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夏至 (음5.19/양6.22)
어느덧 장마가 찾아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던 일손에 잠시 짬이 생겼다. 장마가 다 지날 때까지 영옥은 은월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주댁은 은월이만 보면 욕을 했다. 하지만, 전주댁도 한 걸음에 달려갈 만한 거리에 있는 영옥에게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전주댁은 은월이가 나갈 차비를 하자 큰소리를 냈다.
“내 포기하는 거 아닐세…. 하기야, 지년이 혼례를 하면 지 맘대로 살 수 있나. 실컷 지 맘대로 살라고 그냥 두는겨!”
은월은 전주댁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대문 밖에 비를 흠뻑 맞고, 한 도령이 서 있었다. 은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 도령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신데, 이 비를 다 맞고서 예 서 있으십니까?”
“은월 접장, 뭔 일 있는겨?”
전주댁은 은월이를 부르면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전주댁은 도령을 보자 쏘아붙였다.
“아니, 여긴 기생집이 아니라고 했잖어.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아이고….”
“전주댁, 이 도령이 언제부터 이리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었나요?”
“뭐, 꽤 되었지. 강경포에서 영옥이를 찾더니, 지난번엔 저쪽 감나무 아래 서 있어서 잘 타일러 돌려 보냈는데…. 오늘은 무슨 맘이 들었나, 대문 앞에 저리 서 있구먼. 실성했냐?”
전주댁은 도령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약간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떨고 있었다.
“전주댁, 안 되겠습니다. 비를 이리 맞아서는 크게 병나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안내해 주세요.”
“뭣이여? 누군지도 모르는데? 영옥이를 연모하는 놈일 거여. 누구 혼례 망칠 일 있어?”
은월은 난리를 피우는 전주댁을 바라봤다.
“알았어. 알았다니깐! 도령, 이리루 오셔.”
전주댁은 돌비석처럼 서 있던 도령의 팔을 휙 잡아끌었다. 이때, 도령이 힘없이 입을 뗐다.
“은월이라 했습니까?”
전주댁은 잡던 팔을 세게 흔들어댔다.
“은월 접장이다. 너, 누가 보낸 첩자냐?”
전주댁은 눈을 부라렸다.
“전주댁, 그리 의심할 만한 자는 아닌 듯하니, 일단 사랑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갈아입을 옷을 드릴 테니, 따뜻한 차 한 잔 하면서 저를 찾아온 연유를 듣겠습니다.”
도령은 힘이 없어 보였지만, 은월이가 살짝 웃음을 보이자 이내 눈빛 살아났다. 전주댁은 도령을 데리고 은월정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금객주가 말을 타고 대문 앞에 도착했다.
“은월 접장, 무슨 일있습니까?”
“예, 금객주 오셨습니까? 웬 도령이 나를 찾아 왔습니다.”
금객주는 도령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이때 도령은 살짝 은월이를 뒤돌아 봤다.
“은월 접장, 저 도령은 연산현감 이현제의 큰아들인 듯합니다. 그때 전주댁이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아….”
“그런데, 저 도령이 어찌 된 일로 은월 접장을 찾아 왔을까요?”
“강경포에서는 영옥이를 찾더니, 대문 앞에서 전주댁이 은월 접장이라고 하자, 묻더군요.”
“뭐라고요?”
“내가 은월이냐고….”
금객주가 큰소리로 웃었다. 은월은 금객주의 웃음이 거슬렸다.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난리 났을 때 저 도령이 은월에게 자기 마고자를 벗어 줬던 거 기억납니까?”
“그랬나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아마도 저 도령이 은월 접장에게 한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예? 아침부터 농이 심합니다.”
“저도 상사병에 걸려 봐서 알지만, 딱 상사병 걸린 사내의 모습이지요. 좋겠습니다. 저 나이 젊은 도령의 마음을 확 휘어잡을 정도이니… 제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능철을 부리면서 금객주는 은월이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
“농 그만하십시오.”
“어찌 할 겁니까?”
“아마, 전주댁이 푹 잘 수 있도록 조치할 겁니다. 그리고 밥 한 끼 주고 보내야겠지요.”
“음…. 글쎄요. 과연 은월정을 떠날까요? 한번 내기 해 봅시다.”
“한가로이 그런 내기 할 때가 아닙니다. 어서 연산관아로 갑시다. 금객주!”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현감 아들이 은월이 품 안에 있으니…. ”
은월은 금객주를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백설이 고삐를 잡아 당겼다.
“은월 접장, 같이 갑시다.”
은월과 금객주는 연산관아에 다달아 말에서 내렸다. 은월은 금객주를 바라보면서 살짝 웃음을 보였다.
“갈까요?”
금객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객주는 관아로 먼저 걸어갔다.
“현감을 만나러 왔소.”
금객주가 서찰을 보이자, 관졸은 얼른 허리를 숙였다.
“자, 은월접장 들어가지요.”
은월은 미소를 지으면서 금객주를 바라봤다.
“금객주, 능력이 참 대단합니다. 나라 밥 먹는 관졸도 저리 허리를 굽히니….”
“세상,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더이다. 아무래도, 세상 이치를 너무 잘 깨달은 것 같소. 권력보다 돈이니! 그런데, 연산 현감이 어찌 나올지….”
“듣자니, 부패한 조정에 반감이 있으나, 고리타분한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으니…. 본인도 갈등이 있겠지요. 유학의 가르침에는 부패한 조정, 민심이 저버린 임금은 망할 거라 했으니….”
“어찌 할 생각입니까?”
“어찌하다니요. 흔들어야겠지요.”
“흔든다….”
은월이와 연산 현감 이현제 그리고 금객주가 객사에 마주 앉았다. 불편한 마음이 이현제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찻잔을 감싸면서 은월이가 먼저 말을 냈다.
“아드님 일로 마음이 무겁겠습니다.”
이현제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금객주도 사뭇 놀라 은월이를 바라봤다.
“어찌할 생각인가!”
이현제는 무겁게 물었다.
“사람의 마음 어찌하겠습니까? 무처럼 자를 수도 없고…. 참, 저도 난감합니다.”
“아들을 볼모로 나와 협상하려거든 썩 나가거라!”
“현감 나리, 어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 비열한 짓을 하겠습니다. 아드님은 아드님이고, 일은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추호라도….”
은월은 흔들리지 않고 이현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는가?”
이현제는 금객주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금객주는 살짝 웃으면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은월은 이현제를 바라보면서 살짝 웃음을 지었다.
“나으리, 그리 날을 세우면 너무 아픕니다.”
“어흠, 아랫것들을 돈으로 매수까지 하면서 날 보고자 한 이유가 뭔지 썩 말하거라!”
“재물이란 있는 만큼 써야 또 도는 법이지요. 나라가 엉망이라 아랫사람들 먹고 사는 것도 넉넉하지 않던데…. 그들에게 먹고살 수 있게 재물을 나눠주는 것을 두고 욕할 수 없지 않습니까?”
“관을 상대로 한 비리이니, 국법으로 중히 다스릴 수도 있다.”
“비리라니요. 몇 푼 나눈 것 가지고 비리 몸통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꼬리를 탓하지 마시고. 그리 문제가 있으면 몸통을 확 잡으셔야지요. 아랫것을 원칙대로 하려거든 먼저 이씨 민씨부터 조져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현감!”
이현제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 못했다. 방금 전까지 호통 쳤던 은월은 금세 미소를 지으면서 현감을 바라봤다.
“차가 식겠습니다. 나으니, 어서 드십시오.”
이현제는 어떨결에 은월이가 시키는 대로 차를 마셨다.
“나으리, 듣자하니, 동비들을 잡자고, 왜나라, 청나라를 끌어들인다지요? 왜놈들과 협조해서 동비들을 잡으라고 하던데….”
“나라 일이다. 감히, 계집이 나설 일이 아니다!”
“계집이 나설 일은 아니지만, 도인들은 제 생명이지요. 생명이 위험에 처했는데 어느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아닙니까?”
“강상의 법도를 허물고 나라의 안녕을 어지럽힌 놈들이 바로 동비들이다. 민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왜나라도 들어오지 않았을 터. 남의 나라 군대가 맘대로 우리 땅을 짓밟게 된 것은 바로 동비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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