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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정이춘자

피어라 꽃(1회) - 봄바람 말목장에 불어오다


제1화 봄바람 말목장에 불어오다


봄이다. 봄볕에 자란 풀들이 부드러웠다. 동남쪽으로 벋어 내린 지력산 골짜기에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산자락에는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목책 밖에 일군 밭에는 하얀 무꽃이 피었다. 나비들이 발에 꽃가루를 묻힌 채 꽃 속을 바삐 드나들었다.

 

새 풀을 뜯어먹고 살이 오른 암말들이 목책에 자꾸 몸을 비볐다. 수말이 어슬렁어슬렁 암말 뒤로 다가가면 암말은 모르는 척 꼬리를 치켜들었다. 작년 봄에 새끼를 가져 배가 둥둥한 암말들은 요즘 한창 새끼를 낳았다.

 

말총이는 막 마굿간을 나선 참이었다. 새벽부터 모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암말이었다. 아침에야 새끼보가 삐죽이 나왔다. 새끼보를 뒤집어 쓴 망아지는 앞발만 내민 채 다시 한참을 지체했다.

 

말총이가 망아지의 앞발을 살살 당겨 주었다. 어미는 들린 다리를 버르적거리며 다시 힘을 썼다. 양수와 더불어 새끼가 털퍼덕 쏟아져 나왔다. 갓 태어난 망아지가 비틀비틀 일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말총이는 마굿간을 나섰다.

 

햇빛에 눈이 부시고 어질어질하여 말총이는 눈을 감았다. 잔뜩 찡그린 그의 눈썹이 짙었다. 물오른 미루나무처럼 컸지만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났다. 눈을 가린 탄탄한 팔뚝이 짧은 저고리 소매 밖으로 한참이나 나왔다. 잠방이도 껑충하니 정강이까지 올라갔다. 입성은 꾀죄죄했지만 말처럼 탄탄한 몸이었다. 손을 내리고 말총이가 눈을 떴다. 총기 있는 눈빛에 코가 반듯했다.

 

말총이는 습관처럼 힐끗 목책 밖을 보았다. 무꽃이 피어 있는 집 쪽이었다. 사월이는 오늘도 밭에 나오지 않았다. 말총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사월이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만나기만 하면 사월이의 마음을 알아내리라 단단히 결심했다.

 

열흘 전 처음으로 사월이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사월이의 마음을 얻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후 사월이는 멀리서 그를 보기만 해도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 동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더했다. 자신이 그날 무엇을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열흘 내내 사월이 눈치만 살피며 조바심쳤던 그였다. 말총이는 말똥을 치우는 척하며 목장을 가로질러 사월이의 집 쪽으로 걸었다.

 

 

열흘 전이었다. 말총이가 뒷산에서 마른 삭정이를 꺾고 있을 때였다. 공기가 달라진 것이 느껴져 산 아래를 보니 사월이가 나물바구니를 끼고 올라오고 있었다. 취라도 뜯으러 나온 것이리라. 말총이는 순간 산 위로 올라가 버릴까, 모르는 척 지나쳐 내려가 버릴까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사월이를 마주치게 되면 하는 고민이었다. 말총이는 자꾸 사월이를 곁눈으로 힐끔거리면서도 막상 사월이를 만나면 자꾸 도망치고 말았다. 쉴 새 없이 힐끔거리다가도 눈길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사월이가 새침한 얼굴로 가 버리면 그때서야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사월이의 뒤통수를 멍하게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바보, 멍충이라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쩍 마른 망아지처럼 볼품없던 사월이의 얼굴이 보얗게 피어난 후부터였다. 사철 부르터 있던 뺨이 아침에 핀 나팔꽃처럼 보드라워지고, 좁고 깡말랐던 어깨가 동그스름해졌다. 전에는 가슴께가 밋밋하더니 언젠가부터 저고리 섶이 들려 올라가 눈길이 자꾸 그리로 가는 것이었다. 뒤태도 달라졌다. 쏙 들어간 허리에 팡팡해진 엉덩이를 꼭 자신 보라고 부러 흔들며 걷는가 싶기도 했다.

 

또래 여자애들보다 키가 훌쩍 큰 사월이는 말도 잘 타고 씩씩해서 노상 말총이와 사내아이들 틈에서 놀았다. 예닐곱이 되도록 아랫도리를 벗고 천둥벌거숭이로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말총이를 따라 다니다 여름이면 풍덩풍덩 함께 멱을 감고 놀았다. 일 년 내 햇볕에 탄 그녀는 새까만 얼굴에 눈자위만 하얗게 깜박깜박했다. 겨울이면 얼굴이고, , 손등 할 것 없이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던 그녀였다.

 

망설이다 사월이가 턱 밑에 올 때까지 멍청히 서 있고 말았다. 사월이는 말총이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물바구니는 비어 있었다.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사월이가 말총이 무릎 앞까지 오더니 멈칫하다가 일어섰다.

 

사월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마주쳤다. 말총이는 피하지 않았다. 사월이의 눈빛은 막 세수한 것처럼 촉촉했다. 사월이가 눈을 내리더니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 고개를 외로 튼 사월이는 성이 난 듯했다. 자신이 길을 막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사월이의 반듯한 가르마가 말총이의 가슴께에 있었다. 말총이는 몸을 돌려 길을 조금 내주었다. 사월이의 치맛자락이 정강이를 스쳤다.

 

말총이는 저도 모르게 사월이의 팔을 잡았다. 얄캉한 팔이 한 손에 잡혔다. 말총이는 다른 손으로 사월이의 손을 잡았다. 사월이의 손은 작고 보드라웠다. 세차게 뿌리칠 줄 알았던 사월이는 손을 잡힌 채 고개만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때 숲에서 푸드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월이는 깜짝 놀라 손을 빼어 산 아래 쪽으로 뛰어갔다. 꿩이었다. 장끼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유유히 말목장으로 날았다. 말총이는 장끼를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도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세상을 얻은 것 같았다. 내일은 사월이에게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을 하리라. 올가을에는 혼인시켜 달라고 아버지에게 말해야지. 말총이는 마음이 급했다.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사월이는 밖을 내다보고 말총이가 마굿간에서 나온 걸 알았다.

 

바보, 멍충이.’

 

고사리 삶을 물을 끓이며 사월이는 소리 나지 않게 말했다. 사월이가 열세 살이 넘어 여자 꼴이 좀 잡히자마자 어머니는 천방지축인 그녀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단속했다. ‘가시낭년이 돌아댕기믄 어느 놈이 채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목자 딸들은 인물이 고와도 걱정이라며 누가 첩으로 삼아 버릴까 봐 전전긍긍이었다. 작년부터 어머니는 군두나 군부들 중에서 신랑감들을 짯짯이 살피기 시작했다. 사월이는 애가 탔다.

 

한 달 전이었다. 사월이는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겨우내 뜯어먹었던 시금치는 이제 동이 서 버렸고 상추가 탐스럽게 자랐다. 어느새 목소리가 우렁우렁해지고 키가 커진 말총이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자꾸 자신을 힐끔거리던 말총이의 눈길이 떠올랐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말총이었다. 언제나 그의 색시가 되고 싶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사월이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한마치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뭔 생각을 하가니 사람이 와도 몰르냐?”

 

그는 밭둑에 놓아 둔 삽을 들고 땅을 뒤집기 시작했다. 한마치가 발을 디뎌 누를 때마다 삽 모가지까지 땅 속으로 쑥쑥 들어갔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밭을 갈아엎었다. 워낙 손바닥만한 텃밭이기도 했지만 한마치는 금방 끝내 버렸다. 그가 엎어 놓은 흙은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줄지어 누워 있었다.

 

내가 한 말 생각해 봤냐? 느그 부모님한테 먼저 말씀 디릴라다가 몬차 니 말을 확실하니 듣고 잡어서 그란다.”

 

일을 다할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한마치가 삽에 몸을 기대고 서서 말했다. 사월이는 호미질을 멈추지 않은 채 대꾸했다.

 

나는 아직 시집 안 갈 거여.”

 

그거는 큰애기들이 다 하는 말이지야. 그래도 내가 싫지는 안 허지?”

 

싫은 거는 아니재.”

 

그라믄 되얐어.”

 

한마치가 자리에서 일어서 가려 하자 사월이는 조급해졌다.

 

나 진짜 시집 안 간당께? 울 엄마한테 말하지 마라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갑자기 한마치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가려던 한마치가 뒤돌아서 나직하게 말했다.

 

나 싫은 거는 아니락 안 했냐. 우리가 몰른 사이도 아니고 살다 보믄 정들것재,”

 

안 싫으믄 다 시집 가간디? 좋아야 시집 가재.”

 

그 말을 하고 나니 사월이는 말총이 생각이 나서 얼굴에 모닥불을 들이대는 것 같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뒤돌아 앉았다. 호미로 한마치가 뒤집어 놓은 밭두둑을 북북 긁어 내렸다.

 

한마치는 가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에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마치가 자주 그녀를 쳐다보는 걸 알고 있었다. 갈망하는 듯한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면 항상 거기에 한마치가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치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더니 작년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눈길을 고정한 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아 그녀가 오히려 고개를 돌려 버리곤 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달에는 그녀의 부모님께 청혼을 하겠다며 한 달간 생각해 보라 하더니 오늘 또 온 것이다.

 

너 누구 딴 사람 맘에 있냐?”

 

…….”

 

누구여? 말총이냐?”

 

…….”

 

말총이는 인자 목자 시작해갖고 모태 논 것도 없을 것인디 어뜨케 혼인을 한다냐? 나는 군두님이 맹년에는 군부 시켜준다고 약조했어야. 그라믄 일도 더 수월해지고 돈도 더 많이 모탤 수 있어.”

 

그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그가 말총이를 무시하는 듯하자 그녀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속에서 들끓는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어려서부텀 니를 좋아했어. 너는 말총이랑 꺼덜거리고 노니라고 나는 쳐다보도 안 했재만 내가 느그들보다 나이 많은게 그란갑다 했재. 으찌 됐건 나는 낼이라도 느그 부모님 찾아갈 건게 그리 알어라이.”

 

한마치는 뚜벅뚜벅 걸어 밭을 나갔다. 부모님은 믿음직스럽고 건장한 한마치가 청혼하면 바로 승낙할 터였다.

 

싫당게. 나는 싫다고. 나 잔 카만히 냅 둬. 허매, 미치것네이.”

 

사월이는 앉은 채로 한마치의 등에 대고 악을 썼다. 한마치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는 숨을 씩씩거리며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했다. 있는 힘껏 호미 날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돌멩이가 있었는지 호미에서 쨍 소리가 나며 불꽃이 튀었다. 손목이 얼얼했다. 언제 왔는지 한마치가 다가와 그녀의 양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뜨거운 손바닥이었다. 소름이 확 끼쳤다. 어깨를 홱 돌려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한마치는 한숨을 내쉬더니 가 버렸다.

 

사월이는 골라 놓은 밭에 열무 씨와 물외 씨를 심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씨근덕거리며 일을 했다. 밭 가장자리를 빙 둘러 옥수수까지 심었다. 어느 새 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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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5 - [소설/정이춘자] - 피어라 꽃(1)-머리말-정이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