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참에도 한마치가 사월이에게 왔다. 한마치는 이번 달 보름에는 사월이 부모님께 청을 넣겠다고 하였다. 오늘이 열사흘이니 이틀 후면 한마치의 부모님이 그녀의 부모님께 청혼할 것이다. 한마치는 식구며 일가친척도 많고, 살림도 포실했다. 부모님 보기에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가난한 말총이보다 한마치가 사윗감으로 더 나을 것이다.
열흘 전 사월이가 말총이를 따라간 것도 딴은 그래서였다. 그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나물바구니를 끼고 쫓아간 것이다. 누가 볼까 무서웠지만 말총이에게 손까지 잡혀 주었다. 그랬으면 사내가 똑 부러지게 일을 매듭지어야지 그는 지금까지도 어리벙벙한 모양이었다.
한마치가 사월이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동무들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마치 사월이가 한마치 색시인 것처럼 대했다. 아니라고 도리질을 쳐도 동무들은 거짓부렁이라며 짓궂게 놀렸다. 미칠 지경이었다.
엊저녁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넌지시 이야기를 하다 그녀를 보는 것이었다. 중매쟁이 드나들 때 시집보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녀는 마음이 불안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꼼짝없이 한마치의 색시가 되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동네라야 서로 뻔히 다 아는 목장 마을에서 말총이와 단둘이 만나기도 어려웠다. 처녀 총각이 만나는 것도 큰 흉인데 한마치까지 얽혀 있어 사월이는 살얼음판 위에 선 것 같았다. 그녀가 말총이를 만나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화냥년이라 손가락질할 것이다.
‘멍충이, 빙신.’
사월이는 데친 나물을 들고 일부러 석성까지 갔다. 석성 위에 보자기를 깔았다. 햇빛에 눈이 부셨다. 힐끗 보니 말총이가 말똥을 치우며 오고 있었다. 보자기 위에 데친 고사리를 널었다. 통통한 고사리를 겹치지 않게 하나하나 폈다. 말총이는 누가 보나 둘러보는 듯 두리번거리며 석성 곁으로 다가왔다.
“쩌번 참에 만났든 데서 기다리께. 지금 와.”
그는 낮은 소리로 말하고 금세 멀어졌다.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의 여운에 귀까지 먹먹했다. 사월이는 좋아 돌아서 방긋 웃었다. 그녀는 뛰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재 묻은 치맛자락을 탈탈 털었다.
말총이는 집으로 갔다. 바가지에 물을 떠서 낯을 씻고 목도 씻었다. 입에 물을 머금고는 뱉어내기를 두어 번 하고 낫과 새끼줄을 챙겼다. 뒷산으로 바삐 걸었다. 누가 볼까 봐 발걸음이 갈수록 빨라졌다. 사월이가 그 사이 먼저 와서 기다릴까 걱정이 되었다. 산에 올라 둘러보았다. 사월이는 없었다. 말총이는 낫과 새끼줄을 저만치 던져놓고 멀리까지 잘 보이는 곳에 섰다. 사월이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종종걸음을 치며 오고 있었다. 사월이의 땋은 머리채가 햇빛에 반짝거렸다. 말총이는 얼른 조금 더 올라가 풀숲 속에 숨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조바심이 나서 내다보니 사월이가 오솔길로 올라섰다. 다시 숨었다. 치마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맨발에 짚신을 신은 발이 보였다. 말총이의 바로 앞까지 왔다. 말총이는 벌떡 일어나 길로 나섰다.
"흡"
사월이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말총이는 사월이 손목을 잡아끌고 방금 제가 앉았던 자리로 데려갔다. 풀을 눕혀 앉기 좋게 만들어놓은 곳에 사월이를 앉혔다. 볼이 발그레해진 사월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사월이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사월이가 웃으면 근처가 더 밝아지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월이 머리에서 동백기름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들이마시니 귀가 머는 듯 아득해졌다. 몸이 땅 속까지 가라앉는 것만 같고, 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말총이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사월이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사월이는 가만히 있었다. 손에서 땀이 났다.
말총이가 손을 놓고 사월이의 볼을 양 손으로 감싸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사월이의 눈동자가 늦가을 참나무 이파리 색인 걸 처음 알았다. 눈동자 속에 하늘이 담기고,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사월이가 눈꺼풀을 내리며 가만히 고개를 틀었다. 반듯한 이마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말총이는 사월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볼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조금 떨어져 앉아 제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말총이는 사월이의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사월아. 나는 니가 좋다. 너는 어쩌냐?”
사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바심이 났다.
“니 속을 모르것다. 말을 잔 해봐라.”
“나도 니가 좋은게 나왔재.”
말총이는 사월이를 꽉 껴안았다. 머리칼에서 나는 동백기름 냄새에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월이가 말총이를 밀어내더니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녀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란디 저어......"
“어째 그라냐?”
“우리 집서 지금 혼인을 서두르고 있은게 빨리 청을 넣어.”
“알었다. 내 그리 하께.”
말울음 소리에 둘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일어섰다. 일어서 들판을 보니 목자들이 말 우물 근처에 모여 있었다. 말들이 우물가로 오지 못하게 하는 걸로 보아 우물 청소를 하는 모양이었다. 말총이도 가야했다. 지금 달려가도 늦게 나왔다고 군두가 경을 칠 것이다. 말총이는 삭정이를 건성으로 모아서 들쳐 메고 산 아래로 달렸다.
말총이 아버지가 사월이의 집으로 찾아가 청혼을 했다. 다음 날 한마치의 부모님도 사월이 부모님께 청혼을 했다.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산물이 풍부했다. 지력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관마를 공급하는 말목장이 있었다. 진도 감목관은 해남 화원의 말목장까지 속장으로 거느렸다. 한때 진도 부사가 감목관을 겸하기도 했지만 벼슬자리를 돈으로 사고팔게 되면서부터 감목관은 해남 화원 목장에 거처를 잡았다.
중앙 정부에서는 남해의 요해지라 하여 진도에 정삼품 당상관을 부사로 임명하였다. 유사시에는 영광, 해남, 함평, 영암 네 개 군의 군수와 진도 내의 아홉 개 수군의 만호뿐만 아니라 임자, 지도, 목포, 마량 등의 수군만호까지 지휘할 수 있는 병권을 주었다.
지산 말목장은 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느긋하게 펼쳐진 지력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말목장은 말 먹일 물이 풍부하고 마초가 잘 자랐다.
진도 부사와 감목관의 가장 큰 임무는 마정(馬政)이었다. 진도의 주산이라는 진도읍의 북산 철마산 마조단에서는 마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매년 제사를 지냈다. 해마다 징발할 말의 수를 채우지 못하면 벼슬자리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마의까지 두었지만 그 말을 키우는 목자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말총이는 지산목장에서 대대로 살아온 목자의 아들이었다. 말총이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지만 외롭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월이와 함께 노느라 심심한 줄 몰랐다. 말총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돌보는 말의 갈기를 빗겨주고, 말똥도 치우고, 가을에 마초를 베어 말리는 일을 하였다.
말총이의 집은 석성 성벽에 잇대어 지은 한 칸짜리 오막살이집이었다.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서면 낮에도 방이 컴컴했고, 어린 그의 키에도 머리가 천장에 닿았다. 방 가운데에서는 그나마 똑바로 설 수 있었지만 방구석은 지붕과 땅바닥이 맞닿아 있어 천장마저 없었다. 그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잠자는 것밖에 없었으니 사실 천장이 머리에 닿건 말건 상관은 없었다. 거적문 바로 앞이 부엌이었다. 지붕 아래 있긴 했지만 비가 많이 오면 아궁이가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목자들은 노비가 아니었지만 노비나 매한가지였다. 목장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그 자식도 목자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총이는 목장에서 사는 것이 좋았다. 석성으로 둘러싸인 목장은 그의 집이자 놀이터였다.
말총이는 말을 좋아했다. 말도 말총이를 잘 따랐다. 아이들은 군부나 군두 몰래 말을 타고 놀았다. 말 위에서 부리는 기술에도 단계가 있었다. 달리는 속도뿐 아니라 달리는 말 위에서 만세 부르기, 말 등에서 뒤로 돌아앉기, 말배에 바짝 붙어 달리기 등 배워야 할 기술은 끝이 없었다.
말총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장군 놀이’였다. 말을 몰아 서로에게 돌진하여 막대기를 부딪쳐서 부러지는 쪽이 지는 놀이였다. ‘장군 놀이’는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다. 달리는 말위에서 막대기를 칼처럼 쳐들고 맞은편 적을 향해 질주할 때는 진짜 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진 아이는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린 후 “장군님, 부르셨습니까?” 하고 말해야 했다. 이긴 아이는 한참 동안 말 위에서 거드름을 잔뜩 피울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수록 말총이가 거드름을 피우는 횟수가 늘어갔다. 말총이는 장군이 되고 싶었다. 장군이 되면 이기는 싸움만 할 자신이 있었다. 말총이는 타고 놀았던 말들이 군마로 뽑혀 떠날 때마다 말과 함께 떠나는 꿈을 꾸었다.
목자 호적에 오르자마자 말총이에게도 말이 배당되었다. 목자는 네 명이 한 군이 되어 백이십 필의 말을 돌보았다. 매년 팔십오 필의 새끼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열여섯 살이 되어 목자 호적에 오른 후에 알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일할 때와 제 앞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은 달랐다. 날마다 빗질해 주어야 할 말이 삼십 마리였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일 년 내내 목장은 쉴 새가 없었다. 게다가 목장에 딸린 둔토의 농사까지 지어야 했다. 늦가을 목장은 바빠서 혀를 빼물 지경이었다. 가을걷이를 하면서 겨울에 먹일 마초까지 베어 말려야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어렸을 적 깔깔거리며 장군 놀이에 열중하는 말총이를 왠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 눈길이 언제 가슴에 콱 박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고 말리라.’ 말총이는 다짐, 또 다짐하였다.
말총이는 아버지, 사월이 아버지, 한마치의 아버지와 같은 군이었다. 한마치의 아버지 한씨는 이미 병이 들어 빼빼 마르고, 기침이 끊이지 않았지만 목자 호적에서 빼주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이 틈틈이 아버지의 몫을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씨의 병은 더해만 갔다. 한씨는 육십 살이 되자 비로소 목자 역을 벗었다. 그러나 그는 역에서 벗어난 지 한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성 아부지 고생만 하다 가셔부러서 어뜨케 해?”
“마지막에는 고생 안 하셨어야. 짚불 꺼지데끼 조용히 숨 놓으시드라. 그라믄 됐재.”
말총이보다 두 살 많은 한마치는 마치 세상을 다 산 노인처럼 말했다. 그는 다른 군에 배속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한마치는 말총이 목자가 된 얼마 후에 은밀히 동학을 전해주었다. 말총이 목자 생활을 시작한 후 웃음을 잃어 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목자들 중에 동학도인들이 꽤 있다고 들었지만 자신도 누가 동학도인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감목관이나 군두에게 들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며 동학을 했다고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의신에 가면 동학을 전해 주는 양반네가 있다고, 다음에 때가 되면 데려가 주겠다고 하였다.
동학 세상에는 너도 나도 모두 한울님이라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다는 말을 듣고 말총이는 귀에 벼락을 맞은 듯 했다. 의신에 다녀올 때마다 한마치는 동학 이야기뿐 아니라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그러나 올봄 들어서면서부터 한마치는 말총이에게 오지 않았다. 말총이는 한마치가 새끼 낳는 말들 돌보느라 바빠서 그런가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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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5 - [소설/정이춘자] - 피어라 꽃(2)-제1화-정이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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