 생긴 기와집이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누구 말 붙일 사람이 없나 찾는데 마침 아주머니 한 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하얀 백발에 파마를 하였는데 숙정보다 더 매끈하고 흰 피부를 가져 묘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젊은 분들이 여는 우찌 알고 오싰으까예? 여는 아는 사람들보다 모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낀데?”
“예, 이 친구는 영국에서 왔고요,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해요. 저는 광양 사람이고요. 지금은 둘이서 경주를 둘러보고 있어요. 예전에 어떤 분이 동학을 알려면 용담정을 찾아가 보라고 한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서 왔어요.”
“아고. 잘 오싰네예. 동학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나도 한울, 너도 한울, 세상만사가 다 한울이라는 거지예. 그래 우리가 나를 비롯한 세상 만물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 행복한 세상이 온다는 거지예. 오시면서 최제우 대신사 동상 보셨지예?”
숙정이 짧게 대답했다.
“예.”
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세상 만물이 한울이요, 인간이 한울이라는 도를 우리 최제우 대신사가 동학(東學)으로 이름 지어 펴 내셨어예. 올해는 최제우 대신사의 사상을 이어받아 인간이면 모두가 한울로 대접받는 평등한 세상, 서로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사는 동학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1894년에 한반도 전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지 120주년이 되는 해지예. 왜놈들한테 엄청스레 당하면서도 우리는 그 사상을 천도교로 계속 이어 왔어예. 여 용담정에는 천도교 수련장도 있어예. 그란께 여서 며칠 머무르면서 동학, 그리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좋을끼라예.”
숙정은 세리에게 물었다. 세리도 한국의 동학사상과 천도교 수련이라는 데에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은 용담정에 머무르면서 동학 말씀을 들었다. 동학의 생명 사랑, 평화주의, 모두가 한울이라고 하는 만민평등 사상이 놀라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당대에 이 땅 위에 건설하려고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섰던 갑오년 사건을 좀더 알아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내친 김에 바로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향하였다.
처음으로 찾아보는 정읍은 작고 조용한 소도시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넓은 벌판 가운데로 나 있었다. 이 싱그러운 들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전투를 하였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기념관은 황토재를 둘러싼 너른 벌판 가운데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 사발통문을 쓰고 투쟁한 농민군들의 두상이 있었다.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날의 함성은 땅속 깊이 잠겨 있는지 고요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 날이었다.
숙정과 세리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첫 번째로 만난 여성분에게 기념관 안내를 부탁했다. 그분은 미리 해설을 신청하지 않은 개인에게는 안내하지 못하지만 짧은 시간이라면 안내를 해 주겠다며 앞장서 걸었다. 그녀는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의 여인들이 갖는 편안함이 있었다. 숙정은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맨 처음 안내해 주는 장소는 좀 특이했다. 아래가 트여 있고 안팎에 거울을 붙여 둥근 것 같기도 하고 육각형 같기도 한 작은 공간이었다. 숙정과 세리는 그녀를 따라 몸을 낮추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별들이 무수히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거기 있었다. 이 공간을 구상한 작가는 갑오동학농민혁명으로 죽어간 수십만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가졌던 꿈, 그 꿈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너도 한울이고 나도 한울이어서 서로 존중하는 모습으로 영혼의 별이 되어 저 우주의 한울에 총총히 박혀서 영원히 빛나는 것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했다. 잠시 그분들의 영혼에 접목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마저도 무릅쓰게 했을까?
숙정과 세리는 그 의미 깊은 빛의 공간에서 몸을 낮추고 나오는 동안 몸을 따라 마음도 낮아지고 깊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동학농민혁명 접주들의 흉상이 그들을 맞이했다. 전봉준, 김덕명, 최시형, 손화중, 최경선의 얼굴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숙정은 마지막으로 김개남의 얼굴을 보면서 손을 가만히 대어 봤다. 옆에 서 있던 안내원이 말하였다.
“김개남 장군입니다. 그분은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전봉준 장군 못지않은 활동을 했어요.”
“아, 그래요?”
“지금으로 치면 전봉준 장군이 동학군 전라우도 총사령관이었고 김개남 장군은 전라좌도 총사령관인데, 일본과 대항해 싸울 때는 전라좌도 활동이 더 컸다고들 해요. 특히 남원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지요. 본격적인 대일 항쟁의 시발점이었던 남원대회를 열었고, 영호대도소로 김인배 대접주를 파견해 경상도 지역 동학군 활동을 지휘하고 지원했어요.”
정읍에서 나온 숙정과 세리의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김개남이 활동을 크게 하였다는 남원으로 정해졌다.
숙정은 동학을 접하면서 감동에 젖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벚꽃이 지는 사월 그날도 그랬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건네준 남원 동학농민혁명 역사자료집을 남원행 버스 안에서 읽었다. 숙정은 가슴에 울림을 주는 글을 만났다. 자료집의 첫인사말부터 자료 내용 하나하나가 가슴 가득한 애정과 올곧은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 글을 쓴 분의 생각에 매료되어 그 자료집을 만든 이를 만나고 싶었다. 다행히 그 자료집에는 그분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자료집을 만든 이는 남원 시민운동가 설촌 선생이었다. 한 번도 뵙지 않은 분이지만 숙정은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
“설촌 선생님이십니까?”
수화기 저편으로 굵으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런데요.”
“저는 동학을 알고 싶은 유숙정입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남원 동학 자료를 받았습니다. 실례인 줄 알지만 그 자료에 있는 선생님 전화번호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선생님, 남원 동학 유적지 답사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반갑습니다. 남원 역사에 관심을 가져주니 너무 좋습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숙정과 세리는 남원에 도착하는 길로 설촌 선생을 만났다. 허연 백발에 양복을 걸친 초로의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왔다. 살집은 없어 보였지만 목소리에 힘이 느껴졌다. 동행한 그분의 제자인 정구영 선생과 함께 먼저 교룡산성 은적암에 올랐다. 은적암 오르는 길에 선국사가 있었다. 선국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편 살짝 높은 곳에 삼성각이 있고 그 사이에 수령이 백년을 넘었을 성 싶은 배롱나무가 휘어진 몸을 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칠층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칠층석탑 왼쪽 편에 관음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행은 대웅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맞은편에 세워진 보제루에 올랐다. 남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지리산이 남원 시내를 굽이굽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사방으로 솟은 산줄기가 기세 좋게 뻗어 있었다. 높고 굽이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땅이 좁을 것 같은데 의외로 남원 시내는 들이 넓었고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요천강은 물을 넉넉하게 담아 흐르고 있었다.
설촌 선생이 보제루에서 남원 시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원 시내가 한눈에 보이지요. 여기가 천연의 요새요. 올라오면서 느꼈겠지만 여기 산세가 상당히 험해요. 밀덕봉, 복덕봉 양 봉우리가 우뚝하지요. 일단 좀 올라와 버리면 의외로 널널한 땅이 있어 은거하기가 안성맞춤인 곳이지요. 올라와서 적들의 형세를 살피면서 대처하기가 아주 좋지요. 이러한 지형 때문에 이곳은 일찍이 백제와 신라의 군사 요충지였고 백제 때부터 돌성을 쌓았다고 해요. 그 성이 교룡산성이지요. 그때부터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성안에 우물이 아흔아홉 개가 있었다고 해요. 난리가 일어나면 고을 백성들이 여기로 숨어들었겠지요.”
남원 시내를 바라보면서 설촌 선생의 말을 듣고 있던 숙정이 물었다.
“여기 올라와 보니 천연 요새란 말이 실감나네요. 김개남 장군이 왜 여기 선국사에 머물렀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지요. 여기가 새로운 혁명을 꿈꿀 만한 터로 보이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정구영 씨가 자리를 정리하였다.
“선생님, 이제 은적암으로 오르시지요. 남원 동학은 은적암을 빼고 말할 수 없지요.”
은적암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십 분도 되지 않아 땀이 찼다. 오르는 길 초입은 대나무가 빽빽하여 어둡고, 동물도 겨우 다니겠다 싶었다. 대나무 숲을 빠져 나가자 오래된 산길이 나타나고 길가에 풀이 무성했다. 가파른 길을 다 올라서자 꽤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사방으로 대나무가 꽉 차 있어 산 아래 전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잡풀만 무성하고 가운데쯤에 표지판 두 개가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자리 쪽에는 절벽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설촌 선생은 표지판 쪽으로 가더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씻으며 안내했다.
“여기 왼쪽 것은 불교 표지판이요. 3.1만세운동에 참여한 33인 대표 중 한사람인 백용성 스님이 첫 출가한 자리를 알리는 거지요. 그리고 여기 오른쪽 표지판은 최제우가 탄압을 피해 여기로 와서 논학문을 짓고 ‘동학’이라 최초로 이름 지은 곳임을 알리는 거요. 이 표지판은 천도교에서 세웠어요.”
숙정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여기가 은적암이 있었던 곳인가요?”
설촌 선생은 네모반듯한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돌이 보이지요? 아마도 여기가 주춧돌 자리일 것이요. 원래 이곳 암자 이름은 덕밀암이었는데 최제우가 은거하면서 은적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이곳에서 동학의 기본 교리를 정리하였다고 해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 숙정은 따지듯이 물었다.
“선생님, 천도교에서 보면 이곳은 제2의 성지나 다름없는데 유적을 기리는 시설이 겨우 이 표지판 하나인가요?”
설촌 선생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좀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 사상이요, 종교이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혁명의 출발점이기도 한 곳을 우리는 지금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이렇게 방치하고 있어요. 우선 여기 앞에 대나무들부터 다 정리하고 나면 아래 남원시 전경이 다 보여요. 그리고 은적암을 다시 세워야겠지요. 젊은이들이 동학을 알게 하려면 이런 유적지가 재건되고, 젊은이들의 답사 코스가 되고, 그러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우주와 생명을 논하는 대 토론이 이루어지게 해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네요.”
옆에서 듣고 있던 정구영이 말했다.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을 얼마나 잘 선전하는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아요. 그런 나라하고 비교하면 지금 우리 모습은 참 한심하지요. 동학농민혁명은 프랑스 대혁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참여 인원도 엄청났고, 기간도 길었어요. 특히 그 속에 담긴 혁명 정신과 사상은 엄청난 것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못 살리고 있지요. 사상적으로 온 우주를 다 품고 우주의 원리를 밝힌 것이 동학이지요. 사람 속에 우주 즉 한울 있고, 한울 즉 우주 속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대단하지요.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한울이어서 서로 존귀하게 대하고 생명의 기운을 살리는 자주적인 삶을 실천하는 동학사상은 인류 역사가 발전시켜 온 사상의 최고봉이지요. 오늘날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은, 동학사상대로 살기만 하면 실마리가 풀릴 거라고 봐요. 특히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대결 구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세계 문제도 동학사상을 실천하기만 하면 생명 존중의 평화 구도로 그 양상이 달라질 겁니다.”
옆으로 삐져나온 대나무를 밀어 넣으면서 듣고 있던 설촌 선생이 말했다.
“정구영 선생 말이 맞아요.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를 지녔고 그 속에 깃든 정신의 줄기를 따라가 보면 엄청나요. 그런데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 사상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외세가 짓밟는 대로 흘러가 버렸으니 참 안타깝지요.”
풀 속에 묻힌 허름한 표지판 하나로 남아 있는 은적암을 뒤로 하고 숙정은 설촌 선생을 따라 교룡산성을 내려왔다.
숙정은 설촌 선생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어르신이 올해 일흔둘이라 했다. 이제 저런 고민은 후대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부끄럽다. 저 어르신이 바른 역사를 찾아가고 있을 때 젊고 팔팔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인권센터에서는 산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였던 것은 아닌가? 내 속에 들어와 흐르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목소리는 왜 들을 줄 몰랐을까? 결국 산 사람의 문제는 우주 속으로 돌아가 내 안에서 숨 쉬는, 돌아가신 선열들의 한울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자르면서 숙정이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오늘 설명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저부터 시작하여 젊은 사람들이 올곧은 정신을 살리도록 노력할게요. 하지만 선생님도 도와주셔야 하니까 건강하셔요.”
숙정은 선생님의 건강을 당부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그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광양 집으로 돌아왔다. 숙정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피곤한데도 선생님이 생각났다. 설촌 선생님은 교직에 있다가 마음으로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오십 대 중반에 퇴직하고, 지난 십오 년간 남원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올곧은 사상을 챙기고 알리는 활동을 계속해 오셨다고 했다. 그 일에 제자 정구영 씨도 줄곧 동참하였다고 하니 아름다운 사제지간이다. 숙정은 그 두 분이 챙겨준 남원 동학 관련 자료를 훑어보면서 생각했다.
‘아, 이제는 내 차례구나. 내가 할 일을 찾았구나.’
다음 주 목요일(5월 21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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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 [소설/유이혜경] - 섬진강은 흐른다(2)-줄거리-유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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