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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임최소현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2회) -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않았다 손병희는 남접의 장군 전봉준과 첫 대면을 하는 순간 ‘늑대의 상이로다.’라고 혼잣말을 하였다. 불의와 불평등을 한시도 참지 못하며 그래서 절대 권위에 길들여지지 않고 투쟁하는 인간. 전봉준에게서 영원한 자유를 꿈꾸며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야성을 느꼈다. 반면 전봉준은 손병희에게서 카리스마 넘치는 호랑이상을 느꼈다. 충의에 몸을 던지는 인간, 굳센 의지와 용맹으로 휘하의 사람들을 서늘하게 만드는 위용을 가진 인간….남접과 북접을 각각 대표하는 장수가 한 자리에 만나 서로를 탐색하는 듯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모두 하늘님을 마음으로 모시는 동도이며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깃발 높이 들고 비장한 각오로 나선 장수들 아니던가. 서로의 거친 손을 따뜻하게 마주잡았다.“저보다 6살 ..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1회) - 청일전쟁과 남북접 봉기 전봉준이 무장에서 봉기하였을 때 해월 선생은 충청도 청산 문암리(문바윗골)에 있었다. 전봉준의 봉기 소식을 듣고 해월 선생에게는 충청도 서부와 경상도, 경기도와 강원도 각지에서 연일 어찌할 것인지를 묻는 연통이 들어왔다. 한편에서는 많은 동학 도인들은 전면적인 봉기를 우려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기회에 전국적으로 동학 조직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해월 선생은 전봉준에게 연락을 취하여 신중히 처신할 것을 요구는 한편, 사태의 흐름과 관의 동태와 추이를 살피면서 전 동학 도인들에게 조직의 상황을 점검하고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다.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4월 말, 서울에서 한 노인이 말을 타고 해월 선생을 찾아왔다. 키가 구부정하고 누구 하나 경계심을 자아낼 여지가 없는 상노인..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10회) - 농민반란의 서막 1894년 1월 10일, 마침내 큰 물결 하나가 밀어 닥쳤다. 고부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너무 많아 기록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치부와 수탈 행위들, 전운사 조필영의 세미의 이중 징수, 부당한 운송비용 부과를 바로 잡고자 일어섰다 하였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올라가 전주성을 거쳐 서울로 올라간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고부성 점령은 고부의 동학 도인들과 농민들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전봉준 등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첨하고 인민을 침탈한 이속을 징계할 것,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향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고부에서의 봉기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고부 지역 동학도와 농민들의 결합은 순조로웠다. 잠재된 농민들의 역..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9회) - 수심정기(守心正氣)의 경지 손병희도 장내리 도소에 들어와 해월 선생을 뵈었다. 그리고 광화문 복합상소 때 일들을 낱낱이 고했다. 덧붙여 자신이 광화문 복합상소 중에 경험했던 신비한 체험에 대해서도 여쭈었다. “제가 체험했던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귀신이라도 되었던 것일까요? 외국 공사관이나 교회당에 진짜 괘서가 걸렸던 게 사실이라면 제가 경험했던 일도 사실이라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해월 선생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하늘님 기운의 조화이네. 내 몸에 탁기가 쌓이면 지혜의 눈을 가리게 되고, 내 기운을 맑고 밝은 경지에 들게 하면 하늘님의 신령한 기운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자유자재할 수 있네. 그 경지를 곧 수심정기(..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8회) - 동학세상의 감동과 경이로움 짚신만 만들던 손병희는 어느 날부터 멍석도 만들고, 가마니도 만들고, 지붕의 영새끼며, 지게의 동바, 쇠고삐까지 만들어냈다. 짚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다. 그 속에도 도는 있었다. 벼는 낱알인 쌀을 사람에게 식량으로 주고, 볏짚마저도 이처럼 큰 소용이 되는구나. 어디 볏짚뿐이랴. 온갖 풀들이 그러하고, 가축은 가축대로 사람과 더불어 농사를 짓고, 뒷날에는 고기와 뼈와 가죽까지 모두 사람에게 내어 준다.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고 떠나는 것이라면, 최고의 영성을 가졌다는 인간인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줄 것인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주문 스물한 자를 외우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영겁처럼..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7회) - 도(道)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해월 선생은 깡마른 체격에 흰 무명옷을 입은 보통 중늙은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맑고 형형하게 빛나서, 한눈에 도인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듣던 대로 방 한쪽 귀퉁이에는 언제든 일할 수 있는 모습으로 노끈 더미와 재료가 쌓여 있었다. 그때 마침 손병희는 평소 입지 못하던 비단 옷에 한껏 격식을 갖추느라 성장을 하고 있었다. 외양과 체면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스승을 뵙는 자리이니 예를 갖춘 것이기도 했다. 명주 바지저고리에 명주 중의를 입고, 통영 새 갓을 머리에 썼는데 호박풍잠에 은동곳을 꽂아 한껏 멋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해월을 모시고 있던 도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내 혀를 찼다. 검소와 근면을 강조하는 해월의 가르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차림이었..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6회) - 상놈으로 태어난 죄(2) 그 며칠 후, 손병희는 이웃마을 친구 서우순 집에 들렀다. “이리 오너라.” 문을 열어준 것은 여종 말순이었다. 그런데 말순의 행동거지가 영 달라져 있었다. 땟국물 질질 흐르고 다 떨어진 치마저고리 대신 말쑥한 여염집 처자 행색을 하고 있고, 말씨도 굽신거림 대신 어딘가 모르게 당당하고 품위가 생겨 있었다. “말순아, 이리 와 아버지 친구에게 인사 여쭙거라.” 말순이 손병희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러자 서우순은 어리둥절해 하는 손병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 정월부터 말순이는 종이 아니라 내 양딸이네. 이 세상 누구나 타고날 때부터 존귀한 존재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죄 없이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늙은이 젊은이, 남자 여자 차별하고 억압하는, 말도 안 되는 이런 짓거리들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네..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5회) - 상놈으로 태어난 죄 하지만 아내가 잠든 후에도 손병희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대의의 길에 나서는 것으로 자신이 겪은 설움 따위쯤은 떨쳐 낼 수 있었지만, 막상 고향집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은 아직도 컴컴한 한밤중이었다. 어머니 최씨는 청주목 아전 출신 손의조의 첩실이었고, 따라서 손병희는 서출이었다. 그는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으로 부르지 못하며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중 제사에 자신은 온전히 절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아전은 중인 계급. 성인이 되어 벼슬길에 나선대도 서울에서 내려온 벼슬아치들의 손발이 되어 갖은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못할 짓이란 백성의 고혈을 빼먹자고 덤비는 관리들의 앞잡이가 되어 고향..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4회) - 임최소현 중추절 저녁 한복차림의 최씨는 동네 부인들과 함께 달마중을 하러 망월산에 올랐다. 온 고을의 부인들이란 부인들은 다 모여 산을 올랐다. 그런데 달이 떠오를 자리에서, 붉고 커다란 불덩이 같은 해가 덩실 떠올랐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최씨의 발을 잡아끄는 것처럼 발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앞으로 자꾸 걸음이 떼어졌다. 붉은 해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자 해는 최씨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들었다. 최씨는 엉겁결에 치마폭을 벌려 그 해를 받아냈다. 그 길로 태기가 있더니, 이듬해 5월 손병희가 태어났다. 상에 귀태가 흐르면서도 기골이 번듯한 것이 천상 대장부 감이었다. 모두들 태몽이 신통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네가 서자만 아니었어도 장원급제는 따 논 당상일 것을···. 이.. 더보기
겨울이 깊을수록 봄빛은 찬란하다(3회) - 임최소현 사진설명: 구중궁궐 창덕궁의 일부 모습 대표들의 낯빛이 바뀌었다. 손병희는 낮에 비몽사몽간에 눈앞에 나타났던 장면이 이렇게 펼쳐지는 게 더욱 놀라웠다. 누군가 괘서를 붙인 후에 쫓기고 있었는데, 손병희 도력으로 무사히 빠져나갔음을 직감하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그는 이번 상소문의 대표로 이름을 올린 박광호 등 다른 대표들을 독려하여 서둘러 짐을 싸서 서울을 빠져나가야 했다. 조정에서는 이제까지 혹세무민하는 서학의 요설(妖說)에 싸잡힌 무지몽매한 집단이며 유리걸식하는 비적떼라고만 치부하던 동학도들이 엄정한 위의를 갖추고 정연한 이치를 펴는 것에 내심 놀랐다. 그들은 질서정연하였고, 나라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비판하고 걱정하는데다가, 최근에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치는 외세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