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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작품 [님, 모심]- 7회 장일순, 노동.농민 운동 속에서 생명을 고민하다 장일순, 해월을 만나다 협동조합은 한편에서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농촌이 계속 허물어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농부가 작물의 품종을 스스로 선택하고 기계화도 많이 이루어졌다. 1977년 수출 100억 불을 달성했다고 대통령이 신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노동자의 낮은 임금과 낮은 쌀값 정책으로 이룩한 경제 성장이었다. 생산비를 밑도는 쌀값 책정에 농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금방 무성해지는데, 농촌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장은 정부의 방침이라며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심고 농약을 살포하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신고가 들어갔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제초제와 비료를 선택했다. 농약 묻.. 더보기
작품 [님, 모심] - 6회 장일순, 지학순 주교를 만나다 장일순, 지학순 주교를 만나다 어느 날 장일순의 봉산동 집으로 한 신부가 찾아왔다. 지학순(池學淳) 주교라고 했다. “함께 일할 신도를 찾았더니 누가 ‘저기 빨갱이로 몰려서 농사짓고 있는 사람 있으니 만나 봐라.’ 해서 왔습니다.”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장일순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저는 로마 교황청에서 주교로 임명받아 원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황님의 뜻을 함께 실천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교는 좀 더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장일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꿈은 종교적인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지.. 더보기
작품 [님, 모심] - 5회 장일순, 탄압 받다 장일순, 탄압 받다 (1960~1977년)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은 다음, 장일순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가 스물여섯 살이었다. 먼저 가족의 동의를 얻어 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동원하여 장윤(張潤), 김재옥(金在玉)과 함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한 다음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대성학교’로 이름을 지었다. 장일순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성중고등학교 인가 과정은 지난하였다. 공무원들은 장일순의 나이가 어리다고 쉽게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서류를 반려하기 일쑤였다. 막걸리라도 사 줘야 일이 처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정치를 통해 바로잡고 싶었다. 그때는 이승만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던 시절이었다. 1956.. 더보기
작품 [님, 모심] - 1회 장일순과의 대담 장일순과의 대담(1988년 5월) 치악산은 얼마 전에 연둣빛 등허리를 드러내더니 신록이 나날이 짙은 윤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꽃샘추위 뒤끝에 다사로운 봄 햇살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환한 이팝나무가 꽃잎을 터트리자, 덩달아 찔레나무와 아카시아나무도 꽃향기를 내뿜었다. 나무는 겨우내 향기로운 잎과 꽃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눈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면 꽃향기가 맡아졌다. ‘이런 날엔 봄맞이 소풍이 제격인데….’ 유청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중요한 취재가 있는 날이다. 문화부장에게서 원주의 장일순이라는 분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을 개최한다고 취재해 오라는 엄명을 받아 놓은 터였다. 장일순?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처음에 유청이 인터뷰를 요청하자, 장.. 더보기
작품 [님, 모심] - 작품개요 작품 개요 동학 2대교조인 해월 최시형은 수운 최제우가 1864년 참형을 당한 뒤로 숨어지내면서 은밀하게 동학을 다시 키워오고 있었다. 그러다 수운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자며 이필제가 영해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그에 대한 조정의 탄압으로 해월은 강원도 태백산 속으로 숨어들어왔다. 강원도 사람들은 해월을 숨겨주면서 동학을 받아들였다. 해월은 영월과 정선을 중심으로 49일 기도와 제사의식을 통해 동학교세를 확장하고 조직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인제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여 동학을 널리 퍼뜨렸다. 마침내 1894년 9월 기포령을 통해 전국의 동학도인뿐 아니라 국민의 1/3이 참가하였다. 강원도에서도 유시헌, 차기석 등이 참가하였다. 동학 혁명 실패 후 해월은 다시 강원도로 숨어들었다가 원주에서 잡혀 1898년.. 더보기
작품 [님, 모심] - 작가의 말 작가의 말 문화재청은 120년 전 동학군의 유골을 2015년 2월 16일 화장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동학소설 팀은 문화재청과 진도군청, 독립기념사업회 등 홈페이지에 철회를 요청하는 글을 올리고, 문화재청 앞에서 2인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기자와 관련 전문가를 동원해 위협하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 진도 동학군의 유골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어느 것 하나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촘촘하다는 노자의 말이 떠올랐다. 나와 다른 존재, 나와 우주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점이라고 생각한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존재와 연결된 큰 존재인지, 나 하나의 생각과 행동이 주변에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킬지 생각하게 되면서 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