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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박준혜

은월이(12회)- <망종> 김석진과 영옥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망종 (5.3./6.6)

 

 

 

은월이는 김석진과 영옥이와 함께 말을 타고, 논산평야를 달렸다. 평야에는 모내기를 끝내 푸른 생기가 땅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들판은 평화롭기만 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정겹기만 했다. 셋이 도착한 곳은 논산평야 지대 한가운데 있는 황화산이었다. 산기슭을 올라가자 평지가 나왔다. 수십 명의 젊은 도인들이 무예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은월이를 보자 젊은 도인들은 연습을 멈추고, 은월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습에 방해된 것은 아닌가요?”

젊은 도인들은 땀을 닦으면서 일제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은월이와 사람들은 노송 아래 모여 앉았다. 김석진이 손뼉을 치면서 말을 했다.

, 다들 모이셨습니까? 우리에게 무예 훈련을 강조한 은월 접장입니다.”

은월은 허리를 반 정도로 굽혀 예를 차렸다. 은월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기포했을 때 다들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도탄에 빠진 민초들은 우리와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전주성을 우리 힘으로 함락하고, 그 힘이 파도가 되어 마을마다 의로운 깃발이 꽂혀 갔습니다.”

젊은 도인들은 일제히 박수와 탄성을 질렀다.

지금 곳곳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습니다. 가까운 금산과 진산에도 설치되었습니다.”

이때, 한 젊은 도인들이 손을 들었다. 은월은 손을 번쩍 든 젊은 도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산과 진산에서 민보군과 보부상으로부터 타격을 받아 크게 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 그곳에 집강소가 설치될 수 있었습니까?”

은월은 빙그레 웃었다.

힘센 자에게 쏠리는 게 바로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겨울에서 봄이 오듯이 황토재에서 우리가 크게 이기고, 팔도가 의로운 깃발로 물결치는 것을 보며 아무리 부패한 조정도 민심을 거스를 수 없자, 관찰사 명령으로 집강소가 설치되었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동학도와 대항했던 세력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젊은 도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은월은 주먹을 불끈 쥐고 더 힘차게 말을 했다.

소낙비가 지나가고 지금은 평화로운 세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바로 시작입니다. 언제든지 가진 자들은 우리가 되찾은 것들을 빼앗기 위해 잔인하게 달려들 겁니다. 굶주린 야수처럼 말입니다. 여전히, 큰 항구마다 왜놈들이 실어 내가는 곡식 가마가 하늘을 가릴 듯이 쌓여 있습니다. 청국과 로서아 나라에서도 계속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민씨 일가가 왜놈과 손잡고 동학을 다시 한 번 제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젊은 도인이 손을 들고 물었다.

우리가 어찌해야 지금의 이 평화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은월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에 힘을 주며 말을 했다.

바로, 힘입니다. 군대와 맞서 이길 수 있는 무장된 힘을 키워야 합니다. 저들은 신식 무기로 까마득히 먼 곳에서 우리를 쏘아 죽이는데 북을 치며 함성만으로 저들을 이길 수 없고, 우리 땅과 선량한 백성들, 그리고 우리 도를 지킬 수 없습니다!”

옳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은월은 큰 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규모가 있고 체계가 잡 잡혀 있는 신식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사방에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던 김석진이 앞으로 나섰다.

김석진은 힘찬 목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말을 했다.

그래서, 무장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무기를 갖춰야겠습니다. 물론, 신식 무기는 비록 없지만, 우리 무기를 스스로 만드는 것도 우리 실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영옥은 두 손을 모으면서, 김석진을 바라봤다. 젊은 도인들은 김석진의 말에 일제히 화답을 보냈다.

좋습니다!”

젊은 도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멀리서 윤지영이 걸어왔다. 말쑥 신식 군복 차림에 상투도 자르고 나타난 윤지영을 보자 영옥은 눈이 커졌다.

오래간만입니다. 여전하시군요 은월 접장. 아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보내준 인삼 덕에 이렇게 건강해졌습니다. 은월 잡장님은 여전히 미모 출중하시고, 영옥은 활짝 핀 꽃이로구나.”

영옥은 토라져 얼굴을 돌렸다. 김석진이 윤지영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영옥이에게 말을 했다.

우리 무예 연습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은월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했다.

바쁠 텐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내다니.”

윤지영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도인으로 살도록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은월 접장이신데, 당연히 은월 접장이 하는 일을 제가 도와야지요. 몸은 비록 군에 있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은월은 살짝 웃으면서 말을 했다.

조정에서 우리를 돕겠다. 첩자노릇을 하겠다?”

윤지영은 활짝 웃으면서 말을 했다.

맞습니다. 왜 나라와 손잡은 민씨와 청을 등에 업은 대원군 싸움이 볼 만할 것입니다. 물론, 떠오르는 태양인 왜 나라가 이기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엔, 왜 나라와 동학이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좋을 겁니다. 아니면.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은월은 윤지영 앞으로 다가섰다. 윤지영 얼굴을 마주 본 은월은 손으로 윤지영 어깨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윤지영 뺨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토닥거리며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모 아니면 도인데. 중간은 딱 질색일세. 어쩌나.”

윤지영 얼굴이 무너졌다.

김 접장, 나라 일 하는 윤 사관을 이리 붙잡아 놓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은월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윤지영을 쏘아보면서 말을 했다.

, 요즘 머리가 깜박깜박 합니다. 종손어른 댁에 왜 기자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사관!”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은월은 쓴 웃음을 보이고, 황화산을 내려갔다. 윤지영은 큰소리로 소리쳤다.

조만간 은월정에 가겠습니다.”

은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내려갔다. 영옥이가 그 뒤를 놓칠세라 바삐 따라 붙었다. 화난 사람처럼 허위허위 앞서가며 말이 없던 은월은 산 아래로 내려오자 그제서야 걸음을 늦추더니 헐레벌떡 거리를 줄이는 영옥에게 말을 건넸다.

영옥아!”

, 은월 접장님.”

오늘, 황화산에 머물거라. 오늘 연습하던 젊은 도인들은 돌아가, 이삼일 뒤에 다른 젊은 도인들이 온다고 한다니 그 준비를 하려면 김 접장 혼자는 힘들 것 같구나.”

.”

강경에 가서 일손을 도울 사람을 바로 보내마.”

알았습니다.”

은월이가 말에 올라탔다. 영옥은 말고삐를 손에 쥐고, 멈칫거렸다.

할 말이 있는 게냐?”

.”

영옥은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월은 기다려 주었다.

, 한 번도 박 접장과의 혼례에 대해 물어 보시지 않습니까?”

은월은 영옥이 눈을 바라봤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지. 네 인생이니 네가 결정하거라. 난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믿는다.”

은월은 말고삐를 받아 들고 힘차게 박차를 차, 금세 멀어져 갔다. 영옥은 은월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고 서 있었다. 은월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가 남긴 먼지마저 가라앉을 즈음에, 김석진이 내려왔다.

은월 접장은 어디 계신가요?”

떠나셨습니다.”

김석진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했다.

영옥 접장은 왜 같이 안 가셨습니까? 훈련장에 두고 간 것이 있나요?”

아닙니다.”

영옥은 수줍은 듯이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말을 했다.

은월 접장이, 다음 훈련을 준비하라고 해서 남았습니다.”

김석진은 영옥이가 남았다는 말에 난감해했다. 영옥은 김석진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상해서 토라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은월 접장이 강경에 가면 일손을 도울 사람을 곧 보낸다 했습니다.”

영옥은 토라져, 혼자 성큼성큼 산기슭을 올라갔다. 김석진은 혼자 우뚝하니 서서 영옥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김석진은 영옥이를 향해 소리쳤다.

영옥 접장, 같이 갑시다!”

영옥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김석진이 영옥이를 부르면서 뛰어왔다. 영옥은 김석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김석진은 영옥에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김석진이 중심이 된 젊은 도인들은 황화산 자락 너른 터에 훈련장을 마련하였다. 김석진은 아예 그곳이 내려다 뵈는 언덕배기에 귀틀집까지 지어 놓고 상주하다시피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귀틀집에 등잔 옆에서 김석진은 글이 빼곡한 한지를 펼쳐놓고, 영옥은 동경대전을 보고 있었다. 둘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 낯설은 영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강경에서 사람을 보낸다했는데.”

영옥은 경전을 읽다 말고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김석진은 아무 말 없이 을 읽었다. 영옥은 문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김석진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했다.

영옥 접장!”

영옥은 바짝 긴장해서 김석진을 돌아보았다. 위축되는 몸가짐과는 달리 눈 속에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까이 오십시오.”

영옥은 얼굴이 붉어졌다. 영옥은 김석진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

김석진은 등잔을 가까이 가져왔다. 은근한 불빛에 영옥이의 자태가 더 빛이 났다. 순간 김석진은 정신을 잃고 영옥을 바라봤다. 김석진은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영옥 접장.”

.”

제게 귀한 글이 있어 함께 보고 싶어서요.”

, . 고맙습니다.”

“<양천주설>이라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필사하여 전하는 걸 어렵사리 구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내용은 아마 들어 보셨을 겁니다. 한데, 저도 이렇게 글로써 보는 건 처음이라.”

김석진은 종이를 영옥이 쪽으로 돌려놓고 읽기 시작했다.

한울을 양()할 줄 아는 자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아나니라. 한울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 마치 종자의 생명이 종자 속에 있음과 같으니, 종자를 땅에 심어 그 생명을 양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도에 의하여 한울을 양하게 되는 것이라.”

김석진은 영옥을 바라봤다. 영옥은 김석진을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영옥은 주저없이 읽어 내려갔다.

한울을 양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아느니라. 한울이 내 마음속에 있음이 마치 종자의 생명이 종자 속에 있음과 같으니. 종자를 땅에 심어 그 생명을 기르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도에 의하여 한울을 양하게 되는 것이라.”

읽기를 마친 영옥이 김석진을 돌아보자 김석진은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이어서 읽기 시작했.

같은 사람으로도 한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이는 종자를 물속에 던져 그 생명을 멸망케 함과 같아서, 그러한 사람에게는 종신토록 한울을 모르고 살 수 있나니, 한울을 양한 자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자에게는 한울이 없나니, 보지 않느냐, 종자를 심지 않는 자 누가 곡식을 얻는다고 하더냐.”

다시 영옥이 따라 읽었다.

같은 사람으로도 한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이는 종자를 물속에 던져 그 생명을 멸망케 함과 같아서, 그러한 사람에게는 한평생을 마치도록 한울을 모르고 살 수 있나니 오직 한울을 양한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양치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나니, 보지 않느냐 종자를 심지 않는 자 누가 곡식을 얻는다고 하더냐

잘했습니다. 뜻하는 바를 알겠습니까?”

사람은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뜻, 아니 노력을 한다면 한울님의 능력만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김석진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영옥이를 바라봤다.

맞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라도 내 안에 하늘이 있으니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영옥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옥은 주먹을 쥐면서 김석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느낌이요...... 오라버니.”

김석진은 쑥스러워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숙여 을 봤다. 영옥은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벅찬 마음을 쏟아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영옥은 입술이 약간 떨리면서 말을 했다.

동지가 무엇인가요?”

한 뜻을 가지고 함께 가는 사람이겠지요.

김석진은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영옥은 뭔가에 빠져들 듯이 김석진을 쳐다보았다.

저에겐 소원이 있습니다. 뜻을 나눈 동지와 평생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오라버니와 평생동지가 되고 싶습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김석진은 돌발적인 영옥이의 말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영옥을 바라보았. 둘은 눈을 마주하며 서로에게 빨려들 듯 한동안 마주보았. 그러다 김석진은 괴로운 듯 고개를 떨궜다.

영옥 접장, 공부는 여기까지 하시지요.”

김석진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조심스레 접어 소맷자락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옥은 김석진의 팔뚝을 잡았다.

저에게 그런 기회가 없을까요? ? ”

…….”

방법이 없다면, 오누처럼 다정하게라도 해주시면 안됩니까? 냉담한 오라버니를 대할때마다 때마다 심장이 도려지는 듯 아팠습니.”

김석진은 참던 감정이 무너져, 얼굴이 이그러졌다. 영옥은 작심하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부족하면 부족하다 말씀해 주십시오.”

김석진은 영옥을 한동안 바라봤다.

영옥 접장, 서로의 마음을 알아도 어찌할 수 없다면 모른 척 하면서 사는 것도 방법이지 않겠?”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세상엔 뜻대로 갈 수 없는 도 있는 법.”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이를 바꾸자고 하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김석진 눈가에 눈물이 이슬처럼 맺혔다.

오래전에, 여인을 보았습니다. 해밝은 웃음이 지금도 눈앞에서 아른거립니다. 그날 그 여인을 가슴에 품었지요. 하지만, 난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 비겁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

김석진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오라버니.”

영옥은 김석진 품에 와락 안겼다. 영옥은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를 알고 동학을 접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 나가는 거라고요. 조선의 여인으로, 천한 신분으로 나를 옭아매지만, 그 구속을 벗고자 싸우겠다고 오라버니를 보면서 마음먹었지요. 그것이 죽도록 힘든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김석진은 영옥의 등을 토닥거렸다.

오라버니, 제 마음을 밀어내지 마시고, 받아 주세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평생 동지로 살고 싶습니다. 평생 동지로, 오라버니와 함께 서서 개벽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김석진은 영옥을 안은 채 폭포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영옥이는 김석진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김석진은 영옥이를 힘껏 안았다. 가슴에 사무쳤던 애절함이 묻어났다. 김석진은 영옥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영옥도 웃었다. 김석진은 영옥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영옥이...”

석진 오라버니....”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둘은 수년간 담아둔 마음의 빗장이 열리자 이내 한 몸이 되어 새벽을 맞이했다.

다음날 아침, 둘은 서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하루 종일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김석진은 영옥이 곁에 다가가서 영옥이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하늘은 하늘대로, 숲은 숲대로 한껏 푸르렀다.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의 선택을 축하하는 것 같았다. 그 며칠 동안 둘만의 세상을 하늘이 만들어준 것처럼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하늘이 사나워지면서 먹구름이 가뜩했다. 은월정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전주댁은 불안한지 대문만 바라봤다.

아니, 계집년이 어쩌자고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 아이구 속터져 죽겄네, 죽겄어!”

은월은 방안에서 전주댁 지청구를 듣다 못해 방에서 나와 전주댁 옆에 앉았다.

나 들으라고 한 거죠?”

전주댁은 은월이를 빤히 쳐다봤다.

전주댁, 날씨도 그런데, 부침개에 막걸리 내와 봐요.”

대낮부터 웬 술타령이래? 영옥이나 어서 데리고 오소.”

은월은 방긋하게 웃었다. 전주댁은 툴툴거리면서 부엌에서 술상을 차려왔다. 둘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전주댁은 은월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리가 영 어색한 김에 전주댁은 술병을 잡고, 혼자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벌컥 마셨다.

-, 시원-.

은월은 살짝 웃으면서 전주댁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박 접장 집에서 있던 일이 아직 마음에 걸리나요?”

전주댁은 눈을 부릅떴다.

뭔소리여? 딸년 시집 좀 제대로 보내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나요?”

그럼 은월이도 영옥이 박 접장한테 시집 보내자는 거야?”

영옥이가 원하면요.”

아이구, 그런 것도 모르고 난 또. 영옥이야 당연히 에미 말을 따를 겨.”

전주댁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금세 신바람을 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은월은 빈 잔에 지체 없이 술을 따랐다.

근데, 영옥이는 뭔 일이데? 집을 이리 오래 비우는 겨?”

훈련장에 갔어요.”

은월은 술잔을 비웠다. 전주댁 눈이 흔들렸다.

뭐여! 훈련장? 그거를 누구랑 갔어? !”

전주댁은 흥분하여 반말을 하면서 은월에게 들이댔다. 은월은 단호하게 말을 했다.

김 접장하고 같이 있습니다.”

전주댁은 손으로 가슴을 팍팍 쳐댔다.

아이고, 아이고. 혼사 앞둔 년이.”

알고 있었죠?”

? !”

전주댁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은월은 눈 하나 깜박 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영옥이 마음을요. 그리고, 김 접장 마음도요. 어미라면서.”

전주댁은 살기 돋은 기세였다가 은월이의 말에 금세 풀이 죽었다.

말을 하면, 현실이 돼. 그런 현실이 될까 두려웠다.”

전주댁은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은월은 달래듯이 물어봤다.

뭐가 그리 두려운데요.”

그 두 사람의 사랑은 불행한 겨. 그 끝을 알면서 내 버려 둘 수야 없지.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는데 당연히 말려야지. 말려야 해.”

사랑은 상처투성이죠. 그럼에도,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요. 그 아름다운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죠. 용기 없는 사랑은 미련만 남을 뿐입니다. 평생.”

은월아. 안 된다. 영옥이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계집년 팔자 어미 닮는다는데, 절대 안 된다. 안 돼. 말려 다오. 은월아

전주댁은 은월이 손을 잡고 소리내어 눈물을 흘렸다. 은월은 전주댁의 등을 토닥거리면 말을 했다.

인연이라는 것이 말린다고 되나요. 하늘이 이미 다 정해 놓은 걸요.”

마당에는 어느덧 굵어진 빗소리가 요란했다. 은월은 방문을 열고,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밖에 빗소리가 요란합니다.”

윤지영은 박영채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윤도인은 호리병 하나를 들고 신이 나서 방으로 들어. 윤지영이 그런 윤도인을 반겨 맞았.

형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암 좋고, 말고 ... 박 접장, 오늘 강경에 가서 영옥 어미를 만났습니다.”

박영채는 살짝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윤지영은 박영채와 윤도인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우리 아우가 궁금해 하겠군. 자 일단 술부터 받으시게나. 이것 특별한 걸세. 박 접장 축하주네.”

무슨 축하입니까? 새장가라도 갑니까?”

어찌 알았나? 박 접장, 영옥 어미와 혼례 날을 잡았습니다.”

형님, 누구랑 혼례를 한다는 겁니까? 설마 전주댁은 아닐 테고.”

어허,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영옥일세, 영옥이. 접장, 축하드립니다.”

박영채는 만족스러운 얼굴 표정을 지었다. 윤지영은 잠시 생각하더니만, 박영채에게 술잔을 권하여 부딪치고 나서 이야기했다.

박 접장, 이건 우리 접의 경사 아닙니까? 경하 드립니다. 혼례를 앞두다 보니, 더 열심히 했던 모양이군요. 영옥 도인이.”

윤도인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동생, 무슨 말인가?”

, 황화산 훈련장에 갔더니, 영옥이가 있어서요. 김 접장 옆에서 훈련을 돕는다고 며칠 묵는다고 해서요. 김 접장이 지휘하는 훈련장에 사내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스스로 나서서 훈련장을 지킨다고 해서 기특하다 했더니. 박 접장과의 혼례를 앞두고 도인들의 모범이 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그 참, 기특하군요. 그런 도인과 혼례를 하다니.”

윤도인과 박영채는 얼굴이 굳어졌다. 윤도인은 입을 실룩거리면서 말을 했다.

훈련장에 영옥이가?”

윤도인은 속이 타서 술잔을 한모금에 비웠다.

제가 나올 때 1진 훈련이 끝나고 2진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윤지영은 술잔을 들었다.

은월이의 왼팔격인 영옥 도인과의 혼례라. 후세에 길이 기억 될 혼례입니다. 박 접장님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박영채는 쓴웃음을 지면서 윤지영과 술잔을 부딪쳤다. 윤지영이 뒷간을 간다고 하고 나갔다.

윤도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박영채를 바라봤다.

그때 김 접장을 골로 보냈어야했는데. 제 실수입니다.”

됐다. 이미 끝난 일이다.”

혼례가 잘못 되면 제가 은월과 김 접장 둘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아라. 나도 사내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구나.”

윤지영은 방문 밖에서 두 사람이야기를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

, 은월이를 치겠다. 재밌겠군.”

헛기침을 하고, 윤지영이 들어왔다. 윤도인은 웃으면서 말을 했다.

아이고, 오래간만에 찾아온 사람들 두고선 우리 이야기만 했네.”

윤도인은 웃으면서 윤지영의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을 했다.

듣자하니, 신식 군대에 들어갔다고? 어떻게 군대를 들어갔는가?”

접에서 비밀리에 그쪽에 선을 놓고자 저를 파견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보고 차 이렇게 들렀습니다.”

윤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가?”

은월 접장이 어떻게든 신식 군대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무슨 뜻이 있는 줄로만.”

윤도인이 나서려고 하자, 박영채는 손으로 윤도인을 막으면서, 말을 했다.

사람의 속은 모르는 법이니, 방금 한 말을 글로 남기게. 그래야, 내가 자네를 믿겠네.”

듣던 대로 박 접장은 빈틈이 없으시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윤지영은 붓을 들었다. 글을 다 쓰자 윤도인은 박영채에게 윤지영이 쓴 글을 보여주었다.

이제, 말을 해도 좋다.”

, 지금 청나라와 왜국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알다시피 김옥균이 죽자 개화파는 돌이킬 수 없는 세력으로 전락하, 김옥균의 죽음을 둘러싸고 대원군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왜국의 심기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윤지영은 박영채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두 나라가 한판 붙을 것 같습니다.”

윤도인은 물었다.

그래,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당연히 왜국이지요. 왜국은 청나라를 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지요. 그에 비하면 청나라는 강성해 보이지만,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국이 청나라를 치자면, 먼저 뒷통수에 도사리고 있는 동학을 치려 들 겁니다. 제가 훈련장에서 젊은 도인들 훈련을 봐주었는데, 힘 빠질까 봐 말은 못했지만 한심합니다. 그런 무기로 싸우겠다는 것은 죽겠다고 달려드는 거지요.”

박영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무모하다.”

바로 그거지요. 무모하게 왜국에게 달려들었다가는 수십 년간 쌓아온 것을 훅 날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대세를 보고, 승산이 있는 곳과 협력해야 살아남습니다. 괜히 맞서다간.”

윤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윤도인은 윤지영 말에 맞짱구를 쳤다.

박 접장, 이대로 있다가 큰일 나겠습니다.”

박영채는 큰소리로 웃었다.

윤도인, 하늘이 다 정해 놓은 데로 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혼란스러울수록 수련에 전념합시다.”

동생, 박 접장님 성품이 대범하지 않는가?”

도량도 바다와 같으니 혼란스러운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모두 쓸어 담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종종 들러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윤도인은 활짝 웃었다. 윤지영은 심각하게 물었다.

형님, 요즘, 대원군이 도인들을 부쩍 찾는다고 했는데 여기는 별 소식 없습니까?”

없긴.”

윤도인은 낮은 목소리로 윤지영에게 이야기했다.

이건 비밀일세. 대원군 측근이 노성 윤자신을 찾았다는군.”

윤지영 눈이 반짝였다.

그래요? 무슨 일로요?”

모르지. 입을 다물고 있어서. 자네도 알면서 그러나. 윤자신이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때가 되면 알겠지. 자자, 비도 오고 술이나 마시자고.”

셋은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