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활약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해월에 열광했을까요? 어떻게 전 인구의 3할 가까이가 동학도가 되었을까요?)
4. 꽃은 져도 열매는 남아
1865년 수운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해월은 비통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에게 남겨진 과업을 소리 없이 실천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처형으로 인하여 그도 용담정을 떠나야 했고 34년간의 기나긴 도망자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강원도와 충청도 단양을 거쳐 1884년 이후, 해월이 비교적 오래 머문 곳은 경상도 상주였다.
상주고을은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화동, 화서, 화남, 화북면이 바로 그곳인데 사람들은 통털어 그곳을 화사면이라 부르기도 했다. 해월은 백두대간을 타고 하루에 백여 리 이상을 바람처럼 날아다니며 포접을 했다. 그 결과 화사지역의 사람들은 거의 다 도인이 되었다. 해월의 달변을 듣고 있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기 때문이다. 해월이 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이미 도인이 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이끌어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상주 고을에는 양반토호세력이 많았다. 비옥한 땅에 곶감과 면화와 누에로 재산을 키운 양반들이 마을마다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재산을 불리고 있었다. 해월은 이런 양반가들에게도 동학을 전하는 데 열성을 다하였다. 화사지역에서 해월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은 팔음산 아래의 화동면(化東面) 덕곡(德谷)이었다.
그곳에서 기반을 잡고 살아온 신씨 가문의 신광서는 해월에게는 매우 신임을 받는 접주였다. 그는 길죽한 얼굴에 구렛나루가 길고 짙은 눈썹을 가졌는데 같은 마을의 정기복과 더불어 화동지역의 각 집을 돌면서 포접을 해 나갔다.
어느 비 내리는 여름 날, 해월은 삿갓을 쓰고 덕곡으로 내려갔다. 신광서는 해월을 맞이하여 사랑으로 모시고 정기복을 불렀다. 그리고 집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숲에서 죽순을 베어 내서 반찬으로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해월은 죽순이 올라온 밥상을 대하고 그 자리에서 설법을 했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이 바로 하늘이니 먹는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해야 하지요. 오늘은 귀한 죽순을 장만하셨구려. 이 죽순 나물을 저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모두 함께 먹도록 합시다.”
신광서는 고개를 숙이며 죽순나물을 마루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계집종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스승의 뜻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신광서는 면화를 재배하고 곶감을 만드느라 집에 종이 많았다. 빈부귀천이 따로 없고 모두 하늘을 모시는 귀한 사람들이라는 해월의 설법 이후로 종들과 가족들이 밥상을 함께 하도록 했다. 그 전에는 감히 종들이 양반들과 겸상을 할 수도 없었다. 종들은 양반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부엌에서 따로 먹어야 했다. 최근에 해월 덕분에 부엌 밖으로 나와 먹게 되었다. 비로소 사람대접을 받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 반찬까지 함께 나누어먹자고 하지 않는가.
부엌에서 보리밥만 먹어야 했던 신광서와 정기복의 종들은 해월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더 커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도인이 되겠다고 나섰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종과 양반이 차별 없이 대접을 받는 것이 동학이라고 하여 화동에서도 도인들이 날로 늘어갔다.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입도식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해월이 입도식을 하는 날에는 신광서의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넓은 마당에 모인 도인들은 해월의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며 들었다. 입도하는 데에는 종이나 주인이나 어떤 차별도 두지 않았다.
주인양반들도 처음에는 종들과 공대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그렇게 하고나니 자기 마음에 평화로운 기운이 넘쳐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그렇게 경이로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미천하다고 생각했던 상대를 존중하니 자기 마음에 화평이 찾아 들게 된다는 것을 해월 말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종들도 예전에는 마지못해 굴종의 눈빛을 보냈으나 주인으로부터 존중을 받게 되니 진심어린 존경의 눈빛을 보내게 되었다. 주변의 양반사회에서는 하인들에게 존대하는 것을 도덕을 깬 것처럼 여기고 금수의 짓거리로 여기며 손가락질 했다. 그러나 실제 경험자들은 상호존중이야 말로 엄청난 힘을 서로에게 주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또 다시 해월을 경이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동학은 믿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비로소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키가 작고 행동이 민첩한 정기복은 산 속에 깊이 숨어들어 가는 화전민을 찾아서 포접을 넓혀 갔다. 그의 집은 누에를 많이 쳐서 뽕밭을 넓게 가지고 있었다. 산자락 하나가 모두 뽕밭이었는데 초여름이면 오디를 따기 위해 몰려든 화전민들에게도 포접을 했다.
화남에 사는 강선보는 착실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지역의 토호였다. 가을달이 무척 밝은 밤이었다. 강선보는 그날 잡곡들을 터느라 무척 피곤한 몸으로 저녁상을 물리고 사랑에서 쉬고 있었다. 가을걷이에 바빴던 종들도 일찍 자리에 든 눈치였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실례합니다. 지나가는 객입니다. 잠시 머물 수는 없을까요?”
강선보는 짚신을 찾아 신고 대문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살림이 누추해서 누구를 대접할 처지가 못 됩니대이. 하룻밤 묵을 데를 찾으실라만 다른 데를 가보세요.”
축 늘어진 바랑을 진 사내는 예사롭지 않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집안에 남은 일이 있으면 맡겨주십시오. 가을에는 깨진 항아리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일손이 한명 늘면 좋지 않겠습니까? 헛간에서 자도 좋으니 하룻밤 묵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선보는 헛간에 가득 쌓아놓은 콩대가 생각났다. 올콩을 베어서 종들에게 마당에서 말리게 했지만 아직 털지는 못했다. 희미하게 선 달무리에 혹시 내일 비가 내릴까봐 헛간에 쌓아두었다.
“콩타작을 해 보셨으요?”
강선보는 나이가 지극한 행인에게 무작정 일을 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왠지 사내가 무엇인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내칠 수가 없었다.
“그럼요. 날이 어둡지만 한 번 해 보여드리지요.”
사내는 급하게 바랑을 내려놓고 헛간 구석에 말아서 세워놓은 덕석을 꺼내어 깐 뒤 쌓인 콩대를 마당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강선보는 한밤중에 콩을 턴다는 사실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잠자코 사내가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당에 콩을 모아 놓고 사내는 도리깨를 찾아서 조심조심 내리쳤다. 타닥타닥 콩대에 떨어지는 도리깨의 힘으로 잘 마른 콩깍지에서 콩이 쏟아져 나왔다.
“많이 해보신 솜씨네요. 그런데 이 오지에는 웬일로 오싰어요?”
강선보는 사내가 일을 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곁에 가서 땅바닥으로 튀어 나온 콩을 주워 덕석 위로 던졌다. 콩대에는 남아 있는 콩이 별로 없었다. 사내는 도리깨질을 아주 잘했다. 너무 세게 내리치면 콩대만 부러질 뿐 안에 들어 있는 콩알이 나오지 않는데 자근자근 잔힘을 부려서 콩이 빠져 나오게 하고 있었다.
“콩이 아무런 기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랍니다. 이 콩에도 기운이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도리깨로 필요한 기운만 보내니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에는 다 기운이 서로에게 흐르고 있지요.”
사내는 조심스럽게 빈 콩대를 추려 내어 지푸라기로 능숙하게 만든 새끼줄로 다발을 만들어 한 귀퉁이에 세워놓았다.
‘혹시 소문에 들리는 해월선생인가?’
강선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선보는 이미 동학과 동학도를 이끌고 있는 해월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다. 청년 시절 자신이 도남서원에 수시로 드나들던 시절부터 상주의 유학자들은 동학을 비도라 칭하고 아주 심하게 반대를 했다. 그러나 강선보는 동학의 주문수련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선비님은 하늘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선보는 소문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험에 드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인의예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태껏 유학도로 살아왔습니다. 과거를 볼라고 갔지만 번번이 낙방을 해가지고 이제는 가업을 이으민서 살라고 합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학문의 길을 가지 않으만, 금수와 다를 기 뭐가 있겠습니까?”
사내는 다시 헛간에서 콩대를 꺼내 도리깨질을 하면서 강선보를 바라보았다. 먹구름 한 장이 달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보름달을 가리진 못해서 사내와 강선보는 서로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인의예지가 하늘의 뜻이라면 세상이 왜 이렇게 어지럽게 되었을까요? 관리들은 누구나 인의예지를 입에 달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이 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기야…….”
강선보는 말문이 막혔다. 관리들이 타락해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초라한 대답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오가작통법을 강화시키고 있는 관리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할 말이 없어졌다.
“나라는 백성들한테 해 주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 세금을 바쳐야 됩니다. 나라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고요. 백성들은 뭐를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요?”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익숙하게 도리깨질을 했다, 강선보는 덕석을 털어 사내가 쏟아낸 콩을 주섬주섬 모아서 바구니에 담았다. 벌써 몇 바구니에 콩이 찼다. 사내는 손길이 매우 빨랐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진지한 기색을 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잘 먹고 살면 선비의 도리를 잘 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강선보는 사내의 물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부농은 아니고 중농정도 되게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집 살림도 넉넉하지는 못합니대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거둬가고 저한테 직접 못 물리는 거는 종들한테 군포를 물리가지고, 암만 양반이라 케도 세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이 보기에도 세금이 과하지 않던가요?”
“양반집안이 그렇다면 소작농은 어떠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워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산속으로 도망을 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강선보는 확신에 차서 한마디 한마디를 던지면서 일을 해 나가고 있는 사내의 말에 점점 빠져 들어갔다. 사내는 어느새 콩대를 거의 다 두들기고 다시 한 번 손으로 콩대를 들고 흔들어 남아 있는 콩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강선보가 빈 콩대를 다발로 묶어 마당 한 귀퉁이에 세워 두었다. 좋은 불쏘시개가 될 것이다. 다발 하나는 마당 가운데에 놓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매캐하니 피어올랐다.
“사랑으로 드십시오. 요기하실 것을 내오겠습니다.”
강선보는 사내를 사랑으로 들게 했다. 종이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을 차려 내왔다. 사내는 사랑으로 들어와서 밥상을 한 쪽으로 밀어둔 채 바랑에서 책 한권을 꺼내어 강선보에게 내밀었다.
“선비님, 이 책을 잠시 읽어 보세요. 이 책에는 제 스승의 가르침이 그대로 들어 있다오.”
강선보는 사내가 내민 책을 받아들고 후루룩 넘기며 물었다.
“여기에 들어있는 중심 생각은 무엇입니까?”
“세상 만물에 하늘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늘을 모시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이야기이지요.”
강선보는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일찍 몰라 봬서 죄송합니대이. 예서제서 마캉 동학을 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대이. 그캐도 이리 선생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대이. 해월 선생님이 맞지요?”
사내는 강선보의 손을 잡으며 미소로 답했다.
“선비님, 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콩깍지 하나에도 기운이 흐르고 모든 기운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비님과 내가 만난 것도 기운의 흐름입니다. 오늘 제 말이 이해가 된다면 가끔 한 번씩 찾아와서 스승의 말씀을 전하고 싶소이다. 혹 함께 들을만한 이웃들이 있다면 함께 들으셔도 좋겠지요.”
그러나 강선보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관에서는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린 터였다. 몹시 끌리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었다.
“관에서 동학을 믿는 사람은 신고를 하라케요. 오가구를 묶어서 일 통으로 하고 통마다 동학을 믿는 사람을 찾아내라 카는데 사람들이 모일까요?”
해월이 잠시 눈을 감았다. 강선보는 그런 해월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해월이 눈을 뜨고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어갔다.
“옳은 일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연기가 피어서 퍼져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진리가 퍼져 나가는 것도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지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고 모든 짐승이 다 평등하며 모든 사물이 다 평등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지요. 하늘의 뜻은 막을 수 없답니다.”
강선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밀어두었던 밥상을 해월 앞으로 놓아주며 해월에게 식사를 권했다. 해월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밥술이 굵었지만 찬찬히 씹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해월의 얼굴에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함이 흐르고 있었다.
강선보는 해월이 밥을 다 먹고 물까지 마시고 나자 다시 조용히 물었다.
“어르신은 하늘의 뜻으로 뭐를 이룰라카십니까?”
해월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담은 눈으로 강선보를 바라보았다.
“하늘의 뜻이 이뤄지면 모든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어째가이고 이룰라 카시는가요?”
강선보는 점점 해월의 뜻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한 길만 있는 건 아니지요. 우선은 각자 수행을 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늘을 알아채고 지극한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반은 이룬 셈입니다.”
“혼자 지극한 마음을 가져가이고 세상이 달라지까요?”
“맑은 정신으로 마음을 모으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선비님께서는 오늘 저를 만난 것을 계기로 새벽마다 지극한 기운을 모아서 기도를 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부터 모든 사물이 선비님께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저 바람이, 그리고 저 나뭇잎 하나가 선비님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답니다.”
해월은 차분한 음색으로 강선보에게 우선 심고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이나 하고 난 다음에 하늘에 조용히, 성심으로 알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심고는 그것만으로도 삶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니 혼자서라도 시작해보라 일렀다. 그러나 강선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기운이 모이면 모든 사물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다음 길은 다음 날 듣기로 하겠습니대이. 오늘 밤에는 일을 많이 하샜으이 고마 푹 쉬시지요.”
강선보는 사랑채를 나와서 마당가에 섰다. 먹구름은 어딘가로 가 버리고 보름달이 중천에 떠서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마당 가운데에서 타던 콩대는 거의 다 타서 실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가끔 타닥타닥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루에 앉아서 생각에 젖었다. 올해도 가뭄이 심해서 벼농사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잡곡이나 겨우 거두었지 나락은 수확량이 평년에 비해 반도 못 되었다. 남에게 빌려준 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해는 도지를 받기도 힘들었다.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더더욱 힘들 것이었다. 그는 불안감에 싸여 해월이 머문 사랑방을 바라보았다. 해월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리었다. 웃목에 밀어 두었던 짚을 끌어다 새끼를 꼬는지 손을 비비고 있었다.
강선보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사는 재종형제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해월의 설법을 들어보라고 권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해월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관아에서 막고 있는 동학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두려움이 앞섰다. 그는 내일쯤 재종형제들을 만나서 동학에 대해서 의논을 해보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니 비로소 졸음이 찾아들었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느라 지친 피곤이 그를 잡아끌었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강선보가 일어나서 아침 문안을 드리려고 하니 댓돌 위에 짚신이 사라지고 없었다. 문을 열어보니 가늘고 단단한 새끼줄이 동그랗게 똬리를 튼 채 놓여있었다. 그는 종들을 불러서 해월이 언제 나갔는지 물어 보았다.
“저들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었는기라요.”
“흐흠, 그럼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셨구나.”
강선보는 해월이 인사도 없이 떠나간 것이 몹시 아쉬웠다.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리라. 그런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강선보는 해월을 생각하며 논둑으로 나갔다. 쭉정이로 가득 찬 논이었지만 추수를 하기 위해서 벼를 베라고 종들에게 일렀다. 그리고 그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들판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갈 때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부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는 여기저기 논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강선보는 마을에서 신임이 높았다. 뜻이 굳고 행동이 건실해서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강선보가 무엇을 하자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강선보는 차례로 친척집을 드나들며 말을 꺼내 보았다. 해월이 전해준 하늘의 뜻을 알려주며 천지간에 모든 생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였다.
그러자 재종형제들이 모두 동학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후일 화남 강선보의 집을 찾아온 해월은 소리 없이 인근의 사람들을 모아서 설법을 했다. 입도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청수를 떠놓고 입도식을 했다.
해월은 상주의 깊은 산골에 숨어 살면서 바람처럼 백두대간을 타고 인근의 마을로 내려가 포접을 했다. 화서지역과 모동, 모서지역을 합하여 중화라고 지칭하였는데 이 중화지역은 해월의 주요 포접 대상이었다. 모동은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 백화산맥 아래에 펼쳐진 동네였다. 그는 모동에서 제일 큰 마을인 용호리로 가서 남진갑을 만났다. 남진갑은 인근에서 강선보 못지않게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진갑은 처음 해월을 만나 몇 마디 해보고는 그가 소문으로 알려진 동학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해월에게 큰 절을 올렸다. 해월은 맞절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이 근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는 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늘의 뜻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어 주십시오.”
남진갑은 해월은 마른 몸매와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홀린 듯이 대답을 했다.
“이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옳은 길을 갈차주시고 온 백성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시니 우예 안 따르겠습니까?”
남진갑은 한 동네에 살며 뜻이 건실한 이화춘을 불러 해월에게 소개를 했다.
“둘이 힘을 합쳐가 동학을 퍼뜨리는 데 가진 힘을 다 쏟아 붓겠습니대이.”
해월은 그들의 손을 잡으며 뜨거운 힘을 느꼈다. 남진갑은 해월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도인들의 수를 몇 배로 늘리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해월의 발걸음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도인이 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해월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중화지역에는 동학의 뜨거운 바람이 소리 없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상주성을 중심으로 읍내에서는 도남서원에 불어 닥친 유생들의 반동학 열풍으로 동학에 대한 탄압이 매우 심하였다. 보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토호 양반세력들은 여기저기 상소문을 올리며 동학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모서 지역의 중심지는 용호리에서 가까운 사제 마을이었다. 사제에는 김해 김씨가 뿌리를 내리고 착실하게 살림을 불리고 살고 있었다. 사제 마을의 부자 양반 중에 김현영가가 있었다. 해월은 사제로 들어가 김현영을 만났다. 김현영의 가문은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에는 밥을 지을 때 쌀 뜨물이 냇가로 오리나 흘러내려갔다고 했다. 그만큼 가솔들이 많은 부자집이었다.
김현영은 가산을 착실하게 늘여온 부농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부지런하여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산을 불리어서 농토를 사 들이니 대농이 된 것이다. 김현영은 해월을 만나자 그 뜻에 감동하여 현동 현양의 동생들을 포접하였다. 삼형제는 어렸을 적부터 훌륭한 가문에서 넉넉한 살림 속에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학의 한계를 넘어선 동학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서 해월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김현영 일가는 유무상자의 동학 정신을 실천하여 그 많은 재산을 동학도인들과 나누었다. 전투가 있을 때는 군량미를 대었고 도인들 뒷바라지에 성심을 다했다. 세 형제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이 김현영이었다. 해월은 중화지역에서는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다.
소리 없이 마을마다 나타나서 어린이와 부녀자들 그리고 노인들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잠시라도 새끼를 꼰다든다 하며 쉬는 때가 없이 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해월은 어느 도인의 집에 머물러도 마당이라도 쓸고 나오지 그냥 신세를 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산기슭에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다음 일요일에 계속됩니다.)
'소설 > 경상도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상도편 (7회) -호랑이가 보호하는 사람들 (0) | 2015.07.24 |
---|---|
경상도편(6회)-정나구의 아들 도치를 만나다 (0) | 2015.07.12 |
경상도편(4회)-잠시지만 해방세상을 맛보고... (0) | 2015.06.21 |
경상도 동학(3회) -성난 농민들, 부사는 도망가고 협상 나온 관리는 뺀질거리고 (0) | 2015.06.14 |
경상도 동학(2회) - 정나구, 양반과 손을 잡고 거사를 준비하다. (0) | 2015.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