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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정이춘자

피어라 꽃(3회) - 하조도 뱃사람 박중진


하조도 뱃사람 박중진


박중진은 손행권과 함께 영광 법성포로 향했다. 모아 놓은 건어물을 넘기고, 그물을 짤 면사와 칡줄도 사야 했다. 손행권은 진도 고군 임성포 사람이다. 박중진과 손행권의 아내는 해남 삼촌면에서 함께 자란 동무였다. 아내들이 동향인지라 그들도 서로 친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번 법성포행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박중진은 항상 법성포 박중양과 어물 거래를 하였다. 그는 영광, 무장 등지에 물건을 넘기는 객주였다. 박중진은 그의 집에서 일하는 김유복을 통해 그들이 동학도인인 줄을 알고 있었다. 박중진이 박중양에게 은밀히 동학에 대해 물었다. 박중진에게 띄엄띄엄 동학을 전하던 박중양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박중진을 위해 태인 대접주 최경선을 한 번 모셔오겠노라고 했다.

 

들물을 따라 수월하게 법성포에 닿았다. 박중양에게 어물을 넘기고 조창에 와 있다는 김유복을 만나러 갔다. 조창들마다 배로 실어온 곡식을 들이느라 바쁘다. 법성포는 전라도 스물일곱 고을 전세와 대동미가 모이는 곳이다. 전라도 조창은 본시 영산포에 있었다.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조세를 거두어들이기에는 편리했다. 그러나 토사가 쌓여 수로가 험해지자 조운선 같은 큰 배는 이용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법성포에는 조창 지키는 조군이 천여 명 넘게 주둔하고 있었다. 법성포는 또한 서해안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다.

무장 조창으로 가니 김유복이 배에서 쌀섬을 지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조기파시 때마다 만나 친한 사이였다. 김유복이 먼저 성님, 성님하며 붙임성 있게 굴어 그들도 김유복을 이제는 스스럼없이 아우라 불렀다.

어이, 유복이 동상!”

김유복은 쌀섬을 지고 오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소리를 듣고는 자라처럼 고개를 빼들었다. 나락 먼지가 하얗게 앉은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성님, 쪼깐만 여기서 기다리쇼이. 이놈만 넣고 나믄 끝이요.”

김유복은 금방 나왔다. 수건으로 어깨와 머리칼을 때리니 먼지가 풀썩풀썩 인다.

아이고 징한 놈의 조세. 금방 져 나른 조세가 뭔 줄 아시오? 군병 훈련도감미라요. 넨장맞을, 군병 조세는 꼬박꼬박 받아 처묵음서 왜놈, 뙤놈, 로서아놈, 미국놈에 또 뭐시냐 불란 뭔 나라까지 뎀빈디 밥은 넘어가는 모냥이여라우?”

나도 새끼들 믹일 쌀은 없어도 조세는 열댓 가지 냈네야. 닌장맞을 나라여.”

손행권이 그의 말을 받아 투덜거렸다. 손행권은 진도 임성포에서 살지만 논농사도 지었기 때문에 조세라면 신물이 났다. 어선 두 척으로 어세만 내는 박중진은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손행권이 심심한지 김유복에게 농을 걸었다. 그는 사람됨이 솔직하고 체면을 차리지 않아 젊은이들과 잘 어울렸다.

자네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네이. 중양이 형님 집에서 조기 간하다가, 무장 조창 채우다가 또 뭔 일 항가?”

헤헤, 성님은 내가 허는 일 다 셀라면 날 샐 것이요. 나가 말도 쪼까 타고라우, 또 낚시랑 그물질도 솔찬히 하고라이, 총질해서 노루, 퇴깽이 정도는 엔간히 맞추고라이, 그라고도 한 댓 가지 남었는디, 그것은 담에 이야기 해 주께라이.”

김유복이 왈짜처럼 다리를 건들거리자 손행권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펄쩍 뛰었다.

아이고야. 자네가 여간 재주가 많안 모양이여? 내가 몰라봐 부렀네이. 나가 인자부텀 성님으로 모시께라우.”

손행권이 부러 깊이 허리를 숙였다. 손행권이 계속 고개를 들지 않자 김유복이 어쩔 줄 몰라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오매, 어째 이라시요. 성님. 내가 잘못했소. 성님보고 내가 반가워갖고 미쳤는갑소. 이렇게 날 성가시게 하지 말고 그냥 칵 죽에부쇼.”

니 말에는 내가 못 당하것다. 인자 너는 어디로 갈 참이냐?”

지가 중양이 성님 집으로 최 접주님 모시고 저녁에 가께라우. 그라믄 성님들은 여그서 포구 더 귀갱하시다가 살살 올라가 계시씨요. 나는 얼렁 무장 가서 조세 보고하고 다시 오께라이.”

올 때는 그라믄 걸어온가?”

말타고 와라우. 성님.”

와따이. 말 쪼까 탄단 말이 진짠가비다. 말타믄 무장서 법성포까지 얼마나 걸린가?”

반 시진이믄 떡을 치요. 나가 쪼깨 탄께라우.”

김유복은 배를 타고 떠나고, 그들은 조창의 뒷길을 따라 걸었다. 그때 바로 옆 조창에서 해남 삼촌리요!’ 하고 외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처가 동네라 박중진과 손행권이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항구에 댄 배에서 나락 가마니를 져 나르고, 가마니가 들어갈 때마다 서리가 서류에 표시했다.

선치미 쉰아홉 섬, 대동치미 서른 섬, 호조 조군 호과미 스무 섬, 상납미 백팔십 섬이요.”

나락이 산처럼 쌓였다. 그 규모에 놀라 손행권이 입을 벌렸다. 조세를 보니 과연 농토가 많은 해남이었다. 조세 규모는 진도보다 해남이 더 크다. 조정에서는 한때 해남을 군으로 격상하려다 해남 백성들의 반발로 현으로 존속시켰다. 규모에 따라 부, , 현이 되는데 부사는 정3, 군수는 정4, 현감은 종6품이었다. 높은 벼슬일수록 자릿값이 비싼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해남은 그래서 관의 수탈이 덜하다는 소문이었다.

 

초겨울 해가 일찍 졌다. 저녁상을 물리자 김유복이 갓을 쓴 선비와 함께 들어왔다. 박중진과 손행권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최경선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절했다. 서른다섯 살이라는 그는 둥글넓적한 얼굴에 젊은 사람답지 않게 무척 점잖아 보였다.

자리를 잡자, 최경선이 박중진을 향해 무엇이 궁금했는지 물었다.

유학은 조상을 섬기고 충효하락 한디 동학은 뭣을 섬기고 어뜨케 살아라고 하요?”

사람은 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한울님이지요. 그래서 굳이 무엇을 섬기냐고 물으면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을 섬기라고 해야겠지요.”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그라믄 어쩐다요?”

최경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뭐시라고라? 그라믄 도적놈, 살인자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단 말이요?”

, 그렇습니다. 자기가 한울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줄 알면 그런 짓을 안 했겠지요.”

둘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침묵 속에 박중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는지를 어뜨케 안다요? 그라믄 샌님은 맘 속에 있는 한울님을 만나 봤소?”

.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도 한울님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챘습니다. 동학에서는 주문을 외우는데 그 주문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집중해서 외우다 보면 한울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뜨케 만나샜소? 샌님은 문자 공부를 많이 해서 만난 거 아니요?”

아닙니다. 주문을 외우다 만났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문을 외우면 한울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면서 눈물이 나더이다. 그분께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고맙다는 마음이 가득차고, 평안해지고 하는 걸 보면서 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기에 가능한 변화라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한울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니 여러분도 주문을 외우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한울님을 만날 것입니다.”

동학을 하믄 나라에서 잡아 가둔단디라우. 보아하니 양반이신 것 같은디 뭣이 성가새서 하는지 몰르것소. 그것이 목숨을 걸 만한 것이요?”

목숨을 걸 만한 것인지 저울질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라 해서 제가 옳다 믿는 것을 그만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라에서 동학을 허하면 하시겠습니까? 어르신이 동학을 하고 안 하고가 어르신의 뜻에 있지 않고 오직 나라의 뜻에 달렸습니까?”

최경선은 박중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비난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몹시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박중진이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자 손행권이 말했다.

목숨이 없어지믄 내가 모시는 한울님도 사라지는 것인디 신중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것소?”

하지만 저라면 한울님을 모르고 백날을 사느니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하루를 살겠습니다. 공자님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동학 주문을 가르쳐 주시요.”


박중진이 결심을 한 듯 요청하였다. 그러나 최경선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입도하면 그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동학의 문을 잠깐 열어 드린 것뿐이니, 그 문에 들어설지 말지는 좀 더 알아 보시고,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진도에도 동학도가 있는데 가까우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좋으실 것입니다.”

진도에도 있소? 어디 사는 누구요?”

손행권이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의신면 만길리에 사는 나봉익과 양순달입니다. 나주 사람 나치현이 일 년 전에 거기로 이사 가서 도를 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신면 나봉익이라면 잘 알재라이. 그 사람이 동학도인인 줄은 몰랐네이.”

최경선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동학을 전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누가 동학을 갈쳐 주더냐고 묻거든 다른 사람 이름은 일절 알은체 마시고 제 이름만을 말하십시오.”

뭔 말인지 알겄소. 동학을 항게 뭣이 좋습디여? 죽을 각오라 함서도 얼굴이 펜안해 보여서 하는 말이요.”

한울님을 제 안에 모시니 무서운 것이 없고, 언제나 함께 있으니 외롭지 않아 좋습니다. 주문을 외우고, 심고를 하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우니 좋습니다. 동학을 전하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니 또 좋습니다.”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온 몸으로 듣고 있던 박중진이 물었다.

심고는 뭣이다요?”

무엇이든지 한울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유학에서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사자소학에 출필고지 반필배알(出必告之 反必拜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들고 날 때 부모님께 고하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듯이 동학에서도 한울님께 항상 고하라고 합니다. ‘한울님, 제가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그 친구랑 잘 만나고 오겠습니다. 한울님, 배 타고 고기 잡으러 갑니다. 많이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먹을 만큼만 잡아오겠습니다.’ 하고요. 심고를 하다 보면 저절로 한울님이 계신 줄 알아지고, 또 한울님답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달아집니다.”

그라믄 동학에서는 부모님보다 한울님을 높이 보요?”

부모님도 한울이니 더 높이 보고 말 것이 있겠습니까? 부모님이 곧 한울님이요, 한울님이 곧 부모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최경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박중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중진이 결심을 한 듯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는 꼭 입도를 하고 싶구만이라우. 다음 달에 또 올 것인게 그 때 받아주씨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면 입도하지 않아도 됩니다동학을 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합니다. 나라에서 허하더라도 신중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한울님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도 없고 내 안에 있다고 해서 업수이여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내 안에 있는 줄 알면서 없다고 속일 수 있는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좌중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박중양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자리를 마칠까라우? 중진이 자네 시원하게 궁금증이 잘 풀렸는가?”

최경선은 박중진과 손행권에게 정중하게 절을 하고 김유복과 함께 떠났다. 최경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중진이 말했다.

참말로 조단조단 말도 잘하시네이. 동학을 얼마나 하믄 저 경지가 된당가?”

저분 말 듣고 동학에 입도한 이가 멫 천 명이라네. 참말로 인물이재이. 태인에 사시는디 저분 형님이 성균관 진사시라든가? 내가 동학을 했은게 저런 분들하고 양존함서 살재. 난 그것만으로도 동학이 좋네. 사람 차별 안 하는 거.”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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