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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박준혜

은월이(1회) - 자주의 깃발은 함성이 되어

갑신년(1894) 입춘 (130/24)

 

 

 

 

 

강경 포구는 하루 종일 배와 상인들로 북적여서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 노랑나비가 새겨진 자주색 깃발이 휘날리는 배의 수를 세던 금객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한손에 장부를 움켜쥐고, 포구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시끌시끌한 포구의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야트막한 등성이에 올라서자 아스라이 펼쳐진 염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한 염전 한가운데쯤에 은월이가 보였다. 은월이는 소매를 걷어부치고, 치마도 동여맨채 소금을 자루에 담고 있었다. 금객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은월접장!”

은월이는 금객주가 온 줄도 모르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소금을 담고 있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뭐하고 있습니까? 화창한 봄날에....”

비가 올 것 같아서요... 비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은월은 소금 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금객주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은월이를 바라봤다.

금객주! 뭡합니까? 얼른 소금을 담아야지요!”

금객주는 은월이를 따라 비설거지를 도왔다. 일꾼들이 수북이 쌓인 소금가마를 옮기고서야 은월은 바닥에 주저 앉았다.

금객주는 그제서야 은월이에게 장부를 내밀었다. 장부를 한 장씩 넘기던 은월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호탕하게 

 웃었다.

금객주, 고생했습니다.”

때가 잘 맞았습니다.”

거래는 도박이죠.”

몇 년 동안 옥살이하는 도인들 수발이 만만치 않았지요. 이 거래로 어느 정도 만회는 될 것 같습니다.”

은월이는 이마가 아기릉처럼 아담하고 예쁘장하게 볼록하다. 짙은 눈썹은 마치 여자 장비처럼 우렁차고 기세 있는 굴곡으로 쭉 뻗었다. 코도 오똑하니 솟아 도도함을 더했다. 입술은 붉은색이 맴돌고 아랫입술이 두툼하다. 얼굴색은 눈꽃처럼 뽀얗다. 한눈에 보기에도 귀태가 묻오 나지만, 또 한편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황소의 힘이 느껴졌다. 바다처럼 맑은 눈에 힘을 주면 세상을 호령할 듯한 강한 기운으로 기선이 제압될 정도였다. 이제 사십대에 접어든 아낙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는 탱탱해 보였다. 은월은 입가에 웃음을 배어 문 채 금객주를 바라봤다. 금객주도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했다.

이번에 어떤 상품으로 할까요?”

은월은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금객주를 정면으로 주시하며 말했다.

금광에 손을 대야겠습니다.”

금광이라.”

, 얼마 전 기생 회합에서 들은 말입니다.”

일전에 말했던, 논개와 계월향을 모시는 기생들의 비밀 계.”

, 개항장 예기들이 준 정보지요. 왜놈들이 금광에 꽤 관심이 많다고 하더이다.”

조선은 금광을 업신여기는 터라.”

금객주는 금광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 은월은 미소 띤 눈빛으로 그의 눈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금강 사금조차 아이들도 거들떠보지 않지요.”

하지만, 왜놈들이 금에 환장한다면 돈벌이가 될 수 있다?”

금객주는 은월이에 말에 응대했다. 재물을 늘리는데 손발이 탁탁 맞은 터라 은월은 다시 얼굴이 환해지면서 말을 했다.

이인이나 청양, 보령에 금광이 있다 들었습니다. 금강에서 사금을 채취할 수도 있다고 하니, 금객주, 왜놈들보다 먼저 우리가 사들여야겠습니다.”

은월 접장 촉이 그리로 댕기다면이야 바로 해야지요. 하하하.”

몇 해를 함께 동업을 했지만, 은월이의 예민한 감각과 예리함 그리고, 마치 야수의 본능처럼 달려드는 일의 추진력은 사내인 금객주도 감당하기 쉽진 않았다. 금객주는 그런 은월이를 바라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사내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은월은 금객주의 웃음의 의미를 알기에 미소로 응대했다.

은월 접장! 은월 접장!”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영옥이다. 치마를 끈으로 감싸 묶어 가냘픈 몸이지만 목소리는 장군처럼 우렁찼다. 은월이 한 손을 들어 흔들자 영옥이는 양손을 들어 흔들며 뛰어 왔다. 자주색 댕기를 한 머리가 찰랑찰랑 햇살 아래 춤을 췄다. 금객주는 영옥이의 댕기머리를 의아해 하며 쳐다보았다. 눈썰미가 있는 은월이 말했다.

영옥이가 머리를 내렸습니다.”

금객주의 눈이 커지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고 아까워라, 사내들이 이제 무슨 재미로 사노.”

은월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공주, 보은 취회를 다녀오고 생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답을 찾았다고 단숨에 머리를 내리더군요.”

단숨에 결단한 그녀가 더 아름답군요.”

영옥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바로 개벽입니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군요.”

금객주는 큰 바위덩어리가 머리를 치는 듯했다.

기생을 하면서도 아낙들과 아이들에게 두 분 선생 말씀을 가르쳤는데.”

이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더이다.”

이번에는 금객주 큰소리로 웃었다.

대단합니다. 그리 기특한 생각을 다 하다니 말입니다. 은월 접장은 든 하겠습니다. 저리 영특하고 열정 가득한 후예가 있으니 말입니다.”

영옥이가 금새 다가와 은월이의 양손을 붙잡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염전의 좁은 길에 세 사람은 나란히 섰다. 영옥은 다소곳이 금객주에게 예를 다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염전은 붉게 물들었다.

은월 접장, 바람이 차요. 어서 들어가.”

어찌, 염전까지 나왔니?”

, 연산접에서 연락이 왔어요.”

알았다. 어서 들어가자.”

영옥은 은월이 팔짱을 꼈다.

!”

은월은 영옥이를 바라보면서 함께 웃었지만 연산접이라는 말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은월당으로 향했다. 은월당은 강경의 서촌과 중촌 그리고 염촌에 걸쳐 있는 마을에 있다. 강가에 있다고 해서 강변촌이라고 했다. 바다로 유유히 흐르는 탁 트인 금강 하구변에 자리 잡은 은월당은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소박하고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멀리서 보이는 은월당은 혼란에 흔들리는 세상 밖의 풍경인 듯 편안해 보였다. 얼핏 보면 집이 두 채인 듯 보이지만 대나무 사이를 두고 서로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강가 쪽 문 입구도 대나무로 길이 만들어져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한 평짜리 나루터가 있고, 뗏목이 있다. 은월당 마당으로 들어가자 이미 전주댁은 작은 보따리를 싸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은월과 영옥이 팔짱을 끼고 들어오자 전주댁은 사납게 눈총을 쏘며 불편한 속을 있는 대로 내비쳤다. 앞치마를 탁탁 털면서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말을 했다.

머리도 내린 년이 어딜 싸돌아 다니는겨!”

영옥은 은월이 팔짱을 빼면서, 전주댁에게 했다.

왜 또 그러는데!”

전주댁은 눈을 부릅뜨면서 들고 있던 앞치마로 한 대 때릴 기세로 영옥을 쏘아봤다.

저년이! 저년 말버릇하고는! 은월당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했지!”

어매도 참. 진짜 너무해.”

그래서, 내가 뭐랬어? 기생으로 살라고 했지? 니 멋대로 살 거면서 머리는 왜 내려서 지랄이야!”

영옥은 후다닥 안채로 뛰어갔다. 은월은 아무 말 없이 그 모녀를 바라보았다.

전주댁, 진달래차 좀 내 와줄래요?”

전주댁은 은월을 빤히 쳐다보다가 앞치마를 탁 탁 털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전주댁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천식이 심한 은월이는 진달래차를 즐겨 마셨다. 진달래 향이 방안 가득 은은하게 번져 갔다.

따뜻한 차 한 잔 하면서 맘을 좀 진정시키세요.”

은월은 진달래차를 전주댁에게 내밀었다. 전주댁은 애써 밀어내면서 진달래 찻잔을 손에 쥐었다.

진정은 뭐아휴.”

전주댁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리 말을 안 들어서 원.”

속이 타겠지요. 호서 지방에서 사대부 사내들을 쥐었다 피었다 한 영옥이었는데 말입니다.”

전주댁은 은월이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렇죠? 은월 접장이 철없는 영옥이를 좀 설득해 보우, ?

은월은 어린아이처럼 애걸하는 전주댁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전주댁도 자식 둔 어미가 맞네요."

"섭하게 무슨 말을 그리 해요? 업둥이로 키웠지만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다 생각하는구먼.

자식이 기생 예기한다고 할 때 덩실 춤을 추는 어미도 있습니까? 영옥이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다시 기방에 나가라고 하세요! 아님 내가 확 목메 죽는 꼴 보게 될 거라고!”

정색을 하며 속에 있는 소리를 한 전주댁은 은월이 말을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고개를 휙휙 저었다. 마당에 비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은월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오네요!”

?”

처음 만날 때 이렇게 비가 왔었는데. 영옥이가 열 살 안 된 것 같았는데, 벌써 십년이 넘었나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런데, 영옥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요.”

십년 전. 전주댁이 처음 은월당 대문 앞에 나타났을 때, 은월이 주먹밥을 손에 쥐어줘도, 엽전 몇 푼을 쥐어줘도 전주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대문 앞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은월은 전주댁을 바라봤다.

전주댁 궁금하게 있는데.”

물어 보슈.”

도대체 왜 영옥이에게 그리 모질게 하는 ?”

전주댁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앞치마를 탁 탁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 일 많아서 나갈게요!”

전주댁은 늘 화난 얼굴로 영옥을 대했다. 어미라지만 어찌나 모질게 구는지 은월이가 영옥이를 대신 키우다시피 했다. 전주댁에 대해 아는 것은 전주에서 왔다는 것과 영옥이 그의 친 자식이 아니라는 거였다. 전주댁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만, 은월은 전주댁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악에 바친 목소리에 묻어 있는 슬픔의 그림자로 그녀가 모진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만 추측할 뿐이었다. 은월은 달래듯 말을 했다.

내가 다시 말을 해 볼 테니, 죽겠다는 말을 마세요.”

은월은 전주댁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 옆엔 전주댁 말고, 없잖아요.”

전주댁은 몸을 비들면서 은월 손을 뿌리쳤다. 은월은 더 손을 꽉 잡았다. 전주댁은 못 이긴 척 하면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아이고, 내 손모가지 부러질라.”

은월은 전주댁 손을 한동안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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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3 - [소설/한박준혜] - 은월이 (3)-한박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