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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 (12회) - 보은집회 제6장 보은 집회 1. 광화문 상소에 소두로 참여한 덕산 도인 박광호를 잡아들이라는 조정의 칙령을 받아들고 면천 군수 조관재는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앞으로 동비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 그 지역 수령을 문책하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하기사 덕산 수령이나 예산 현감에 비하면 본인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두 박광호와 봉소 박인호가 속해 있는 덕산 수령과 봉소 박덕칠 관할 지역인 예산 현감은 회합 내내 한숨만 쉬었다. 조관재는 이창구가 봉소 명단에서 빠지는 바람에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동학 내에서의 이창구 위치는 박인호나 박덕칠과 같으면 같았지 못하지는 않다고 했다. 오히려 이창구의 접의 세력이 더 커지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박인호나 박덕칠보다 나을 거라고 ..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 (11회) - 광화문 복합상소 3이창구는 삼례에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 순섬이와의 혼례를 조촐하게 치르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집안 식구들에게 잔칫상에 쓸 음식을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일렀다. 간단하게 한다고 하지만 인륜지대사이고 보니 집안 전체가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도씨 부인은 순섬이가 소실로 들어온다는 생각에 속이 문드러졌다. 사람들 이목도 두려웠다. 문득 음식을 준비하려고 앞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신의 꼴이 볼썽사나워 보였다. 그녀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슬그머니 뒤꼍으로 갔다. 여종 하나가 완자전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종에게서 칼을 빼앗아 들고 본인이 직접 고기를 다졌다. 눈물이 고기를 적셨다.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라 아무도 그녀 곁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이구 마님, ..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 (10회) “취회 소식은 들었소. 고생들 하셨소.” 이창구가 순섬이와 함께 서택순의 집에 들어서자 해월 선생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마루로 나와 그들을 반겼다. “감결의 내용이 충청 감영에서 내린 것과 똑같아서 실망하는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해월 선생은 이창구의 말에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 문제는 대접주들이 좀 더 모이면 대책을 논의키로 하고 방에 들어와 잠시 쉬구려.” 해월 선생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그래 김순섬 도인이라 했소?” “네.” 순섬이는 해월을 바라보았다. 몸은 깡말랐으나 눈빛만은 영이 살아있는 듯 번쩍였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전에 이창구가 해월 선생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얼핏 비추었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그러나 이창구가 이름을 강조할 리는 없었을 터였다. “..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 (9회) 2 장터가 파할 무렵 이창구는 포목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도씨 부인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창구는 그녀에게 집에 가라 이르고 가게를 정리한 뒤 어물전 정원갑에게 갔다. 마침 박덕칠이 와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게요? 부인께서 안 좋아 보이시던데.” 박덕칠은 이창구를 보며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좀 전 그는 포목점에 들렸다. “순섬이를 소실로 맞이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흠, 부인이 상심할 만하군요.” “그리 되었습니다.” “…….” 박덕칠은 이창구 접장의 결정을 이해하면서도 부인의 참담한 낯빛이 떠올라 차마 어떤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곤궁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창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별일 아니란 듯이 말을 돌렸다. “근데 어쩐 일로?” “통문을 갖고 오셨네유.” 정원갑이 이창구의..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8회) - 첫 접촉 4장. 첫 접촉 1. 틀못 삼일장이 열렸다. 이창구는 공주 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것이 도씨 부인에게 못내 미안해 이른 아침부터 포목점에 나와 물건을 정리했다. 도씨 부인은 동학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도 비단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비단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여인들은 포목전에 들어서면 비단부터 만졌다. 그들은 비단이 부드러워서 좋다고 했다. 비단처럼 삶이 유연할 수 있다면! 지난 공주 모임에서 손천민은 유연했던 반면 본인은 고집스러웠다. 자신의 외길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창구는 이 비단 저 비단을 만져 보았다. 비단이란 자고로 걸림이 없었다. 걸림이 없는 삶이라! 그는 혼잣말을 하면서 자신의 손길을 연둣빛 비단과 꽃분홍 비단으로 옮겼다. 연둣빛 저고리에 꽃분홍 치..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7회) - 공주취회 3장. 공주 취회 1. 이창구가 상주에 다녀온 지 두 달여가 지난 10월 17일, 해월은 마침내 충청감영에 의송(소장)을 내기로 결정했다. 서인주를 비롯한 대접주들의 권유가 있은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관의 탄압에 시달리는 도인들의 호소가 대도소로 빗발쳤다. 또 원평과 장내리 일대에는 관의 약탈에 집과 전답을 빼앗긴 동학도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어 이미 동학촌이 되어 가고, 그에 따라 관의 감시의 눈길도 심해지고 있었다. 언제 다시 장내리 대도소가 관의 기습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가시방석과도 같은 도의 형편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자면 대선생의 신원이 유일한 길이었다. 해월 선생의 통문이 내포 접에도 당도하였다. 각 접별로 덕이 있고 신의가 있고 사리를 아는 대표를 뽑아 사흘 뒤 의관을 정제하고 청주를 ..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6회) 4 김순직의 집에서 동학 입도식을 치른 이창구는 바로 포덕에 나섰다. 그는 가장 먼저 순섬이를 입도시킨 후 정원갑과 함께 장터 포덕에 나섰다. 정원갑은 덕산 장터를, 본인은 면천 틀못 장터를 거점 삼아 포덕을 해 나갔다. 이창구가 입도한 지 거의 육 개월이 지난 1892년 정월이었다. 면천 군수로 심경택이 갈려 가고 홍종윤이 새로 부임을 해 왔다. 조용하던 틀못 장터가 떠들썩했다. 보부상 대표가 신관 수령 홍종윤의 부임을 축하해야 한다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강압적으로 돈을 갹출했다. “이 기회에 관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보부상들과 한판 붙어봅시다.” 동학 도인들은 축의금 거부에 나서자고 했다. 보부상들은 면천 수령이 부임할 때마다 돈을 걷어 수령에게 상납했다. 일 년에 한 번 꼴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5회) - 박이용운 3 순섬이는 집안일을 끝낸 후 방으로 들어왔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땀을 식힐까 하여 뒤꼍으로 난 문을 열어 놓고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곰방대는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 혼사가 깨지고 나서 외로움을 달래라며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었다. 장독대에는 진한 진분홍빛 맨드라미가 한창이었다. 꽃 모양새가 영락없이 닭 벼슬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임금을 지켜낸 장군의 영혼이 환생한 꽃이라고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 옆에는 백일간이나 피어 있다가 진다는 백일홍이 연분홍 낯을 한창 드러내고 있었다. 매미 역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줄기차게 울어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흘렀건만 곰방대를 입술에 갔다 댈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갑자기 순섬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따라 순섬이가 흐느끼기 시작했..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4회) - 박이용운 내포에 부는 바람(4회) “나으리, 지나간 일이지만 혼사 일로 저를 많이 원망하셨지유?” “삶이 원망스러웠습니다만, 지나간 일입니다.” “이제사 얘기인데 당시 순섬 아씨 아버지에게 나으리의 어머니 신분을 고자질한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유?” 월화는 우울한 얼굴로 이창구를 쳐다보았다. “누구면 어떻습니까. 알고 싶지 않습니다.” “덕산 수령이었어유.” “예?” 이창구는 깜짝 놀랐다. 덕산 수령이 대체 내 혼사에 무슨 억하심장이 있단 말인가? “그 당시 혼사를 훼방 놓은 자가 누구인지 사람을 시켜 알아 봤어유. 덕산 수령이더라구유. 관 창고에 쌓여 있는 곡식을 5할의 장리로 빌려주어 이문을 남기려는디 나으리가 2할의 단리를 받고 있으니 방해가 되었던 거지유. 너 좀 당해 봐라 한 거지유.” “장리 문제는 알고.. 더보기
내포에 부는 바람(2회) - 곰방대를 적시는 여름날의 소나기 2장 곰방대를 적시는 여름날의 소나기 1. 이창구는 순섬이와의 혼사가 깨진 후 바로 연산에 사는 도씨 규수와 혼인을 했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결혼 이듬해에 낳은 아들 찬고가 커서 그의 일을 도왔다. 그동안 그는 포목점과 대부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늘리는 능력만큼은 타고났다고 했다. 그의 포목점이 사람들로 들끓게 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그는 무명 열 필을 사면 한 필을 덤으로 주었다. 당장의 이문을 적게 보는 대신 많이 팔게 되니 결국은 나날이 장사 규모가 커지고 버는 돈이 많아졌다. 대부업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채의 이자는 5할 장리로, 춘궁기에 쌀 한 말을 꾸어 가서 가을에 돌려줄 때는 한 말 반을 갚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2할 단리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나락이.. 더보기