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변김경혜 썸네일형 리스트형 꿈이 있더냐(12회) - 3장 탄생, 비밀과 기쁨 며칠 뒤 김은경은 아들과 함께 인근의 흑성산(黑城山)을 찾았다.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작업을 하느라 꼬박 반년 이상을 쉼없이 보낸 것 같았다. 날이 차 입을 열때마다 허연 입김이 선명했다. 산을 오르느라 등허리에 땀도 흘렀다. 정상에 오르니 천안과 목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흑성산의 옛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지관들은 오래전부터 검은성을 한양의 외청룡이라며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길지형국이라고 말했다. 인근 승적골은 오목(덜목, 제목, 칙목, 사리목, 돌목) 사이에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피난처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제 동경대전 간행이 목전이다. 김은경은 하루하루가 조급했다.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도인들의 열망이 모여진 숙원이 이제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더보기 꿈이 있더냐(11회) - 3장 탄생, 비밀과 기쁨 “어쩌겠습니까. 다 이게 지가 무식해, 못나서 이 사단이 벌어진 걸. 저…. 윤지, 그놈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윤지 아버지가 힘없이 얘기했다.“아니 되네. 내 자식 살리자고 윤지를 왜놈들에게 보낼 순 없네. 절대 안 되네. 칠성이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걸세. 자네는 평생 딸년 팔아먹은 아비가 되는 것이고, 나는 제 자식 살리자고 남의 귀한 딸 죽인 죄인이 되는 것이네. 칠성이와 연지는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겐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네. 지금 이희인 어른과 접장님들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무슨 수가 나올 걸세.”원씨가 윤지 아비의 팔을 잡고 애걸하듯 말했다. 울상을 짓고 탁배기를 들이키는 윤지 아버지의 탁배기가 사발 밖으로 흘러 넘쳤다.“올해 오가놈에게서 논을 사고 형편이 나아.. 더보기 꿈이 있더냐(10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칠성이는 동 터오는 새벽, 벽에 기대 앉아 혼자 어찌 해야 할지 방도를 생각하고 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스승님이 계셨다면 어찌 했을까?’ 칠성이는 돌아가신 곽 할배 생각이 났다. 글을 알아야 한다고, 어린 아이들 대여섯을 모아 작은 서당을 열었던 곽 할배가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다. 재미난 이야기와, 넉넉하진 않았지만 틈만 나면 주먹밥이며 군것질 거리를 챙겨주던 스승님. 칠성이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곽 할배가 생각나곤 했다. “칠성아, 너는 아주 큰 힘을 가지고 태어났단다.” “예 스승님, 모두 저보고 장군이 될 거래요. 아버지 닮아서 힘도 세고, 키도 크고요.” “그래, 칠성이는 장군이 될 게야. 갑옷을 입고 칼을 들어 외적에 맞서 .. 더보기 꿈이 있더냐(9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자, 모두 모인 것 같습니다.” 김용희가 방안의 사람들을 지긋이 쳐다보고 나직이 말했다. 해가 질 무렵이지만, 초를 켜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방안에는 김용희와 김은경, 김성지, 김화성, 황성도, 이희인 같은 양반 출신 도인들과 원씨 등이 같이 앉아 있다. 인근에서 행세깨나 하는 양반들이었다. 향교나 서원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세도에 따라 앉는 자리까지 정해지는 것이 향교와 서원에서의 양반 세계다. 하지만 김용희의 집에 모인 이들은 둥그렇게 자리를 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을 모아서 ‘심고’.” 김용희의 말에 따라 모두 눈을 감고 양반다리를 한 채 손을 모았다. “오늘 여기 대선생의 뜻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아직은 대선생의 뜻을 잘 모릅니다. 이 땅에서 양반으.. 더보기 꿈이 있더냐(8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오가 놈 마누라는 작년 여름 수마에 죽었다. 갑자기 내린 비는 오가 놈 마누라 말고도 두 명을 더 데리고 갔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마을사람들은 오가 놈의 죄를 마누라가 뒤집어 쓴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오가 놈이 패악질을 하면 마누라가 찾아가 대신 용서를 빌곤 했었다. 오가 놈이 행패를 부리다가도, 마누라 설득으로 더러 중단된 적도 있었다. ‘진짜, 그 오가 놈이 윤지를….’ 원씨도 윤지 아버지의 얘기를 듣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칠성이와 윤지가 혼인할 작정이란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칠성이가 열아홉 되던 해, 윤지와 혼인하겠다고 원씨에게 얘기했었다. 원씨는 윤지를 이미 며느리로 생각하고 있었고, 윤지 아버지와는 서로 사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씨는 다음날 목천 이희인 어른을 만나 봐야겠다고 .. 더보기 꿈이 있더냐(7회)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사람들이 많대요. 다들 좋아라 하고…. 이 겨울이 지나면 동경대전이 나온다 하대요.” 윤지가 머리를 기댄 채, 얘기했다. “난 동경대전보다, 우리 혼인이 더 좋다. 동경대전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혼인했으면 좋겠다.” 칠성이는 윤지를 옆눈으로 보며 얘기했다. 윤지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린 동생들과 아버지 때문에 혼사를 미뤄 왔다. 기다려 주는 칠성이가 고맙기도 하지만, 식구들 생각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미안하오, 오라버니….고맙소.” 윤지는 오늘도 같은 말을 할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칠성이가 겨드랑이에서 윤지의 손을 빼더니 자신의 무릎 위로 천천히 윤지를 눕혔다. 윤지는 칠성이를 기다리는 듯 살포시 눈을 감았다. 칠성이와 윤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칠성이의 손길.. 더보기 꿈이 있더냐(6회) - 변김경혜 벅차 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멀리에서도 와 주셨습니다. 이 추운 날,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으니 우리의 마음이 분명 하늘에 전달될 것입니다. 오늘 각수 작업을 앞둬 작은 제를 올리려고 합니다. 여기 오신 도인들은 모두 한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김은경의 말에 도인들은 작은 제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떡과 과일, 막걸리가 단출했다. 해월 스승님은 제수 갖춤에서 허례허식을 경계하라고 했다. 제수용 술과 떡, 국수, 생선과 과일, 포와 튀각, 채소와 함께 향과 초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또 제를 지낼 때 고기를 쓰지 않도록 당부해 제사상이라고 해봐야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노래 한 번 못 부르는 게 아쉽네 그려.” 누군가의 말에 도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더보기 꿈이 있더냐(5회) 벅차 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넓게 퍼져라 “우리 도인 중에 유선이 어머니라고 계십니다. 남편은 제물포로 떠난 지 몇 해 됐는데 지난해 다녀간 뒤로 올 초부터는 소식이 끊겼답니다. 아이는 갓 돌을 지난 계집아이와 네 살, 일곱 살 사내아이까지 셋입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먹을 게 없어 젖이 안 나오니까 우리 도인들이 십시일반 조금씩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봄 동학에 입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 세상을 뜰 것 같습니다. 의원 말이 이레를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데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희 어머니에게 그 유선이 어머니가 이걸 주셨습니다.” 칠성이가 가슴팍에서 명주천을 꺼내들더니, 손바닥위에 펼쳐보였다. 거기엔 하얀 버선 두 짝이 놓여있었다. 칠성은 둥그렇게 둘러앉은 방 가운데 버선.. 더보기 꿈이 있더냐(4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 넓게 퍼져라(4) 작은 초가집은 저녁시간이 다 지났는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난 흔적이 없었다. 방에는 유선이 어머니가 한여름도 아닌데 땀을 뻘뻘 흘리며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둘은 바늘쌈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돌을 지난 막내는 명주 쪼가리 천을 입에 물고 침을 흘리며 천진한 눈으로 상현이를 바라본다. “이 녀석이 또, 바늘은 위험하다고 했잖아!” 유선이가 바늘쌈을 얼른 빼앗았다. 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유선이 어머니.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지요?” 상현이가 유선이 어머니 옆에서 상태를 가늠했다. 곧 숨이 넘어갈 듯 말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계속 울어댔다. “유선아, 안되겠다. 너는 어서 삼거리 칠성이 아저씨를 찾아가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오는 길에 내 어머니를 모시고 오너라.” 상현이가 아이 둘을 달래.. 더보기 꿈이 있더냐(2회) - 벅차오르는 희망, 동학의 뜻은 넓게 넓게 퍼져라(2) 김은경이 해월 선생을 만난 것은 신사년(1881년 8월)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오랜 시간 서책에 매달려 살아왔건만 학문의 울림은 없었다. 아니 유학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나라가 유학이 가르치는 도리는 너무 멀어지기만 하는 데에 지긋지긋했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백성들은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어 나가기를 아침저녁 가리지 않는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서원에 모여 사대부 타령이나 하는 것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김은경은 풍문으로 동학이 주장하는 바를 전해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 같았다. 이 조선 땅부터 지상신선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놀라웠고, 적서의 차별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양반과 평민과 천민들까지 평등하게 대한다는 말에 가슴이 열렸..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